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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雅歌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저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고 있는, 어쩌면! 저와 비슷한 나이의, 저와 비슷한 성장환경을 가졌던 누구에게라도 존재하고 있을듯한 '동네 바보'. ---- 이 작품은 당편이라는 이름의 한 시골 동네 바보의 일생을, 그 본인이 아닌 주변 인물의 회상과 기억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작가 이문열이 쓴 이 이야기는 그런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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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적이면서도 또한 비극적(p35)'이라 표현되고 있는 주인공 당편의 삶을 통해, 한국전쟁 이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경험했었던 산업화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개인의 사회적 위치가 변화되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이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랫만에 국민학교 동창회를 계기로 고향에 모여 옛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왔던 누군가의 한 마디, '요새 당편이는 어예(어떻게) 됐노?(p10)'라는 말로 이야기는 시작되지요. 소주를 마시다, 입가심이라며 한 두 잔의 맥주를 마시다보면 예의... 그 둘을 섞게만 되는 것처럼, 작가는 이 길지 않은 이야기의 전체를 '우리가 느낀 것은 다만 오래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릴 때의 애잔함과 그리움 뿐이었다.(p16)'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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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문열의 소설인데!'로 시작하여 '이문열의 소설이니까!'라는 마무리되었던, 그러하기에 더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는 제 감정을 실어) 좀 심하게 말하자면, 그게 이 작품의 전부입니다. 특별한 줄거리도 없고, 작가가 그토록 강조하는 '기호(記號)'라는 단어의 의미마저도 오롯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실망을 금할 수 없는 졸작으로 받아들여졌다라는 거지요.
산업화 · 근대화의 과정을 겪어가면서 대한민국이라는,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양파껍질과도 같은 사회는 그 가장 바깥의 외피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내가기 시작합니다. 작가가 적고 있는 그 양파껍질은 다음처럼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맨 바깥에 있는 원은 문둥이의 오두막과 거지의 움막집, 백정의 도살장 같은 것들을 잇는 선이 된다. 마을과 다소간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래도 어김없는 공동체의 일부였다. 말라 벗겨저 나갈 때까지는 양파의 맨 바깥껍질도 양파의 일부이듯이. 그 안쪽에는 흔히 미치광이로 불리는 심신상실자와 백치 그리고 생산에는 전혀 참여할 수 없는 중증의 불구자들로 이루어진 원이 있다. …… 그 다음 원은 흔히 반편이로 불리우는 심신미약자나 박약자, 또는 정신이 온전한 신체장애자들이 만드는 원이다. …… 마지막 원은 바보로 대표되는 지려천박자(智慮淺薄者)들이나 무슨 <둥이> 무슨 <쟁이>하는 가벼운 편집증후군의 원이다. …… 그 다음은 몸과 마음이 모두 성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중심이다. …… 당편이는 그 세번째 동심원에서 우리 고향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p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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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한 공동체에 편입된다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곳을 확보하는 데서 비롯되고 그 성원들로부터 특정의 기호(記號)로 인지되는데서 완성된다.(p32)"
작가는 당편이의 삶이 시작되었던 시절만해도, 그곳 시골의 고향에는 그녀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나름 '특정의 기호', 그러니까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인지될 수 있는 그나마의 여지가 있었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고난 후부터는 '소속 없이 틈새를 메우는 기능만으로도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었던 공동체(p105)'가 해체되었고, 그로 인해 당편이의 삶 또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독립된 기능들(p108)'을 요구받기 시작했었으며 결국엔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을 벌거숭이로 고향 거리에 내몬 셈(p108)'이 되었다라 적고 있지요.
이러한 작가의 이해에 동의하느냐의 여부가 이 작품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물론!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다만, 또한 그것과 이 작품에의 만족도와는 별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라 생각합니다. 당장 저만해도 이 작품에 지극한 불만을 가지게 된 이유가 이러한 이해에의 부동의 때문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임에도 이 작품에 대해 책값도 아깝고, 이 책을 읽느라 보낸 시간마저도 아깝다라 느끼게 해준 것이었을까요?
