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홋타 요시에 지음, 박현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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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조금 특별하다. 난징대학살에 대해 일본인 작가가 중국인의 목소리를 빌려 쓰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숫자는 관념을 지워버린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끔찍한 고통도 상처도 뭉뚱그려 전쟁의 참상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런 숫자들은 모호하며, 각 개인이 아픔을 어루만질 수도 없다. 그 아픔을 느낄 수도 없고 그저 시늉뿐인 애도를 하게 만든다.

전쟁이 아닌 학살, 정당성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도 말이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반성조차 없이 지우려 한다.

왜곡된 과거로는 현재의 삶을 제대로 밟고 설 수 없다. 현재의 삶이 거짓이면, 미래의 삶도 거짓일 뿐이다.

악몽같고 핏빛같던 현실같지 않던 그 시간들을 인정하고 왜 누가 도대체 그런 일들을 했는지 인정하며 사과하는 것이 바로 그 시간을 다시 제대로 흘러가게 하는 일이다.

그 시간들은 우긴다고 해서 지운다고 해서 사라질 시간들이 아니다.

핏물이 복사뼈까지 차올랐다는 난징의 그 시간들, 수많은 여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해 치욕과 고통이 절벽까지 쌓였다는 그 시간들은 존재했다. 가해자들만이 지운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예전의 일본은 침묵하고 삐죽거렸고 자신들도 아픈 척 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을 겪었던 이들의 양심선언과 참회들도 공존했다. 대표적인 책이 바로 이 <시간>이 아닐까.

주인공은 중국인이지만 작가는 일본작가 훗타 요시에다. 시간이 지나자 일본은 피해자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뻔뻔스럽게 그 고통의 시간들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집단최면에라도 걸린 듯 없는 일인냥 교과서를 바꾸고 역사를 지우고.

양심과 진실이 사라진 일본의 역사를 배운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해자들을 거짓이라 몰아세운다.



나름 지식인이라는 대학교수 출신의 기리노대위는 사실상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이로 나온다. 항상 우울하다고 말하지만, 난징의 그 거리에서 우울의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우울한 승리? 그들은 기를 쓰며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거나, 혹은 중국의 민족성 등을 탓하며 피해자들이 그런 꼴을 당 할만 했다고 한다.



난징이 함락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일기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국정부의 부정과 난징의 끔찍했던 날들, 그리고 참혹함을 보여준다. 살아남은 사촌여동생 양양은 강간으로 인해 매독 및 마약에 중독된 상태로 몇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다. 그렇지만 의대생이었던 칼갈이 청년, 그리고 자신이 상처받은 곳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나보겠다는 양양의 모습을 보이며 끝을 맺는다.

예전 난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단체행동은 면죄부를 받는가 오히려 소수의 정의는 단체의 정의 앞엔 아무 의미가 없는가 등 토할 것같은 환멸을 느꼈다. 끔찍을 넘어선 비현실적인 상황에 무덤덤해졌던 기억, 오히려 멍해지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일본은 난징대학살에 대해서 과장되었다거나 혹은 그런 일은 없었다는 둥 온갖 증거앞에서도 침묵한다.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고치고 지운 역사를 배우며 자랑스러워하고 오히려 타국의 비난에 오히려 그들은 더 뻔뻔해지고 당당하다.



머리가 텅 빈 듯, 환상을 본 듯 현실감각조차 느끼지 못하게 헛깨비처럼 펼쳐지는 온갖 악몽들이, 그러나 현실이다.

(아래 그림은 주인공이 언급한 쿠르베가 그린 보들레르의 초상화다. )

그래도 만약 저게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원래의 하얀색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간만이 되돌아올 수 없다. 인간만이 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물에게도 어쩌면 "아뿔싸하는 감정 내지는 두려움이 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고 하는 평가적인 판단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온갖 행위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역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 눈앞에서 무너져내렸다. 위스키 병에손을 뻗는다. 집사로서 내가 서빙을 하려고 한다. 그는 주인이라는 것에 견디지 못한다. 뭔가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낀다. 교수임을 견디지 못하고, 장교임을 견디지 못하고, 고독함을 견디지 못한다. 흠칫하며 뒤로 빠지려고 한다. 그래서 구석에 몰리면 폭발한다. 이것이 위험한 것이다. 도망과 폭발, 이것이 난징 폭행의 잠재적 이유였던 게 아닐까? 지금 중국에서 그는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당연한 것조차 괴로워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국 침략이란 심리적으로는 일본 탈출의꿈을 실현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어디에 있더라도 일본인임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나약하고, 허둥지둥 우왕좌왕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일본군의 폭력을 야기한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들이 짓는 일종의 이상한 만족감에 찬 표정을 보라. 그들은 최악인 것만 믿고, 이성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결코 믿지 않는다. 이런 숙명론자가 민중 속에서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 이상, 전쟁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 어떤 평화도 결코 평화가 아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고 이어서 최악의 사태가 생기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만족하고 행복해지기조차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나약함에 의지해서 감동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전쟁은 숙명론적인 감정을 가장 깊게 만족시킨다.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인 의미보다도, 오히려노예적인 숙명론과 파괴적인 인생관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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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4-27 17: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피해자의 입장에서 난징사건을
다뤘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엔딩의 비극은 참...

새파랑 2021-04-27 18: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반성하고 사과하는게 그렇게 힘든건지 참~~ 일본작가가 쓴 중국인 주인공이란 구성이 특이하네요. 근데 이미 보관함에 들어가 있네요 ㅎㅎ

mini74 2021-04-27 18:14   좋아요 4 | URL
새파랑님 보관함은 혹 도라에몽 주머니? ㅎㅎ그리 길지 않은데 참 좋았습니다 ~

scott 2021-04-27 20: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홋타 요시에게 중국 국민당 중앙 선전부에서 그중 언론 통제 핵심부서에 있었어요(중국 공산당 간부들 회유 포섭하는 일종의 첩보원) 그런데도 불구 하고 잔혹한 살육의 현장의 목격자로 그시기를 기록한 양심적인 일본인이였죠.
이분의 책들이 줄줄이 품절이고 더이상 번역되지 않아서 안타까울뿐입니다

mini74 2021-04-30 23:12   좋아요 1 | URL
첩보원이었다니. 아. 새로운 사실을 알고 갑니다 *^^*

붕붕툐툐 2021-04-27 22: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짜 설정 특이하네요! 저도 살포시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