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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고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한강 作, 「소년이 온다」 (p134)
이(와 똑같은) 질문을 아예 제목으로 삼고 있는,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 --- 1945년 12월부터 1947년 1월까지, 거의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투옥되었었던 저자 프리모 레비의 기록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유대인 절멸정책을 추진했었던 독일 나치즘하에서의 수용소 생활을 겪었었으며, 독일의 패전으로 인해 기적적으로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지요. 그런, 미루어 짐작컨데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보내었음이 확실한, 그리하여 그의 마음 속에 그 누구도 어림해낼 수 없을만큼 커다란 분노와 증오가 자리잡고 있을 꺼라 생각되는 그는 하지만 놀랍게도!!! 수기 형식의 이 책에서 철저하게 '심판관보다는 증언자(p285)'로서의 역할에 자신을 국한시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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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을 펼치며 과연, 「소년이 온다」 속 질문들의 해답이 이 안에 담겨져 있을까, 최소한 그 실마리라도 있지나 않을까... 라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었지요.
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가?
② 우리는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며, 실제로는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를 통해 증명된 인간의 본질인가?
사실 위의 두 질문은, 서로 반대편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들을 향하고 있는, 그러니까 서로 방향이 다른 질문입니다. --- ①번의 질문은 '가해자로서의 인간'을 보며 하는 것이며, ②번의 질문은 '피해자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지고 있는 질문이니까요. 과연 이 책은 저에게 해답을, 혹은 그 실마리를 안겨주었을까요? 아니! 이 두 개의 질문들에 해답이란 것이 있을 수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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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우리는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며, 실제로는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를 통해 증명된 인간의 본질인가?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 오늘은 명절과 다름없는 날이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중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기억해 보면, ②번의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만약 '그렇다/아니다' 둘 중에서만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그렇다'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에, '인간'과 '개인'의 차원을 너무 단순하게 무너뜨린 결과라는 힐난이 주어진다라면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선택을 바꾸지는 않겠으나, '아니다'라 말할 수 있는 약간의 여지를 이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찾을 수 있었다라고는 말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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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것이 '인간의 본질'인가의 여부를 따져보기에 앞서, 한 개인이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결국엔 살해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그저 두려움의 차원이 아닌 가까운 미래에 실현 되어질 수 있는 현실로 인식하게 될 때, 과연 그 개인의 속마음은 어떠할까를, 실제! 그러한 상황을 겪었었던 프리모 레비의 기록을 통해 느껴보기로 할까요?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할 터였다. 그 이름 뒤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우리였던 존재의 무엇인가가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야만 했다. …… 이제, 사랑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집, 자신의 습관, 옷, 다시 말해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린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는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은 인간적인 친밀감 따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아주 가볍게 결정될 것이다.(pp34-35) ……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용소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p38) …… "언제부터 수용소에 있었니?" "3년" 어린아이 때 들어온 게 틀림없어. 이런 생각을 하자 오싹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여기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p41)
● 프리모 레비는 곧이어 수용소 시절의 자신을 '그저 지친 짐승에 불과할 뿐(p62)'이었다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 그 명단에 올라가면 수용소를 떠나게 되고, 그리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뜻을 가진, 곧! '죽게 된다'를 의미하는 '선발된다'라는, 수용소에서만의 은어가 있었습니다. 치글러라는 사람이 어느 날 '선발'되었었지요. 독일군은 그렇게 누군가가 '선발'되고 그들이 수용소를 떠나기까지의 며칠간엔 보통 때보다 2-3배 많은 죽을 배급해 주었다 합니다. 그들 나름의 자비였었던거죠. 자신이 '선발'되었음을 알게 된 치글러는, 즉! 자신의 생이 이제 며칠밖에는 남지 않다라는 걸 알게 된/알고 있는 치글러는 자신에게 배급된 죽의 양이 보통 때와 똑같자, '자신은 선발되었다고, 그러니 평소의 두 배가 되는 양의 죽을 받을 권리가 있다'라 주장합니다. 그리곤...
"배급이 정확히 주어지자 치글러는 죽을 먹으러 조용히 침대로 간다."(p198)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이것이 인간이다!'라 대답해주고 있는, 사뭇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며칠 후의 죽음보단 당장의 배고픔이 훨씬, 어느덧 '지친 짐승에 불과할 뿐'인 존재가 되어버린 치글러에게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무엇이었던 거지요.