인간은 관례에 따라서 행동하기 위하여 안전을 구하려 하고, 그 안전을 그의 생활환경의 현상유지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는 합리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감상적인 애착 또는 현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가치감정에 동기가 있고, 그 감정은 습관에 의하여 형성되며 공포심에 의하여 자극되는 것이다. 이 습관과 공포심은 보수주의의 두 가지 심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개인에게 주어진 생활환경이 그를 만족시키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심리적 태도로서의 소수주의는 인간의 생활환경에 대한 조정(調整)과 적응(適應)의 과정에서 생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특정적인 교육이나 연령의 영향에 따라서 강화된다. 특히 노령(老齡)이 육체의 쇠약에 따라 비융통성·환멸감과 같은 심리적 변화를 초래하여 보수주의적 태도를 강화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보수주의' 중
① 1948년생인 작가가 자신의 나이 53세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누군가의 성향이 그의 성장환경과 관계가 있을 수 밖엔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만, 또한 그러한 면이 작가 이문열의 작품들 속에 흠뻑 녹아있다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이 작가를 좋아하기도 합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어질 수 없는, 작가 이문열의 '극단적 보수주의'의 한 원인을 --- 어쩔 수 없이 그의 연령에서 찾을 수 밖엔 없었습니다. 작가가 적고 있는 대로, '오래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릴 때의 애잔함과 그리움'이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 '애잔함과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다면 그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생각합니다. 비록 그 내용이 처절했었고, 심지어 비참하기도 했었으며, 현재의 잣대로는 도저히 용납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해도 말이죠. 허나!!!
제가 이 소설을 읽어가며 받았던 뉘앙스는 --- 작가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단순한 '애잔함과 그리움'의 수준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라는 것이었더랬습니다. 즉! 'status quo를 원한다'라는 아주 좁은 의미로서의 '보수'이건, 혹은 '공포심에 의해 자극되어진' 그리하여 보다 적극적인 '反진보'의 양태를 띠게된 '보수'이건, 그 모두를 포괄하는, 그저 이 시대에는 좋게 보아질 수 없는 모습들만을 모아놓은 듯한 '보수'인양 싶은 작가의 성향이 너무도 뚜렷하게 보여졌다라는 거지요.
발전, 진화, 혹은 진보 --- 그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지금의 시대엔 발전이건 진화건 혹은 진보이건 무조건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must have item이 되어있다라는 우석훈 박사의 한탄에 동의할 수 있다라면, '진화'는 그저 '다양성의 증가'를 의미할 뿐, '진보'처럼 방향성을 가진 개념은 아니다라는 스티븐 굴드 박사의 말에도 또한 동의할 수 있는 독자라면!!! ---- '다양성의 증가'라는 단순한 현상을 우리 사회는 특정의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진보'라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라는, 그리하여 (그 비난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진화'는 must have item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우리는 지금 더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라는 비난의 화살을 엉뚱하게도 '진보'를 향해 쏘고 있다라는 비판을 이 작품 「아가」의 작가로서의 이문열에게 퍼부을 수 밖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해!!! 그는 '다양성의 증가'로 인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그저 이제는 쉬이 찾아보아지지 않을 뿐인 당신의 추억 속 옛 장면들이 아예 사라졌다라 개탄하고 있으며, 행여 그것들이 사라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단죄의 영역이 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그 결과의 책임을 '사회의 진보'에게로 돌릴 수는 없다라는 것마저도, 최소한 이 작품을 쓰는 동안에는 혹여나 잊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싶을 정도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요. 대한민국 보수의 씁쓸한/어리석은 일면들만을 한데 모아,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② 저 어릴적에도, 제 또래보다 두어 살 많아보였던 그 동네바보를, 친구들과 함께 참 많이도 놀려대고 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이가 되어, 그때의 제 행동들을 '잘못된 것'이라 고백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그건 그때의 일들이었으니까요. 또한 하지만!!! 그것들을 변명하려는 생각도 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말이죠...
작가는 정상인의 지능과 신체적 기능을 가지지 못한 당편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음과 같이, 우열의 관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우열의 판단근거가 된다라는 것 자체를 제가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누군가의 지능과 신체가 정상인의 그것들보다 모자라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누군가들 - 지능과 신체가 정상적인 사람들 - 에게 특정의 효용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라 생각하고 있거늘, 작품 속 화자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지요.
한줌도 안 되지만 정채(精彩)와 영화(榮華)를 타고난 존재들, 우리보다 잘나고 날래고 똑똑하여 운명의 편애를 받는 이들은 또한 얼마나 자주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하고 속절없는 열패감(劣敗感)이나 천박한 시기로 스스로를 쥐어뜯게 하는가. 그런 그들에 비해 우리보다 못나고 더디고 모자라는 이들은 존재 그 자체가 큰 위로이다. 그들로 하여 우리는 안도 속에 자신의 삶의 돌아볼 수 있고 성실과 경건의 결의까지도 다질 수 있게 된다. 유식한 말로 하위모방(下位模倣)이나 아이러니 양식이란 것의 효용도 이에 다름없을 것인데 당편이는 옛 고향 사람들에게 바로 그 살아 움직이는 효용이 아니었는지. (p115)
나를 중심으로 나보다 상위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느끼는 열등감을, 나보다 하위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로부터 받는 위로로 보상한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 도식은 --- 그 열등감의 크기가 커질수록, 내가 받아야하는 위로의 크기도 또한 커져야만 한다라는 이기를 낳게 되고, 그것은 결국 가학을 통한 자기위안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에까지 이르르게 되지요. 당편이보다 한참 어린 화자와 그 또래들이 '당편이의 전설에 한 주역으로 개입(p192)'했던 장면들은 오로지 당편을 성적인 희롱의 대상으로만 그려내고 있을 뿐입니다.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역겹기까지도 하지요. 그런데!!! 그 장면들을 마무리하고 있는 화자의 변명이 더욱 가관입니다. 작가와 작품을, 그리하여 작품 속 인물들의 생각과 언행들을 작가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라면, 이러한 변명을 만들어내었고 또 작품 속에 담아낸 작가에 대해 가지게 되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그런 한낱 궤변일 뿐인, 오로지 자기위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타인이 받아야했던 고통을 보기좋게 포장하고 있는 다음의 말은, 이것와 과연 내가 아는 작가 이문열이 쓴 작품 속에 나오는 것인가하는 믿기 힘든 의심을 갖게 해주더군요.
