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지음, 이은경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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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지루한 상황이나 일이 계속되면, 권태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권태를 표현하면, 게으르거나 참을성이 없는 사람으로 혹은 사명감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피터 투이는 이런 권태를 “상황적 권태” 혹은 “과잉에 의한 권태”라고 부른다(pp. 22~23). 그리고 이 둘을 묶어 “단순한 권태”라고 한다(p. 28). 그의 이러한 구분은 권태를 단순한 권태와 실존적 권태로 나눈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분류법에 따른 것이다(p. 175). 한편, 저자는 수많은 미술이나 문학 작품을 열거하면서, 소위 “실존적 혹은 정신적 권태”에 대해 언급한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사람들이 멜랑콜리 내지는 실존적 권태에 집착하고 있음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 사르트르의 <구토, Nausea>, 카뮈의 <이방인, The Outsider>를 예로 든다. 그러면서 저자는 반문한다. 정말로 실존적 권태라는 감정이 존재하는가? 그는 “실존적 권태란 권태, 만성적 권태, 우울, 과잉, 좌절감, 잉여, 혐오감, 무관심, 무감정, 속박감이 합쳐진 데서 생겨난 하나의 개념”(p. 189)이지 감정은 아니라고 단정한다.   

이 책의 저자 피터 투이는 자신이 오랫동안 권태의 본질과 역사를 연구했다. 삼천년이 넘는 역사를 넘나들고, 다양한 미술작품과 문학작품들을 통해 권태를 설명한다. 또 심리학과 신경학의 연구결과까지 소개하며 권태를 말하고 있다. 그의 박학다식함으로, 이 책은 권태에 대해 전혀 권태롭지 않게 전개해 나간다. 독자의 예상을 뒤엎고, 실존적 권태가 아니라 단순한 권태가 더 보편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 심리학에 더 근본적인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권태는 특히 후기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더 깊이 인식되었는데, 그것은 여가 생활이 늘어나고 행복의 권리가 부각되고, 개인의 권리와 내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관료화로 시간과 공간의 표준화와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p. 205). 한마디로 먹고 살기 편해졌을 때, 권태가 더 잘 인식된다는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다. 먹고 살기 바쁘면 권태라는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권태를 느낀다는 것은 좋은 것이며, 어쩌면 사치스러운 감정이지 않을까? 

저자는 결론적으로 “권태는 인간이 겪는 정상적이고 유익하고 아주 흔한 경험”(p. 233)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니 권태를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생각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권태가 들려주는 충고를 받아들이고, 권태가 일으키는 상황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는 것”(p. 238)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음악, 에어로빅과 같은 운동, 사람들과의 대화를 하는 공동체 생활, 등 신체 정신적 활동을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권태의 유익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권태는 무엇보다도 창조성을 북돋을 수 있다. 권태라는 정서를 통해 세상을 알고 자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권태는 자아 인식을 강화시켜주므로, 권태를 발판으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권태는 훨씬 더 쉬우면서도 따분한 감정이다. 이 책을 읽으니 안심이 된다. 권태라는 정서,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나를 더욱 나답게 만드는 것이니까! 권태로워 하품을 하게 되면, 그 하품을 즐기자. 하품은 뇌를 식혀주고 혈관에 피를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므로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하자. 권태로움이 몰려올 때, 그것을 발판삼아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 정직하게 들여다보자. 권태로울 수 있음을 감사하자. 하지만 권태의 감정이 만성적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이 책, 재미있게 읽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전혀 권태롭지 않은, 권태에 관한 책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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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처럼 - 삶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앤드류 머레이 지음, 유재덕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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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참 믿음은 여기서 언제나 더 나아간다. 구원받은 자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Like Christ)되기 원한다. 전인격이 예수님을 닮기 원한다. 남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는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삶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설교했고, 그것들이 <그리스도처럼>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레이 목사님은 제1부에서 제일 먼저 요한일서 2:6을 설명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저자는 주님 안에 사는 것과 주님처럼 행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는 자는 주님이 걸어간 것처럼 걸어야 하고, 그리스도처럼 걸으려면 반드시 주님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제2부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부인의 삶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지만, 옛 아담은 십자가에 달렸으나 아직 죽지 않았다”(p. 57)는 저자의 지적이 마음에 깊게 남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나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지만, 나 자신을 성찰해보니 옛 사람이 아직도 죽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제3부에서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에 대해 배웠다. 이 두 가지 표현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얽힌 위대한 신비를 이해하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사는 데 실패하는 것은, 세상의 정신에 함몰되어 지나치게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머레이 목사님의 지적에 공감한다.  

