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하고 싶어도 완전히 전달할 수 없음에 대한 애절함과 비통한 우울감을 자아낸듯한 느낌이 드는 노래, 전하지 못한 진심. 우연히 유튜브에서 음악 서핑하다가 얻어걸린 곡이었다. 외국 소녀가 부르는 노래 동영상(영어곡)을 보다가 노래가 차분하니 울림이 있네 하며 듣던 중 동영상에 달린 아래 댓글을 보니 원곡이 BTS가 부른 곡이었던 거다. BTS를 전혀 몰랐다. 아, 그랬구나.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는 아쉬움이다. 인류의 역사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한 인간의 삶의 과정은 보통은 소통, 다른 말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정서의 교류와 교감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다 아시다시피 인간이란 사회적인 관계 형성의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 소통이라는 거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인 요소로서의 소통을 하고 있다지만, 엄밀하게 전부 소통이 될 수 있을까. 뭔가 전달할 수단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과연 진심의 전달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물며 전기가 이동할 때 전류 손실이 발생하고, 완전한 에너지의 전달도 없는 건데, 과연 사람의 진심은 백 퍼센트로 전달 가능이나 할까 묻게 된다. 연인 관계라 할지라도, 부모 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혹은 수십 년 소주 마시며 놀던 친구 간에도, 아니면 더 나아가 나와 나 자신 간에 있어서, 어느 것이 헛심인지 진심인지 욕망인지 욕구인지 주장인지에 대해 전달이 제대로 하기는 했나 따질수록 모호해진다. 그래 대충 뭉덩거려 개념적인 요지나 계통적인 맥락만 전달되면 되는, 그래서 어쩌면 소통과 불통의 중간 어디쯤에서 진심이라며 뜻과 의미나 의사를 덩어리로 뭉쳐 주고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또는 이해와 오해의 이 사에 어디쯤에 있을까. 누군 "아"로 들었는데 "어"로 말했다고 하는 이 소통과 불통과 이해와 오해의 인간관계의 사이에서 말이다. 가끔 내가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으며 소통의 수단을 활용한다 해서, 얼마나 전달이 될 것인지 구체성에 대해 얼마나 큰 모호성을 가지고 있을지 사람의 마음은 헤집어 낼 수가 없다. 이렇게 소통이란 무엇으로 담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 사회생활에서 보자면, 난 널 못 믿으니까 각서를 쓰라는 둥, 담보를 설정하라는 둥, 합의서나 확약서 따위를 쓰고 공증하며 서로 진심을 나누었음을 객관적 문서화 시키곤 한다. 이게 다 오해와 이해의 차이에서, 서로의 약속을 증명하는 이유가 많은 것도 이해가 오해되는 수많은 경우의 사레를 조금이나마 예방책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제의 의미가 오늘에서는 어떻게 변화하는 것인지, 혹은 오늘의 뜻이 내일은 또 무엇으로 바뀌는 것인지 서로간의 약속은 철저하지 못한 것을 너무 많이 경험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의 전달적 수단으로 피사체가 되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사하여 명확하지만, 또한 얼마나 사진이 의미나 의도하는 뜻이 모호한 것인지 사진을 찍을수록, 점점 완전 소통과 완벽한 불통의 어느 지점의 중간에서 서성거리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오래전 살았을 적에 사진을 열심히 찍었던 사람 (비비안 마이어)의 이야기에서 보니 딱 그러하다. 어떤 글도 없이, 노 퍼블리싱 했으며, 오로지 사후에 발견된 사진만을 가지고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의 진심을 어떻게 정확하게 전달받을 수 있기는 있는 것일까.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즉 알지를 못한다. 그래서 사진이란 일부를 보고 추측을 하고 추측을 확장하고 확장된 추측이 곧 신화같은 전설적 인물로 바뀐다. 당시 살았던 이력이나 경력만을 가지고 사진을 찍는 활동과 내용을 보며 삶과 사진의 관계를 연결하는 예측이 얼마나 찍는 사람의 진심이었는가에 모호함을 해소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일어나는 이유기도 하다.
아 당신은 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이 사진을 직접 찍었는지? 물어도 사진으로는 말이 없으며 사진은 또 그 어떤 말을 하는듯하다. 알듯 모를 듯한 불명확한 말들이다. 명확성이 대단히 높은 사진을 두고 그 뜻과 의미의 불명확성은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설명이 되다가도, 설명이 안되는 의미론적인 사진은 현실을 기반으로 직접 찍었으나 또한 직접 말로써는 아닌 그 의도의 불명확성이다. 단지 사진을 찍었을 뿐인 사람이 사후에 비로소 작가라는 칭호를 후세의 사람들에게 회자될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은 사진을 찍고 발표할 기회가 전보다는 훨씬 많다. 진심을 주장하여 외치든 소통의 진정성을 의도하든 뭐든 간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도 많다. 하다못해 작가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진이라 할지라도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에 사진을 업로딩하여 보여 줄 수 있고 하다못해 SNS의 모임에서도 오늘의 일과들을 설명할 수도 있다. 하다못해 새해 인사랍시고 이미지를 다운로드해 다시 전달하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의도의 말을 전달한다. 그럼에도 우린 현대의 각 개개인의 형식적, 타성적, 의례적인 인사 대신에 진짜 정말로 전달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이며 어떤 것일까. 혹여 진심을 내보였다간 서로 간에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혼네와 다테마에 로 은유된, 진심과 겉심의 마음들 사이에서 이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한 적은 없는가 말이다.
정말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들어 내려 않는다. 마음의 밑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아서 좀처럼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활성화되기가 어렵다. 그래서 소통이 쉬운 것이 아니란 거다. 과연 사후의 명명된 작가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면서 나는 왜 오늘도 사진을 바라보며 사진 찍고 싶어 해서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서 밥 벌어먹는 짓에 대해 환멸적 구속처럼 여기면서 그 사진의 욕망으로 무엇을 하려고 현재의 구속을 싫어할 것인지에 대해 따져 보게 된다. 딱히 결론이랍시고 명확하게 아 이거라며 그것을 지시할 것이 확연하게 부각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가 나와의 소통이 부재중인을 자각하게 된다. 그 왜 한창 유행가 가사에서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낸들 너를 어떻게 알겠소냐'라고 하는 까닭이 낯설지가 않다. 참으로 미묘한 간극이다. 진실로 하고 싶은 의미를 내보이기 어려운 것들에 대해 답답증이 도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진심이라며 함부로 들어 내어선 안되는, 관계의 일탈을 두려워한다. 그래서일까? 심리학에서는 행동학으로 그 사람의 행위적인 말을 해석하려 하고 행동으로써 그 의미를 추출하려 드는 이유가 아닐까. 나의 욕망에 충실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나의 욕망을 적당히 행동과 말의 커튼을 치고 보이지 않게 단지 상대가 어떤 유리한 해석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지나 않을까라는 자극을 알아차리는 것이 눈치코치로 재는 건지도 모르겠다.
달리 생각해서, 모든 마음에 진심만이 최선이거나 최고일 수도 없다. 인간이란 서로 간에 이익과 생각이 욕망이 상충될 때 어떤 적당하게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 만큼 정도로 위선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가끔 위선적이라고 듣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진심만을 말하지 않는다 해서 거짓이라고 몰아세울 수도 없다. 위선과 거짓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 사의 관계를 틀어지지 않는 일종의 모순을 처음부터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