● 저녁 식사 시간 이후부터 다음 날 아침이 올 때까지, 혹 소변이 마려워지면 수용소 막사 앞에 있는 소변통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다보니 자정이 넘기 전에 벌써 그 통이 다 차버리곤 하지요. 소변통의 용량이 다 차게되면, 그 마지막에 소변을 본 사람이 소변통을 비워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습니다. '수용소의 고참들은 감각이 상당히 예리해져서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통의 바닥에 울리는 오줌 소리만으로 오줌의 높이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는지 아닌지를 기적처럼 구별해(p91)'냈었었기에, 그 일은 거의 항상 수용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들의 몫이었지요. 물론! 신참이었던 프리모 레비도 어느 날, 소변통을 옮겨야 했는데...
통은 적정 용량을 넘어 아슬아슬할 정도로 꽉 차 있으므로, 흔들릴 때마다 뭔가가 우리의 발 위로 흘러내리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일이 혐오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침대의 동료가 아니라 우리가 이 일은 명령받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p92)
이 와중에도 그가 '다행'이란 단어를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건 --- 좁디 좁은 침대에서 두 사람이 서로 거꾸로, 그러니까 나의 발이 동료의 얼굴 쪽으로, 동료의 발은 나의 얼굴쪽으로 향해 놓고 잠을 자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얼굴을 향해 발을 놓아야 하는 동료의 발에 소변이 흘러내리는 것보다는, 그래서 내가 그 악취를 어쩔 수 없이 맡아야 하는 것보다는 --- 비록 그것이 동료의 얼굴을 향하게 된다라는 걸 알지만 차라리!!! 나의 발에 소변이 흘러내리는 것이 낫다라는 거지요.
이 부분에서 - 우리가 보통 '베품'이라는 형태로 표현해내는 인간의 본성인 자비라는 건 결국... '나의 소유/나의 안전/나의 행복'등이 이미! 확보된, 최소한 확보될 수는 있다라는 확신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 우리는 정녕... '우리는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해 '아니요'라 답할 수 있는/해도 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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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 사회적 지위 · 출신 · 언어 ·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통제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된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p132) ……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메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공공연히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p134) …… (못 가진 사람, 능력 없는 사람들 등)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p136)
저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범죄자도 정신병자도 없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도덕률이 없기 때문에 범죄자가 없으며, 우리가 하는 행동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일 뿐,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자도 없다(p148)'라는 거지요. 이 상황은 딱!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속 상황과 똑같습니다. 아무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 전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차마 할 수 없었던 행동들을 거리낌없이 하게 되는,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단 하나의 제약조건만 없어진 것일 뿐인 그 상황에서 말 그대로 지옥을 만들어냈었었지요. 그 작품에서 '의사의 아내'는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시다"라는 말로 점점 짐승이 되어가는 사람들을 설득했었었지만...
세면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그저 흙탕물 뿐이었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그런 물로는 차라리 씻지 않는 것이 오히려! 청결과 건강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 반대로, 씻는다는 행위가 '아직 생명력이 남아 있다는 증거로서, 무척 중요하고 도덕이 살아 있게 하는 수단으로써 꼭 필요(p56)'한 것이 아닐까하는 갈등도 가지고 있었었거늘 결국 그의 선택은 :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유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pp56-57)
또 다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여 --- '한 인간'이 '지친 짐승'이 되어버린 결과로, '이전엔 당연한 일'이었던 것마저도 이제는 '어리석고 무례한, 기계적인 습관'이라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보게되는 겁니다. 게다가 이 처참한 변화는 다음과 같은, 상당한 설득력마저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p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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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에 등장했던 '의사의 아내'는 아우슈비츠에도 존재했었습니다. --- 동료 죄수였었던 슈타인라우프의 다음 말은, 비록 그들이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p45)'을 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육체를 씻는 일이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가 될지라도 그럼에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에 어려 있는 조롱, 자조, 또는 절망 등을 (거의) 완전히 불식시켜버리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고 있지요. 지옥같은 모습의 불행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살아내야만 하는 나름의 생존 이유를 대 어쨌든 살아남자!라는,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p307)' 결의를 다져주었고 끝내는 이들을 지켜낼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그런... '이것이 인간이다'가 아닌, '그래서 인간이다'라고나 할까요?
수용소는 우리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의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pp57-58)
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가?
