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8
마리 로르 베르나다크 지음 / 시공사 / 1995년 11월
평점 :
품절


민간인 학살은 그 어떤 전쟁에서도 있어왔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그러나 언제나 많은 이들에게 제일 먼저 기억되게 하는 곳. 게르니카

그건 바로 스페인에는 ˝피카소˝란 화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군요.

( 아래 순서대로 게르니카 , 해변을 달리는 두 여자, 세 명의 악사, 꿈 그리고 고야의 그림입니다 )


나치는 피카소를 퇴페미술가로 지목하고, 집요하게 괴롭혔답니다.
매번 화실을 방문하고, 어지럽히고...
그러다 ˝게르니카˝란 그림을 보게 됩니다.
˝당신이 한건가?˝란 나찌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니요. 당신이 했죠. 하나 가져 갈래요?‘

1920년대 파리, 파블로 피카소는 유부녀였던 러시아 무용수 올가와 결혼을 합니다.
돈도 많이 벌때였지요.


아래 첫번째 그림인 < 해변을 달리는 두 여자>와 <세명의 악사>등을 그릴때입니다.
(개인적으로 저 그림 무지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하늘과 역동적인 여자, 항상 소극적이거나 성적대상으로만 그려지는 피카소의 여자들 그림하곤 많이 다르지요?)

그러나 1927년 1월 금발의 17살의 마리테레즈를 만나게 되지요.
모델 제의를 하며, 적극적으로 꼬셨다고나 할까요.
결국 피카소의 예술세계에 집찹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그림을 그립니다.

이것이 바로 1932년의 <꿈>이란 작품입니다.
(최근 이 그림을 소유한 억대 카지노 부자가 팔꿈치로 가격하여 구명을 뻐엉~냈다는군요..그림도 주인을 잘만나야 겠지요..흑흑)

혁신적이고, 여성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깨어 버린 그가, 1920년대 정세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답니다.
그의 조국 스페인도 좌파와 우파로 나뉘는 변혁의 시기였지요.
그때 그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들에 빠져들게 됩니다.
고야는 전쟁의 참상들을 그려냈지요.
그러한 영향을 피카소가 받게 되지요.
1934년 마리 테레즈와 고국에 가서 투우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을 ˝검은 스페인˝이라고 부릅니다.
좌파와 우파로 나뉜 무정부상태에 가톨릭에 억눌린 스페인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결국 이태리와 독일의 1차 대전 실험용으로,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드리드는 계속 저항을 했고, 결국 포탄 하나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의 안전거리안으로 떨어집니다.
고야의 수호자 역활을  자청하며, 프라도관장역을 받아들이고, 공화파에 서게되지요.(좌파)
위험에 처한 명작들을 발렌시아로 옮기게 됩니다.

그 후, 파리에 돌아오자 올가와 불화, 마리테레즈는 임신...
˝내 인생 최악의 시기˝라고 한탄했답니다.

1937년1월엔 스페인 정부가 ˝만국박람회˝에 스페인 전시관을 장식할 작품의 의뢰가 들어오고, 피카소는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37년 4월 26일.
프랑코에 확고하게 반대하며,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가 있던 바스크 지방 게르니카..
장날에 독일 콘돌 소속 비행기가 6개의 포탄을 떨어뜨립니다.
편대를 이뤄 독일, 이태리 공격기가 5000개 이상의 포탄을 떨어뜨리지요.
주민이 거리나 산으로 도망치자 기관총을 발사했고,
결국 도시는 잿더미로 변해 버립니다.
1645명 사망, 수천명 부상..

게르니카에는 아무 군사시설도 없었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주민들만이 있었을뿐...
그나마 영국 특파원 스튜어 기자가 주택이 파괴되고, 잔해가 쌓인 모습을 알립니다.
실제 오후에 일어난 이 학살을, 그는 시각적 효과를 위해 밤으로 바꾸지요.
(고야의 1808년 5월 3일그림처럼요.)
그는 만국박람회에 낼 작품을 결정하게 됩니다.
바로 ˝게르니카˝

그럼 게르니카가 왜 그렇게 유명한걸까요.
그냥 일탈만 일삼던 현대미술이, 큐비즘이 시대의식을 가지게 된겁니다.
현대적 의미의 역사화, 의미가 담긴 메세지가 담긴 새로운 현대화가 탄생하게 된것이지요

여기서 또 한명의 피카소의 여자..바로 ˝도라˝
도라는 크루아티아 출신 사진기자로 초현실주의자였답니다.
창작의 동반자이자 새연인, 그리고 피카소의 비공식적 사진작가가 됩니다.
그녀로 인해, 게르니카가 기록이 남게 되지요.


