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거해부도감 - 집짓기의 철학을 담고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주는 따뜻한 건축책 ㅣ 해부도감 시리즈
마스다 스스무 지음, 김준균 옮김 / 더숲 / 2012년 12월
평점 :
현실에서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게 솟아난
‘집을 짓는다’고 하면 먼저 숨을 크게 마십니다. 집은 크고, 비싸고, 이렇게나 많지만 정작 내 집은 없고. 그렇다면 ‘마음으로 집을 짓는다’라고 해볼까요? 무슨 동화 같은 생각이니, 하는 타박이 올 것 같아 역시 편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마음으로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만큼 ‘집’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돈입니다. 치솟는 월세, 전세 대란, 은행 대출, 부동산 등등. 자신이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온힘을 다해 돈을 모으는 소수의 어른과 나이가 어린 아이들 말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그림으로라도 집을 짓지만, 다 큰 성인은 대부분 그림도 그리지 않지요. 모양과 크기가 어떻든 대부분 집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집은 현실에서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게 솟아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으로 부르기가 어려워서 오히려 나를 ‘집의 것’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파트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나의 집은 동과 호수로 표시되는 숫자만 내 것 같습니다. 아파트를 올린 거대한 회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아파트 단면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더욱 들지요. 거대하다 못해 으리으리한 입구를 볼 때도 그렇구요. 내가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해도, 거대한 단지를 바라보면 내가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 궁금해집니다. 내 집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집 앞에 감나무와 밤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으면 했거든요.
집은 말하자면 도시락 통 같은 거지
마스다 스스무가 지은 『주거해부도감』은 마음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줍니다. 집을 짓는 일이란 너무도 크고 어려운 일이라 꿈조차 꾸게 되지 않았던 제게 이 책은 소곤소곤 말합니다. ‘집은 별거 아니야. 이렇게 너의 성격과, 너의 움직임을 공간으로 옮기는 것뿐이야’하며 말을 건넵니다. ‘말하자면 집은 도시락 통 같은 거지.’ 하며 책 첫 장에 도시락 통을 줄줄이 그려놓습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 중학생 때 썼던 바닥이 따뜻한 2단짜리 도시락 통이 생각났어요. 짱짱한 밴드를 채워 흔들림이 없었던 노란색 도시락 통, 주거를 해부한 그림책을 보고 떠올랐던 것이지요.
손에 넣을 수 있는 도시락은 오직 하나입니다. 다양한 종류가 있으면 아무래도 이것저것에 눈길이 가게 되지만, 도시락도 주택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만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택 설계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택의 완성을 목표로 합니다. 최고의 하나를 얻기(GET)위해서 그 외의 모든 것을 잘라내는(CUT)결단도 필요합니다. 19면
그는 주택 설계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택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고 씁니다. 도시락통의 생김새가 다양하고, 그 안에 넣을 음식도 다양하니 나에게 알맞고 내가 원하는 것으로 골라야 한다면서요. 생각해보세요, 모든 걸 먹고 싶다고 중학생아이가 아침마다 5단짜리 찬합에 점심을 싸갈 수는 없잖아요! 이것은 맛과 영양에도 좋지 않지요. 제게는 2단짜리 도시락 통, 모서리가 둥글어서 밥의 가장자리가 둥글러 지던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이상한 가치로부터 집을 자유롭게, 나를 자유롭게
도시락 통을 고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주택해부도감은 포치와 현관부터 시작해서 집안을 세세하게 들여다봅니다. 현관을 설명하는 장에는 신발을 벗는 선이 곧 마음을 놓는 선이라고 하며 당신이 생각하는 현관은 어때요? 하며 물어옵니다. 현관은 신발을 벗는 것이지 마음을 놓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균일하고 규격화된 현관이 아니라, 나의 습관과 몸에 맞는 현관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누군가 집을 물으면 집이 있는 지역과 평수를 말하는 것으로 대답합니다. 그것이 집의 이력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텐데 언제부턴가 그런 대답이 집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으로 되었어요. 똑같은 평수의 집에서 똑같은 동선과 똑같은 삶의 방식을 강요받았다는 것은 모르고서요. 이 책은 그러한 이상한 가치로부터 집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내가 생각하는 삶과 내가 좋아하는 곳을 떠올리게 하지요. 물을 이용하는 곳으로 카드게임을 하자며 옵니다. 세탁실을 조커로 끼고서 말이에요. 이것을 어떻게 연결해야 좋을지 궁리하자는 말에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수납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물건은 살아 있고, 또 야행성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탄성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의 성격을 잘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현명하게 수납을 할 수 있는 거지요. 물건은 쓰는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지니까요. 결국은 나를 잘 아는 일이 정리를 잘 할 수도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다는 거대한 일이 이렇게 소소하고 즐거운 게임으로 치환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전문가의 시선도 놓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설계의 노하우도 함께 싣고 있기 때문이지요. 차양이 나온 정도에 따라 해가 남중할 때 태양 고도를 그림으로 싣고 있는 장이 있습니다. 차양의 크기가 300mm일 경우, 바로 밑에 위치한 창문을 커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요, 30cm밖에 되지 않는 차양이 밑에 있는 창문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그림으로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창문을 열지 않아도 실내에서 기류의 순환이 일어나는 동선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데요, 어떤 긴 설명보다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목적이라는 목적도 있다
주택 안에 있는 동안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시간보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훨씬 길다며 저자는 입을 뗍니다. 주택에 반드시 목적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 무목적성만 있으면 된다고 편하게 말하지요. ‘인정합시다.’ 우리 집에서 뭐 하려고 하진 않잖아요. 라며 집을 잘 이해해보자고 말이에요. 집은 우리가 쉬는 곳이지 무엇을 하는 곳은 아니니까요. 어떻게 하면 잘 쉴 수 있을 까를 생각하면 되니까요. 우리, 집에서조차 무엇을 위해 준비하고, 경쟁한다면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어요?
나는 도시락에 어떤 메뉴를 넣어야 좋을지 베게에 턱을 괴고 이것저것 그려봅니다. 내일 메뉴로는 멸치볶음이 먹고 싶어요. 여전히 2단정도의 도시락통이 딱 좋고요. 다만 계란말이를 넣었던 칸에는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마아아안큼. 그래서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마음의 집짓기를 보여주는<주거해부도감>같은 다양한 분야의 책도 넣을 수 있도록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