제4부에서 제7부까지는 그리스도처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겸손하게 자기를 내려놓고, 그리고 온유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불쌍히 여기며”가 가장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주님이 이렇게 불쌍하게 여기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 분이 하나님의 뜻을 임무나 의무로 간주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주님은 자기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모든 감정과 동기를 거기에 맞추셨다”(p. 115). 나는 여기서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처럼 사는 일은 단순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지 않음을 확실하게 발견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을 때, 그것은 단순한 임무나 의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억지로 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더욱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놀라운 특권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산다면, 나는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 처음으로 다시 나의 눈길이 갔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과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그 분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한 주간 읽으면서, 마치 말씀수련회에 참석한 것 같았다. 깊은 은혜의 시간이었다.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에 대한 강력한 도전의 시간이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일과 은총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이 두 가지 일은 항상 함께 가야 한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인가? 나의 삶으로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 서평은 브니엘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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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감출 수 없는 내면의 지도 상상에 빠진 인문학 시리즈
벵자맹 주아노 지음, 신혜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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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얼굴’은 ‘얼(영혼)이 표현되는 굴(통로)’라는 의미라고 한다. ‘얼굴을 내밀다’는 모임 따위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 사람의 존재를 표현하는 말일 게다. ‘얼굴을 들다’는 떳떳하게 남 앞에 선다는 뜻이며, ‘얼굴이 두껍다’는 뻔뻔스럽다는 뜻으로 여기서 얼굴은 한 사람의 인격을 의미한다. 확실히 얼굴은 단순히 신체 일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회학적 상징 의미가 있다. 서양 언어의 얼굴도 라틴어 persona에서 파생된 person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얼굴, 감출 수 없는 내면의 지도>라는 이 책의 제목은 타당하며, 나에게 큰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책의 저자 벵자맹 주아노(Benjamin Joinau)의 이력이 흥미롭다. 인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그가 한국에 매료되어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연구하였고, 그의 학문 분야로 문화인류학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 책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면이나, 한국판 고르곤 형상들이라 할 수 있는 절의 문에 있는 괴물들, 도깨비, 제주도의 돌하르방, 장승, 심지어 변강쇠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들어가는 말의 첫머리와 나가는 말의 마지막에 한용운의 시를 인용한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인가요 …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pp. 8, 277). 