먼저 그림을 살펴보면,
1.부상당한 말
2.거대한 황소
3.촛불 든 여인.....
파리 만국박람회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으나, 피카소는 개인 문제로 여전히 분주했답니다.
마리의 애기 보러 가야지요, 마리와 도라가 싸우면 말려야지요..에구..
그의 복잡한 개인사가 모두 게르니카의 습작에 들어가 있답니다.
4.우는 여인... 보이시죠?
5.마리테레즈와 딸 마야...(딸 마야가 게르니카 만지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답니다.)
 는 바로 죽은 아기와 혼이 빠진 엄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요.

본 작품은 그림이 3.6미터로 너무 커서 벽에 기대 세워 그렸고, 사다리를 이용했답니다.
처음 습작엔 희망의 메세지가 있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점차 그 슬픔속으로 같이 침몰해 갔지요.
6.말 옆구리에 상처가 나 있지요~ 처음 그 속에서 페가수스가 태어나는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나 완성품에선 마름모꼴의 상처가 죽음의 중심이 됩니다.
7.전사를 투구 쓴 멋진 모습으로 그리나.
완성작에서는 입 벌린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립니다.
무책임한 낙관론을 버리고자 한것이지요.
그러나

8.한송이의 꽃과
9.전사의 손에 나 있는 상처..
자세히 보세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 상흔이랍니다.
이것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란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입니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 깊이 뿌리 내린 구원의 이미지이지요.
중간쯤 활짝 펼친 그의 손바닥엔 빛의 상징이 있지요.
선에서 악으로, 빛은 숭고미, 그러나 빛에서 죄 와 잔인함으로 나아갑니다.
고야의 1808에선 칠흙같은 밤과 총살하려고 밝힌 단 하나의 불빛만이 있습니다.
게르니카엔 악의 눈 이 있습니다.
바로 단 한 개의 전구....가 잔인한 빛을 밝힙니다.
희생자를 노리는 빛, 고문실의 빛악의 빛이지요.
겨기에 대항하는 빛이 바로
10.촛불
과 예술이지요.

현대의 아픔과 악몽을 건드린 게르니카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전쟁의 참상을 느끼게 한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일이 아니면, 쉽게 눈 감아 버리는 세상에, 도저히 눈 감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그림 하나를 그린 것입니다.
상처를 헤집고, 그래서 많은 이들의 가책과 잠 못드는 밤을 가져 오는 게르니카..
바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는 작품이 아닐까요..

종전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고 국제적 유명인사에 넘치는 돈의 피카소.
그러나 더 이상 게르니카 이상의 그림들은 그리지 못했답니다.
1981년 프랑코 사망후, 민주주의가 스페인에 시작되면서, 게르니카는 스페인으로 옮겨져, 지금은 마드리드에 있답니다.

2003년 2월 미국이 이라크 공습을 발표하던 날..
콜린 파웰이 기자 회견 장소를 변경하려고 했답니다.
기존 장소에 ˝게르니카˝테피스트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푸른 장막으로 가리고 기자회견을 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많은 기자들은, 그 푸른 장막 뒤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 모두 알고 있었지요.

이렇게 그림은 큰 힘음 발휘합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천마디의 말보다, 한방울의 눈물이, 한방울의 눈물보다, 진실이 담긴 그림 한점이 더 많은 것을 오래도록 이야기 해준 다는 걸 보여줍니다.
예술의 힘.....
오남용을 막읍시다..하하..그러나 이런식의 순기능은 넘쳐나도 언제나 모자르겠지요
지금 이 시대. 다시 한번 게르니카가 필요한 때란 생각이 드네요.



<참고로, 고야의 1808년 3월 그림을 올립니다.중간의 두 팔 들어 올린 남자..예수그리스도를 연상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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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3-04 0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득 파리 뮤지엄 투어 시절
생각이 나네요.

댓 새벽부터 도보로 피카소 뮤지엄
을 찾아 감탄하던 기억이...

초록별 2020-03-04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엔 문외한인데 멋진 글로 좋아하게 될 것 같네요~~^^ 감사드려요. 이 책 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