우리가 성적인 측면에 집착한 것은 그녀의 불행을 즐기는 잔혹 취미가 아니라 불완전한 그녀의 성적(性的)기호를 보완해 주는 의미가 있었다고. 우리는 진심으로 그녀의 여성성을 승인했으며, 방법은 달랐지만 틀림없이 그녀를 한 여성으로 사랑한 것이라고.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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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의 연가」를 읽고 쓴 감상문에서 전, 그 작품의 유효기간은 이미 지났다할지다로, 작가의 유효기간은 여전히 남아있다 믿고 싶다라 썼었습니다만... 이 작품 「아가」를 읽고나니, (이 작품에 등장하는 표현인) '어떤 사람의 의식을 일생 지배한다는(p103)' 이데올로기를 등장시키지 않는 그의 작품에 한하여! 작가로서의 그의 유효기간에 대해 난생 처음으로 막걸리 통을 빙빙 돌려가며 그 제조일자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심을 품어보게만 되었습니다.
이미... '작가'로서의 이문열에 관한 소식을 들은지 오래된 지금, 마지막으로 접했던 그의 소식이란 것 또한 독자들 스스로 과거의 이문열과 현재의 이문열을 단절시켜버리겠다는 점. --- 이 소설 속 화자가, 그리하여 작가가 말하고 있는 말은, 비록 이것이 당편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문득!!! 작가로서의 이문열에게도 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지극한 아쉬움을 느끼게만 됩니다.
아직!!! 사놓고 읽지 않은, 다시 읽어보려 사놓은 그의 책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마냥 웃을 수만도 없듯이, 특정 작가의 모든 작품들이 반드시!!! 깊고 생명력 긴 잔향을 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수많은 향기를 자아내다보면 가끔은... 향기가 아닌 악취를 만들어낼 때도 있는 거라고, 이 작품 「아가」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노라고, 그냥 그렇게 애써 믿어보려 합니다. 이 한 작품으로 작가 이문열에 대한, 그간 쌓여온 저의 애정이 순식간에 식어질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저 아쉬웠노라고, 근데... 참 많이도 아쉽기는 하네요. --;;
누군가 말했듯,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 속한다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거기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 누구 또는 무엇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존재는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존재를 존재답게 해주는 소속과 관계는 소통에 바탕한다. 타자(他者)와의 소통이 없이는 소속도 관계도 없다. 그런데 그 소통은 대개 기호(記號)와 인지(認知)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기호는 존재의 발신(發信)이며 인지는 타자의 수신(受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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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형성된 기호는 스스로 파괴되거나 지워지는 법은 없다. 타자의 수신 거부나 인출불능(引出不能)만이 그 기호를 파괴하고 지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무관심 혹은 둔감이라 부르는 주의 소홀은 바로 그 수신 거부의 효과를 가지고, 보다 뒤에 수신된 강력한 신호들의 간섭은 기억의 쇠잔이나 불용(不用)과 마찬가지로 그 인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고향 사람들에게 당편이라는 기호의 특징은 문제적(問題的)인 데 있었다. 그런데 그녀 생애의 절정과도 같은 그 단옷날 하루가 그런 특징을 지워버렸다. 장터거리 사람들이 이제 당편이도 성하고 똑똑한 자기들과 다름없는 삶으로 편입되었다고 안도하는 순간, 무관심과 둔감이 그들을 덮쳐 당편이란 기호는 수명을 다했다. 거기다가 현대성이란 말로 뭉뚱그릴 수 있는 여러 강력한 신호들이 사람들을 간섭해 이미 저장된 기억도 인출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마지막 몇 년 동안 당편이는 분명 장터거리 한모퉁이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수신되지 않아 무의미해진 기호였다. 그녀가 살아 있었던 것은 오직 한 사람 영감에게뿐이었다. (pp294-296)
※ 감상문을 써놓은 작가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 : 「황제를 위하여」 · 「젊은날의 초상」 · 「시인(詩人)」 · 「레테의 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