어쨌든 저자는 고대의 신화와 가면의 사용에서부터 현대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얼굴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파헤쳐보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야심찬 시도가 이 책을 조금은 난해하고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얼굴 연구를 통해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1부에서는 얼굴의 각 부분의 상징성과 가면의 역할을 다룬다. 결국, “얼굴이 개인의 정체성이 작용하는 곳에 가깝다면, 가면은 보편적인, 즉 사회적인 ‘자기’와의 연결”(p. 95)이라 할 수 있다. 2부는 얼굴에 대한 정신분석적, 심리사회적 접근을 시도하다. 특히 ‘거울 단계’ 이론은 흥미롭다. 신생아는 자신의 얼굴이 비친 거울을 통해 점차 ‘나'라는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거울을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도 있겠다. 한편, 얼굴은 내가 어느 정도 꾸미고 바꿀 수 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내 것이지만 완전히 내 것은 아니다. 얼굴은 내가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는 볼 수 없는 것이라는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런 모순 속에서 얼굴 표정은 그 사람의 인간성을 증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얼굴을 보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가릴 때 살인이나 사형집행은 쉬워진다. 왜냐하면 얼굴은 우리에게 ’죽이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3부는 동서양의 미술 세계에서 얼굴의 의미를 살펴본다. 쿠베르의 <자화상>과 뭉크의 <절규>는 현대인의 실존적 고뇌를 담고 있다. 이들의 그림에 등장하는 얼굴은 자기 소멸에 놀라는 얼굴이다. 4부에서는 현대에 있어서 얼굴이 몸의 다른 부분보다 얼마나 더 변형되고 파괴되고 해체되었는지를 현대미술과 예술을 통해 제시한다. 마이클 잭슨은 수십 번의 성형으로 결국 얼굴 없는 인간이 되자,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 수 없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공연할 수는 있었지만, 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술 아래서 망가지고 사라진 그의 얼굴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처한 위기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p. 262)는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오늘날 얼굴은 상업적 가치를 얻었지만, 정신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다. 얼굴은 인간 정신의 복잡한 구조물이기에 어느 시대나 문화에서나 얼굴의 존재론적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문제는 현대에 우리의 얼굴의 존재론적 의미가 너무나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비인간화’를 의미한다. 이제는 인간의 얼굴, 그 신비한 의미를 다시 찿고 고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 창세기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물질과학 문명 속에서 상실한 인간의 존엄성과 정신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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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부르는 결정적 순간
박경일 외 지음 / 꿈의지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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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넘겨 사진을 보는 순간, ‘아~’ 하고 신음소리가 나왔다. 너무나 아름다운 것과 조우(遭遇)할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탄식에 가까운 감탄사다. 4명의 일간지 여행기자가 일을 냈다. 한국의 절정적인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해 낸 것이다. 사진들을 보는 순간, 그 치명적 아름다움 때문에 ‘아 그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들뿐이다. 사진들이 너무 눈물겹게 아름다워 에세이 글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글들을 조금 읽다가는 어느새 사진으로 눈길이 간다. 나는 강진군에 있는 다산초당을 한 여름에 들렀었다. 그저 짙은 녹음에 한적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 책 첫 번째 여행지 사진인 동백꽃 떨어져 뒹구는 다산초당 마당은 왠지 모를 애처로움이 가득하다. 아, 같은 장소도 시간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 있군! 아니, 실제와 사진의 차이일까, 보는 각도의 차이일까? 구례의 산수유 마을, 밀양의 위양못, 나주의 영상강, 창녕의 우포늪, 화천의 산소길 수상부교 사진은 한 폭의 수채화다! 

