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 산보
최예선 지음, 정구원 그림 / 지식너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서울은 급변하는 것들 속에서 오래된 것들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매력이 있는 도시가 아닐까? 이상하게 오래된 것들은 퇴색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기억속에 오래전에 가본 서울은 매캐한 매연속에 차가운 얼굴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도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느낌일 뿐이었고. 서울의 오래된 것들을 찾아가는 이 책 속 서울의 느낌은 고즈넉하였고, 추운 겨울날 양지바른 자리에 쐬여오는 따뜻한 햇살과도 같았다.

 

오래된 것들은 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을까? 그것은 그것들에 내재되어 있는 것의 오래됨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경험하고 보지 못했던 시간들을 안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저자 최예선 작가는 서울에 자리하고 있는 그러한 오래된 것들을 찾아나섰다.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집이나 그들이 거닐었을 것이 분명한 길들을. 나는, 서울에서 받았던 몹시도 차가웠던 첫인상을 지워버리고 언젠가 다시는 그 윗도시 서울로 가방을 싸들고 그 오래된 것들을 눈요기하러 가보고 싶어졌다.

 

창덕궁 희정당의 벽화에 담긴 6인의 화가에 대한 이야기는 신선했다. 그들이 그렸을 그 벽화들을 내 눈앞에서 직접 보고 싶어졌다. 그 벽화 앞에 서면, 이 책속 6인의 대화가 귓가에 아른거릴 것 같았다. 그리고 박경리 선생님이 살았던 정릉집과 춘곡 고희동의 집.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시로 유명한 윤동주 시인의 자취를 따라가던 글들. 그들이 살았던 집들을 직접 가보고, 그들이 걸었을 그 길을 조용히 걸으며 혼자만의 사색에 빠져든다.

 

특히나 가장 좋았던 부분은 박완서 작가의 집에 대한 이야기에서였다. 내가 그분의 팬이라서 그랬던 부분도 있었지만, 특히나 더 좋았다. 오후 세 시, 햇볕이 그리 따갑지 않은 그 시간. 아마, 계절은 가을이 적당하지 않을까? 그곳으로부터 작가의 사색이 시작되고, 독자는 그 글에서 그곳의 몰랐던 정보들을 알아가고, 예술가의 혼을 느끼고, 분위기에 취한다. 작가가 취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바뀌고 바뀌는 서울이지만, 그 속에서 내내 변치않을 것들이 언제까지고 변함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야 더 빛을 발할 수 있을 테니까. 빛나는 빛이 아닌, 찬란하고 따뜻한 빛 말이다.

 

 

선생이 아주 오래 살다가 떠났던 정릉집은 그리 넓지도 볕이 잘 들지도 않는 작은 박공지붕 건물이었다. 그늘이 깊어 오랫동안 집 안에 있으면 심신이 어두워질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써야만 하는 글이 있음을. 오랫동안 숨 쉴 때마다 함께해온 어떤 기억의 그림자들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외따로 떨어져 우울할 만큼 고요하고 어두운 공간이 필요할 수도 있음을. (p.55)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뒤흔들 이야기 하나쯤은 품고 있어야 한다고 어느 소설가는 말했다. 마음속에 각인된 하나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진정한 이야기로 변모하는 순간의 쾌감을 소설가가 아니라면 어찌 알 수 있을까,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에서 풀려나온 이야기는 '토지'라는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700여 명의 인물로 살아 움직이며 복잡하게 엮인다. (p.66)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실재하는 건물은 엄연하고 현실적인 대답을 들려 주는 법이다. 그 건물 속에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조차 생생한 현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역사의 어느 하찮은 순간 하나도 삭제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당시의 기억을 담은 건축은 어떤 이유에서든 존속되어야 한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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