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상범
권리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월
평점 :

산문집 <암보스 문도스> 이후로 두번째로 만나는 권리 작가의 책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 책에 대해 고심이 많았고, 할말이 많은 듯 보였다. 삼 년 만에 내놓은 그녀의 다섯 번째 책이자, 6년만의 장편 소설. 그러니까 약 10년만의 결과물이라서 그러한가 보다. <암보스 문도스>에서 나는 그녀에게 참 좋은 인상을 받았었는데, 그 책과는 달리 그녀는 또다른 모험을 시작한다.
이 책의 이야기는 약2321년이다. 정말 까마득한 이야기. 그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너무도 까마득한 이야기. 그래서 인지, 상상을 한다는 것조차 막는 사회가 조금 낯설게 다가왔지만, 점점 읽으면서 빠져들게 된것은 왜일까. 정말, 이런 세계가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하물며 요즘도 개인정보가 이리저리 나뒹굴고, 인터넷의 댓글조차 처벌받는 시대인데, 그때.. 그때쯤 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환태평양 지진대 부근에서 일어난 지각 변동 때문에 생겨난 URAZIL. 그곳은 범죄자가 심각할 정도로 늘어나게 되자, 상상을 금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하게 될 지경까지 이른다. 과거의 기억들이나 이미 했던 경험을 상상하는 재생적 상상은 허용되나, 새로운 것, 나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창조적 상상은 금하는 법안이다. 누구라도 창조적 상상을 하게 되면, 끌려간다. 아, 이런... 요즘으로 생각하면 모두다 끌려가는건데, 나는 골백번도 끌려갔겠구만. 그런데 그런 상상을 자제하는 뭐, 약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무튼, 연극배우인 기요철은 공연을 끝내고 어딘가로 떠날려고 꾸린 가방에서 출석요구서 라고 적힌 종이 한장을 발견한다. 그것은 상상범죄팀으로 출서하여 달라는 종이였다. 하지만 기요철은 별 생각없이 그대로 꾸겨버린다. 하지만 결국은 잡혀가고, 재판이 이루어지게 되며, 수감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창조적 상상을 금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발생하게 만들고, 끝내는 살인을 자행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상상을 하면서, 범죄가 늘어난다는 것은 알겠으나, 상상을 법적으로 금지한다는 것은 정말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상상하는 것이 왜 죄가 되는 것이냐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던 요철은 끝까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상상을 할때마다 버튼을 눌러야 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첫 장부터 흡인력있게 시작하는 권리 작가의 장편소설. 정말 상상도 못한 미래의 일을 잘 버무려 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다음 책도 곧 만나보기를 기대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렸을 뿐입니다. 제가 누굴 죽였습니까? 강간을 했습니까? 거짓말을 했습니까? 저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어요! 죄는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피해를 수반하는 것 아닙니까? 상상이 도대체 왜 거짓이고 죄란 말입니까? (p.47)
지금처럼 위험과 위선이 가득한 시대에 리얼리티가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현실의 고달픔은 우리가 인생을 끊임없이 부정하게 만들어 지치게 한 다음, 끝내는 자기 스스로 인생이라는 연극 밖으로 나가떨어지게끔 만들고 있다. 이쯤에서 허구라는 것이 리얼리티를 압도하며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p.68)
당신은 벌금 150만 우라와 징역 6개월, 이 년간 집행유예 및 보호관찰, 그리고 상상금지교육 400시간을 받았소, 벌금낼 돈이 없어서 육 개월간 로텍에서 노역을 살기로 하는 데 동의했고요. 이제 로텍에 들어온 이상 당신은 '입주자'로 불릴 겁니다. 당신의 이름이나 과거의 직업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타인과 구별하기 위해 당신에게 '2322 고단 3604'라는 고유번호를 부여했습니다. 이곳은 로텍 안의 셀이고 당신은 상상범 304입니다. (p.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