벌써 가을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가을 편을 들여다본다. 대학교시절부터 그렇게 많이도 다닌 남이섬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사진 한 장에 담긴 결정적 순간이 여행을 부른다. 이건 단순히 여행 안내책자가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와서 보라는 초대장이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들은 말했다. “여행기자들, 이들이 독자들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 가고 싶다’일 것입니다. 여행기자들은 독자들의 그 말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이 책은 작가들의 의도를 백 페센트 충족시켰다. 나의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다. 충주의 청풍호는 어떤가? 유람선을 타고 구담봉을 보았었다. 잔잔한 호수에 비친 모습이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았는데, 사진에 담긴 충주호의 단풍과 늦은 오후 빛을 받은 호수의 모습은 나를 숨 막히게 한다. 울진 간월재의 억새풀은 또한 어떠한가! 억새풀하면 나는 제주도 산굼부리의 억새풀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몇 년 전 그곳에서 해질녘 찍은 몇 장의 사진들을 보물처럼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해돋이 때 푸른빛 도는 억새를 담아냈다. ‘이건 사진일 뿐이야, 실제로 가면 오히려 실망할 거야’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마음을 잡아 보지만, 자꾸 자꾸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나는 어느새 그곳에 가있다.  

나는 올 가을 인제의 자작나무숲에 가고 싶다. 자작나무하면, 왜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가 떠오는 것일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그 차가운 바람과 호수, 그리고 자작나무. 인제의 자작나무숲은 삼나무, 낙엽송, 잣나무와 어울려 늦가을이면 순백의 자작나무가지들 위에 빨강, 노랑 색칠을 한 것처럼 알록달록한 무늬가 얹혀 있다(p. 301)고 한다. 그 고결한 자작나무 숲에서 차가운 새벽을 맞이하고 싶다. 아! 그 곳에 가고 싶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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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미술관 - 미술, 영화를 읽다
정준모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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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년 동안 수십 권의 미술책을 섭렵했다. 슬슬 실증을 느낄 무렵 이 책을 접했다. 이 책, <영화 속 미술관>은 새롭고 재미있다. 저자 정준모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휴식 내지는 도피로 즐기는 정도의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고백한다. 그런 그가 미술학자답게 자신이 본 영화에 나오는 많은 미술작품에 사로잡혀 영화 속 미술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저자는 영화든 그림이든 관람객이나 독자들이 지나치게 계몽주의적 감상법을 고수한다고 지적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보는 자신의 생각보다 작가의 의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느낌과 감상이 아닐까? 맞는 말이다. 이 책은 화가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 뿐 아니라, 미술 작품이 나오는 영화나 미술 작품이 모티브가 된 영화들을 거론하면서 미술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과 감상들을 흥미롭게 펼친다. 

저자가 내가 본 영화들을 이야기하고 그 속의 화가의 삶이나 미술작품 이야기를 할 때, 특히 흥미로웠다. <팩토리 걸>과 앤디 워홀에서 작가 정준모는 워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평범하게 평범한 것들을 평범하게 만들어 갔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워홀은 스스로를 예술로 만들었다.”(p. 18), 일상의 하찮은 것들이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워홀 자신이 예술이었기 때문이란 말이다. 영화 <취화선>이 장승업을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접근해서 예술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약화시켰다고 아쉬워했다. 영화 <클림트>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드는 혼미한 정신 상태에 있다. 이것은 비록 클림트가 그의 작품에 지독한 아름다움, 관능적인 에로티시즘, 장식성의 본질을 선명하게 그렸지만, 자기 자신에게 남은 것은 모호함 뿐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이 외에도 <올드보이>(앙소르의 <슬퍼하는 남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베르메르), <까미유 글로델>, <프리다>(프리다 칼로), 이 정도가 내가 본 영화들인데, 작가 덕분에 이들 화가들과 작품들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냉정과 열정 사이>도 한 몇 년 전 DVD로 보았는데, 이 영화에 치골리의 그림이 나오고, 이 영화의 원작소설에는 프란체스코 코사의 유화가 나온다는 것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나의 미술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마구마구 자극시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에서 열심히 화가들의 작품들과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아, 이런 영화구나, 이런 작품이구나’ 하고 연신 감탄했다. 예를 들어, 십 여년전 어빙 스톤의 소설, <빈센트 반 고흐>와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이 소설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열정의 랩소디, Lust for Life>와 <아거니 앤 엑스터시, The Agony and the Ecstasy>였다. 그러고 보니, 원작 소설과 영화제목이 동일하다. 이 영화들을 DVD로 구매해서 감상해 보고 싶어진다.  

<영화 속 미술관>은 영화를 통해 화가들에 대해 말하고 화가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풀어 낼 뿐 아니라, 미술사의 다양한 상식들도 생생하게 전해준다. 내가 새롭게 배운 것들 중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은 “공예적 기법처럼 명확한 윤곽선과 색채를 보여주는” 것이다(p. 6). “인상주의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전제된 화파”다(p.96). 아르뷔르(Art burt)는 "정신분열증 환자와 아마추어 화가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꾸밈없는 순순한 미술“을 말한다(p. 176). 타르코프스키는 "예술은 사실의 반영이 아니고 진실의 창조”라고 말했다(p. 302), 등등.  

화가와 미술작품에 대한 상식을 갖고 싶은가? 이 책을 읽어라. 자기만의 작품 감상을 하고 싶은가? 작가 정준모가 어떻게 영화 속에서 미술작품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감상하는지 들여다보라. 갑자기 또 다른 미술 책들을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나를 아마추어 미술광으로 만들고 있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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