이 책의 저자 프리모 레비는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되었던 이 제노사이드의 원인을 히틀러라는 한 개인에게로만 돌려 설명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라는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히틀러에 의해 시작되었던 '반유대주의'는 그 안에 '거부'라는 본질이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불관용'의 일 현상이었지만, 그가 경험했었던, 수용소의 일상생활에서 현실화되어 나타났었던 유대인에 대한 나치즘의 증오와 경멸에는 역설적으로 그러했기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는 게 아예 존재하질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증오와 경멸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밖에 있(p302)'었다라는 겁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차 안에서 '최초의 구타'를 당했던 프리모 레비는 구타로부터의 육체적 통증이 아니라, 오히려 '경이로움'을 느꼈다라 적고 있습니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도고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p17)
영화 <스카우트>에서 보았던, 소설 「소년이 온다」를 통해 읽었었던 그 상황들 --- 그 당사자들의 심정까지야 헤아려낼 수 없는 관객과 독자인 저로서는 어쩌면! 바로 위의, 어이 없는 의문이, 그 의문이 결국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의, 자문자답스러운 대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이 전혀 작동되지 않는, 바로 그런 상태에서조차 상대를 증오할 수 있고, 실제 진심으로 증오하며, 그 증오의 강렬한 표현으로 가능한 최고 수준의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일이 발생될 수도, 실제 발생되기도 한다라는 걸, 최소한 관객과 독자로서 목격했었기 때문에 말이죠.
내가 직접 겪고 있는 지금의 현실, 그 현실이 지금 나에게 안겨 주고 있는 고통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었을 때보다 훨씬 강하며, 이 과거의 고통마저도, 이것을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 혹은 그저 바라만보는 행위가 생성해내는 심정적 동화로서의 고통보다는 또한 훨씬 더 직접적이며 분명 강할 겁니다. 그럼에도 이는 다시! 제 3자의 입장에 서있는 내가 누군가의 과거 고통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을 (그저) 읽는 것으로부터의 심정적 동화보다는 다시 훨씬 더 큰 것이기도 하지요. --- 그러하기에, 이 책을 '단지 읽었다'라는 것만으로, 이 책의 저자가 직접 겪었었던, 허나 마치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적어낸 이 기록물을 '단지 읽는다'라는 행위로부터는 그 온전한 크기의 심정적 동화를 제가 얻을/받을 수는 없었더랬습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이 책을 읽는 시간이란 게 -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물세례를, 그 끝에서는 엄청난 세기의 폭포같은 물줄기를 맞게 되는 일종의, 놀이공원 속 동굴탐험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요?
제가 이해한 바로선 --- 저자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잔인한 어떠함'을 행하기 위해 인간 모두가 반드시 잔인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대신!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은 반드시 잔인해야하는데, 역사적으로 그들은 실제로 잔인했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의 총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트레블랑카 수용소의 소장들이 그러했었으며, 그로부터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도, 그리고... 35년이 흐른 '그해, 그때, 그곳'에 있었던 '특별하게 잔인했던 군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특별하게 소극적인 군인들' 또한! 그 잔인함의 증인들일 겁니다.
백보 양보해 그저, 단지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하여 잔인해졌을 뿐'이라는 그들의 항변을 들어는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심지어!!! 행여 그런 '기술자'들이 그 '잔인함'이라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여도,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건 절대 아니라고 저자는 자신의 다른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가벼워지기는 커녕 오히려! 훨씬 더 무거워졌노라 말이죠.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이히만이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 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미국 <뉴요크> 특파원으로 참관한 방청석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다."
- 프리모 레비 著, 「살아남은 자의 아픔」 중
헌데 말입니다... 위에 인용한 검사의 말과 한나 아렌트의 말이 오로지 그러한 '기술자'들만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말은, 우리를 지배했었던 일본국, 일본국의 국민들에게도,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던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 그리고 그들의 자손인 저와 당신들마저도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라는 걸 프리모 레비는 이내 깨닫게 해줍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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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적어놓은 작가 소개의 표현을 따르자면) 저자 프리모 레비는 1987년 '돌연한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해 버립니다. --- 누군가의 자살을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었던, 심지어 예고되기까지 했었던 이벤트'라 말할 수는 결코 없겠습니다... 만!!!
누군가는 피할 수 없는 무언가를 피하고 싶어 그러한 선택을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했었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왠지... 프리모 레비에게 '자살'이란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건 아니었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하게만 됩니다. 왜? --- 어쨌든... 그에게 더 이상의 비는 내리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비가 오면 우리는 울고 싶어진다. 11월이다. ……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 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비가 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다. 혹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추가로 죽을 배급받을 차례라는 것을 안다. 혹은 상황이 더 안 좋아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보통 때와 다름없이 배가 고프다. 그러면 정말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을 때마다 종종 그렇듯 정말로 마음속에 고통과 지루함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리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러면 비는 끝이 날 것이다.(pp200-201)
※ 이 부분을 읽기 위해 앞의 페이지들을 넘겼었노라,라 말해도 될 정도로... 부록으로 실려 있는 <독자들에게 답한다>라는 부분은 읽어볼 만, 아니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라까지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 (또한 반드시!라 말하고 싶을 만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주제 사라마구 作, 「눈먼 자들의 도시」
- 한강 作, 「소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