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행복하라 - 법정 스님 열반 10주기 특별판, 샘터 50주년 지령 600호 기념판
법정 지음 / 샘터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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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몇 출판사에서 법정 스님의 책이 출간되었다. 의도야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며 유언으로 남겼다. 말빚이 너무 크다고 하셨다.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책이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하게 의사를 표시하고 떠났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은 법정 스님의 기록문이나 예전에 남긴 글로 새로이 엮어서 책으로 냈다. 이는 유언에 의미하는 뜻에 반하고, 무시하며 따르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하지 말라고 부탁하면, 아무리 하려 해도 참아야 하는 게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태도가 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따르는 척만 할 뿐, 실제로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무소유를 설파하며 떠난 스님의 유언이 남은 자들의 어김에 대해 소유의 빚으로 남은 거다. 하지 말라고 부탁하면 하지 않는 게, 인간적인 도리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님은 절판하라고 했으나 이미 나온 자신의 책을 불 질러서 없애란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출간된 책만으로도 얼마든지 떠난 고인의 의사를 되새기고 삶의 방향성으로 삼는 가르침을 받기에 충분하다. 떠난 고인이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추가로 하는 것도 아니다. 언제 가르침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미 차고도 넘친다. 불교의 종교관은 욕망의 헤탈을 수행으로 삼는다는 것이지만 의미만 가지고는 어렵다. 스님이 사신 것처럼 평생을 절제하고 욕망에 자신을 함몰시키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를 그의 말을 통해서 안다고는 하나 실제론 적용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스님은 말의 빚을 졌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다못해 우리들은 자본주의적 욕망에 찌들려 살면서 말의 빚은 물론이거니와, 이에 더해서 무수한 존재의 빚을 지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알게 모르게 공해 물질을 얼마나 뿌렸을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 시켰을 것이다. 입고 다니는 옷을 만들기 위해 들였던 에너지와 가공하고 만들기 위해 부산적으로 나오는 공해물질은 또 얼마나 될까 계산하기도 어렵다. 살기 위해서 자연의 공해라는 물질을 뿜뿜하는 가해자 거나 혹은 공범자가 되는 셈이다. 오늘날 많은 건축물이나 구조물에는 일일이 따져볼 수도 없이, 발생하는 에너지의 소비가 결국은 전 지구적인 자연환경에 일말의 안전에 도움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원시시대로 돌아가서 돌도끼를 들고, 동굴에서 기거하면서 풀잎으로 가린 옷을 입고 살지도 못한다. 절대 원시로 돌아갈 의도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알게 모르게 뿜뿜하고 살아야 할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도, 확답도 못한다. 우선 당장의 공해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먼 훗날에 내가 알지 못하는 현상으로 벌어질 것인지 그 각자가 지는 책임은 1/n이 될 것이고 피해는 가난의 순서로 돌아간다. 피해자가 되는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존재론적인 빚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산 자들이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그 유언의 뜻을 무시해가며 뜻을 어기고 책을 낸다. 스님요. 당신이 떠난 후의 당신이 주장한 말씀은 더 이상 당신 자신의 소유가 아님이었다는 것을 스님을 몰랐을 것이다. 어찌할 방법을 잃어버렸으므로, 내가 떠난 후 당신 자신이 남긴 모든 것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의 소유였음을 법정 스님도 몰랐을지도 모른다. 이미 내 손을 떠난 모든 것을 더 이상 내 것도 아니다. 스님의 남은 말씀이 스님의 소유가 아닌, 살아남아 유지를 받들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것으로 소유가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무소유란 내가 떠난 이후의 소유가 무의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은 사람은 남겨진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다면, 더 이상 가타부타 할 것도 없다. 내가 떠나고 남은 말들이 결국은 스님의 빚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빛으로 환유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더이상 남기지 말고 절판하라고 해도, 절판하지 않는다 해도 법정 스님은 아무런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절판의 유언은 그저 유언만으로 남았을 뿐이다. 지키든 말든 남은 자들의 업,,,으로 남았다.

 

