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체
이규진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설 한 권을 만나서 너무 행복했다. 책을 읽기 전에 본 표지의 첫 느낌은 너무 심심하고 단순하다는 생각이었고 그 자체로 무심했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지 사진을 보니, 처음의 그 느낌과는 완전히 달라 보인다. 단아하며 고아 보였고. 이 책의 느낌을 정말 잘 표현해 놓았구나. 싶었다. 내 책장 속 아주 아끼는 책 중 한 권이 될 것이다.

 

파체!

슬픔을 거두고 기쁨을 얻어라.

우리에게 평화를 주옵소서.

 

 

책 속에 존재하는 인물 모두에게 이 파체란 단어가 부드럽게 스며들어 고단했던 그들의 슬픔 들을 덜어주었으면 좋겠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각자의 슬픔 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자신을 희생하였고,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악으로 표출한 사람도 있었고, 허망하게 웃음을 자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 모두 깨끗하게 보인다. 순백의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작가의 글을 쓰는 능력에 있는 것인가.

 

 

소설 속의 시대는 조선이다. 정조 임금의 수원성 축조를 명함에 따라 이야기가 시작된다. 임금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수원성을 축조하게 되었지만, 그 속에는 다른 뜻도 있었다. 6살에 죽은 여동생 때문에 평생 가슴에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젊은 무사 정빈. 너무도 아름다워 보는 것조차 아까웠던 무사 정빈의 노비 유겸. 거리를 떠돌다 임금의 눈에 들어 수원성을 축조하는데 일임하게 되는 젊은 천재 태윤. 차갑고도 강하게 자기 아들을 키워야만 했던 무사 정빈의 아버지. 그들이 지켜내야 했던, 지키고자 노력했던 사랑과 우정. 그 이야기가 가슴을 울리고, 이들 각자의 이야기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하지만 되려, 안타까워하는 나를 보며 '괜찮다. 괜찮다.' 위로해 줄 것 같았다.

 

 

책의 중반 이후부터는 얼마 남지 않은 장수를 못내 아쉬워하며 아깝게 읽어 내려갔던 책이었다. 작가 이규진 씨는 이번에 처음으로 낸 첫 소설이라고 한다.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들을 글로 써내려갔다고 했다. 읽으면서 설렜던 이 마음들을 그는 쓰면서 느꼈을까. 아니면, 그 이야기들이 떠올렸을 때 그러하였을까. 그의 다음 소설이 벌써 기다려진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화성 수원성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매일 하루씩의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살아요. 그러다 어느날엔가는 영우너한 죽음이 오겠지요. 그러나 그 순간이 바로 영원한 삶이 시작되는 때예요. 영원한 삶이 영원히 아름다우려면 지금 우리 곁을 지나가는 이 모든 순간을 온 몸과 마음으로 살아내야만 해요. 정빈은 화성에 있는 유겸에게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았어. 네가 말하여 준대로. (p.110)

 

 

아가. 울지 마라. 우리는 모두 바람이란다.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가는지 알 수 없지.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저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 아니란다. 고통을 품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가지. 보이진 않지만 바람도 나뭇가지에 걸리고 벽에 부딪친단다. 바람도 찢어지고 멍이 들지. 그러다가 숲에 숨어 쉬기도 하고 골짜기에 잠시 머물기도 하지만 바람은 형체 없는 그 몸을 움직여 늘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어. 자기를 만든 태초의 그 누군가에게로 말이야. 바람처럼 사람도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과 상처를 품고 이 세상을 불어가는 거란다. 고통 없이 바람은 불지 못해. 아가..(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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