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면 없어라 - 김한길 에세이, 개정판
김한길 지음 / 해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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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지 못했었다. 이별이 때로 값진 것은 새것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지는 헌것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이별은 또다릉 재회이며, 그래서 이별은 그리움을 키우는 높은 이자의 빛이라는 거. 코끝이 빨개진 미나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꼬옥 쥐어주었다-16쪽

학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거짓말쟁이로 치부해 버렸던 내 생각은 어쩌면 수정돼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연과 막연의 뒤엉킴 속에서 질서와 법칙을 끄집어 내는 작업은 그런대로 재미있기도 할 테니까. 인생에 대하여 주시하고 그것이 품고 있는 비밀한 규칙을 터득할 수가 있다면. 그래서 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스스로 오만할 수가 있다면, 나는 참으로 느긋하게 한세상 살다가 가련마는-124쪽

처절한 외로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삶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말은 반쯤만 옳다. 왜냐하면 너무나 지독한 외로움에 찌들어버린 사람은 삶에 대해 소리 내어 말하지 말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건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142쪽

인생은 한마디의 농담 같은 거라고 지껄이고 간 놈은 대체 어떻게 한세상을 살고 갔을까. 정말이지 더도 말고 농담쯤이기만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자꾸만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왜, 무얼 위해서라고 할 때 나는 대답할 말이 궁색해진다. 벗어날 길이 없을까.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은 자꾸만 이런 질문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든다.-154쪽

삶이란 그런 거였다. 밥이 없으면 라면이라도 먹어야 하고, 라면에게는 모욕이 될지라도 밥을 원치 않을 도리가 없는 게 삶이었다. 저기서 살지 못하면 여기서라도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었다. 하찮게 구질구질하게 참으로 보잘것없이라도 꾸역꾸역 살아야 하며 그렇다고 이런 삶에 만족해서도 안 되는 게 인생이었다. 망설이지 말고 감이라도 먹어야 하며 그렇다고 감으로 만족해서도 안 되는 게 삶이었다. 나는 지금, 미나가 사온 감을 눈앞에 놓고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 참이다-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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