결국 남은 사람들은 유언의 유지를 받을까 말까라는 고민이 주어졌다. 남겨진 책의 말씀이 어떻게 사용되든 이용을 하든, 결국은 남겨진 사람들이 행할 자신들에게 남겨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의 말은 여전히 말의 빚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반짝이고 계속 돌고 돌아다닐 것이다. 빚지고 살지 말고 빛지고 살자. 이제 스님의 말은 개인재가 아니라 공공재가 되었다. 흔히 하루에 몇 번이나 호흡을 하며 공기를 들이 마시고 내뱉었을까. 공기도 물도 공공적 성격과 같이 스님의 그 뜻도 공공의 공기처럼 떠돌아 누군가의 탁한 가슴을 청량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촉매재가 되었던 것을 아닐까 한다. 네 것 내 것 따지지 않고 두루두루 돌려가며 삶아 가더라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 말의 빛이 쏟아나는 이유이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자본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것이다. 약탈적 자본주의 시대, 야수가 들끓는 야만의 자본 시대에서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한 것이, 명문대를 졸업하고 월등한 스펙을 가지고 대기업에 입사해서 연봉이 몇 천에서 억대를 넘본다고 해도, 물려받은 게 많은 금수저가 아니라면, 서울에서 역세권을 품은 한강변에 아파트 하나 사기 어렵다. 평생을 모아도 내 편히 쉴 곳 하나 마련하기가 불가능한 시대가 된 거다. 욕망의 투기는 아파트값을 끝없이 올리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아무리 국가 정부가 정책적으로 가격 인상을 억제하는 수단을 사용해도 그 압력을 이겨 내기가 버겁다. 그렇다면 부모의 찬스가 없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대기업 연봉으로 날뛰는 부동산 아파트를 번듯하게 하나 대출도 없이 마련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에 절망이 팽배하는 이유이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자조적이고 자포적 사회에서 소위 사토리 세대처럼 득도한 것과 같은 체념의 상황에 내몰리는 형국이다. 수십 채 갭투자로 싹쓸이 해서 점점 차액을 이익으로 실현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극히 소수들이지만 다수에게 결정적인 포기의 영향을 미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어느 정부라고 서민들의 주머니를 채우려 노력하는 것만은 맞겠지만 서민들의 주머니가 넉넉해야 사회나 국가가 돌아가는 것쯤은 너무나 잘안다. 극히 일부의 소수자들만의 독식하는 사회의 체재에서 부조리함의 팽배 자포자기로 연결될 것이 뻔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아무리 정책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누구는 그 대열에 동참할 수 없어서 욕하고, 독식을 하지 못해서 욕한다. 욕하는 그 불만과 욕망의 집착은 욕할 뿐이겠지만, 결국은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이 채울 수 없는 자본을 향한 저주를 붓고 자신을 욕망을 학대한다. 스스로 행복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스스로의 행복은 커녕 누가 준 행복도 못 알아차린다.

 

법정 스님이 그렇게 좋아했던 책, 데이비드 월든이 쓴 책은 한결같이 소박한 오두막에서 자연과 벗하며 산 삶을 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인지를 몸소 보여줬다. 자본이란 물질의 껍데기를 두르고 산 욕망의 겉옷을 걸친 몸은 야위고 지쳐가고 온통 상처를 받는 불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 주식 시장의 시황판이 나오는 게시판을 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채울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 불능에 따른 분노의 목소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몇개만 봐도 충분히 차고도 넘치는 말의 빚들이 많다. 그래서 그곳에서 스님의 자연 회귀를 운운했다간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식일 수밖에 없다.

 

잠이 들면 눈을 감는다. 빛이 차단해야 숙면에 들 수 있지만 사람들의 행복은 늘 눈을 감고 잠만 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행복할 줄은 몰라도 스스로 불행한 방법도 너무 쉽게 안다. 모든 것은 스스로에 달려 있으니까. 뭐 어쩌겠나? 그렇게 살다 저렇게 가고 나면 존재의 그림자도 사라지면 그만이다.

 

주말에 또 강가에 나가 흐르는 강물을 보고 반짝이며 반사되는 빛(윤슬)이라도 보고 행복에 젖어 보자. 사는 게 이게 다 뭐라고. 지랄맞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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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1-18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님은 가셨어도 우리가 아직 떠나보내드리지 못하는 듯합니다. 2009년 즈음에 돌아가신 네 분(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대통령 , 노무현 대통령, 법정스님)의 빈자리를 지금도 느끼기에 그렇다 생각됩니다...

yureka01 2020-01-20 08:50   좋아요 1 | URL
그 뜻과 유지를 받아 새기는 것이 남은 자들의 업이겠지요..그럼요~
든자리 난자리..대비되더군요,

강옥 2020-01-20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대산 쯔데기골, 스님 거처에 가본적이 있지요. 물론 돌아가신 후에.
스님을 존경하던 신도 한분이 오래전에 그 오두막(?)을 빌려드린 거였는데 스님 사후에 문제가 생겼어요.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거처를 수소문하여 찾아들기 시작한 거죠.
오두막의 소유권자는 마침내 철조망을 두르고 말았습니다. 하마트면 소유권 분쟁으로 비화될 뻔했던-
세인들은 유명인들에게 관심이 많죠. 인증샷에 열광하고요. 당사자의 심정 따위는 관심도 없겠죠 ㅎ

yureka01 2020-01-20 08:51   좋아요 0 | URL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게 그렇게 어렵나 봐요..ㅎㅎㅎㅎ
유심을 유물론적으로 치환해버리는 마인드가 의외입니다.

2020-01-21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2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1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2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