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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그 책'은 4~5페이지마다 접혀 아래쪽이 뚱뚱했다.
잘 말린 식물처럼 아래가 벌어졌다. 그녀는 그 책을 매번 읽을 것도 아니면서 늘 가방에 챙겼다. 때문에 표지에는 이런저런 상처가 생겼고, 그녀는 일과처럼 자신의 일이 끝나고 나서야 그 책을 가방에서 꺼내 주었다. 하루종일 가방에서 고통스러웠을 그 책. 차르르, 아코디언처럼 벌어졌다. "누나는 참 책을 소중히 다루네요." 언젠가 무슨 책, 500페이지가 넘는
양장책을 빌려주며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다른이에게 책을 빌려주기 전에 종이로 책을 포장했던 건 그 책을 아껴서가 아니라 빌려간 사람이 '은연중'을 만들며 생기는 표지의 흔적 때문이라는 게 생각났다. 의도하지 않은 상처, 시간을 함께 빌려주는 것,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자연 수렴. 그러나 무엇보다 더 그것은 '물질'이었기 때문에 닳는 것이었다. 잘 보였고, 그녀는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닳는 '물질'을 달가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은 얼마든지 닳아도 상관없다. 오로지 나에 의해서만 멍이 들고, 나에 의해서만 찢어질테니까.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마 자기 무렵이었다.
번뜩 아니면, 하고 그녀는 '물질'과 반대되는 개념을 생각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도덕이나 윤리 같은 것이 생각났지만, 다루기에 너무 크고 이분법적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이 물질이 아니라면 영혼이라고 된다는 것인가. 그녀는 이제는 쓰지 않는 이 말로 물질이니 영혼이니를 버려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생각은 너무 '구닥다리' 같아. 이불에 들어 그녀는 '구닥다리'라는 말을 생각한 것이 우습다. 웃는다. 잠들어 버린다. 다시 어이없는 웃음.
그녀가 유혹을 받는 순간처럼 결정적인 시점에 독자는 테스의 의식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암암리에 남성인)화자가 그녀를 마음대로 전유하려는 방식에 저항합니다. 180
'그 책'을 읽은지 일주일이 될 무렵 봄이 왔다. 황사와 미세먼지 나쁨도 함께. 그녀는 마스크 아래로 틈틈히 이 책의 리뷰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리뷰는 없었다. 그녀는 '그 책'에 향해 찬양하는 글을 읽고 싶었으니 말이다. 조금 더 감동할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감동을 나누지 않겠다는 의민가. 이번에는 저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세상에. 그는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미 100여권이 넘는 책을 썼다. 문학 비평의 교과서처럼 쓰이는 책도 있었다. 그녀는 '그 책'을 읽은지 보름쯤 되는 날, 이렇게 술회했다.
"저는 이 책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테리 이글턴>이라는 사람을 더 진작에 알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 입니다. 우선은 제가 무지해서, 제가 있던 환경이 무지해서, 아니 '환경'자체가 무지해서, 무슨 노랫말처럼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내게 테리 이글턴을 알려주었을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등등.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지' 외에는 탓할 방법이 없었고, 그래도 어쩌면 내게 이 사람에 대해서 계속 떠들고 싶었을 사람이 하나쯤은 분명히 있었겠지.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 기분이 좀 나아지더군요. 그래서 저는 작은 계획을 세웁니다. 이제 누구를 만나든 <테리 이글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지요. 아주 일상적으로다가. 돌돌말아서 입에 쏙 넣는 '계란말이'같은 모양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테리 이글턴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이유로 속상해 할 누군가의 원망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잘못입니다. '당신은 왜 그때 내게 테리 이글턴을 말해주지 않았어요?'라고 묻기라고 한다면. 하지만 전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죠. '내가 저번에 계란말이처럼 말했었어요.'
서사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그 자체를 유리한 입장에 놓을 수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동물들이 농장을 점령해서 스스로 운영하려다가 비참한 결과를 맞는 이야기이지요. 이 소설 자체는 소비에트 연방 초기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한 알레고리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실은, 동물은 농장을 경영할 수 없습니다. 184
그녀가 다니는 회사 근처에는 산수유가 먼저 피기 시작했고, 그 다음은 아마도 철쭉이겠으나 철쭉이었나? 싶은 분홍꽃, 그리고 개나리 순이었다. 목련은 이제 봉오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커서, 봉우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었지만, 이따금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 봉오리를 바라보며 화사해 질 빈 곳을 점치고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점은 아니었지만. 그 무렵 그녀가 줄기차게 들고 다녔던 '그 책'은 4~5페이지마다 접혀 있었다. 한 두 페이지만 읽고도 기뻤다. 그리고 책에 담기지 않은 저자의 생각, 저자가 읽은 책, 이런 사람을 만났던 모든 소설가와 시인을 생각하며.
복숭아를 배보다 더 좋아하는가는 취향의 문제이지만, 도스토옙스키를 존 그리셤보다 더 숙련된 소설가로 생각하는가는 순전히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리셤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은 타이거 우즈가 레이디 가가보다 골프를 더 잘 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348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끝.
추신
좋아해마지 않는 윌리엄 포크너는 이렇게 비평되어 있다. 워=>존 업다이크>윌리엄 포크너
워의 산문은 정직성과 냉철한 사실주의에 감싸여 있고, 그것은 업다이크와 대조해볼 때 잘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압살롬, 압살롬!>의 다음 발췌문과 비교해도 낫습니다. 361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