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기.시.감. 이 명백함을 지울 수가 없다

 

 

빛을 다 흡수해 버린 듯 검은 사람이 보도블록을 걸어간다. 활달한 걸음과 한 손에 들린 책. 상반신은 보이지 않고 대신 뒤편으로 그림자가 완전하게 서있다. 그림자의 건장한 체격으로 말미암아 걷는 사람을 ‘그'라고 불러본다. 그는 왼편으로, 왼편 상단으로 곧 사라질 참이다. 이 프레임에서 너덧 발자국만 더 걷는다면 보이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림자. 한가운데서 사선으로 시선을 가르는 그것은 발뒤꿈치에 붙어 물끄러미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보도블록 위에는 그림자만 길게 남겨질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낮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가 걸어 나가고 그를 바라보는 그림자만 남는다. 당신과 나의 어제를 그만두어도 오래 남는 저릿함처럼. 불멸은 불노가 아니라 끈질긴 기억인 것처럼. 그러나 그림자와 기억은 실체는 아니다. 그들은 왜곡을 일삼아 부풀리는 것은 일도 아니며 조롱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표지의 인물처럼. '그'보다 훨씬 키가 큰 그림자를 보라. 이미 그가 아니다. 그런데 그림자가 자신을 만들어낸 사람을 바라본다. 김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기억’을 주인으로 놓는데 이르렀다. 그렇다면 나와 그림자는 같은가? 나는 기억과 같은 질량을 갖는가? 기억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가끔, 낯선 곳에서 섬뜩한 느낌에 뒤를 돌때 아무도 없었던 것은 그림자가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기선제압이다. 가까스로 기억의 주인이 되어 말해본다.

 

이 뒤돌아 섬을 반성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여간해서 하지 않는 것. 제대로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 나 대신 기억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기억에 머리 수그리고 있을까. 나에게서 파생된 온전치 못한 것으로부터 잠식되어가는 나'를 바라볼 때 참혹함. 어떤 단어가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뒤돌아서다 못해 뒤돌아서 걷는 사람. 그는 돌아버린 사람이다. 김병수는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 그렇다면 읽는 나 또한 불확실한 시간을 쳐내고 남는 말도 의심하기로 한다.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1년의 시차는 대수롭지 않다. 이보다 더 휘청일 시간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다. ‘하여튼’ 오래전에 살인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니다. 이것도 쳐내기로 한다.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말만 가져간다. 구름이 뜨면 반쯤 먹힌 그림자가 남기도 한다. 실체가 확실하더라도 그 뒤편의 그림자까지 확신할 순 없다. 아직 첫 페이지를 넘겼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아빠의 딸이에요?

은희는 스물여덟이다. 김병수의 기억에 자신은 칠십 줄에 들어섰고, 기억이 망가지고 있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김병수는 25년 전, 26년 전 살인을 그만두었다. 은희가 두 살 이나 세 살 무렵의 일이다. 그래서 은희는 은희 어렸을 적부터의 기억이 나온다. 자신의 가정家庭에 대한 ‘가정假定’. 혈액형에 대해 물어볼 경우 이렇게 말해줘야지, 부모를 찾을 때는 입양했다고 해야지, 나는 동물을 치료하는 사람이니 은희는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는 가정과 바람이 만들어낸 김병수의 조촐한 가정. 그러므로 은희의 실재는 믿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가 어떻게 아빠의 딸이에요? 입양했다고 대답한 다음 장면에서 김병수는 두부를 굽는다. 매일 두부를 구워 먹는다. 조촐한 반성. 대숲에서 울리는 소리는 말이 없다. 불현듯 오금이 차다.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감정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유머에는 반응한다는 김병수의 기억답게 위트를 부려놓았다. 이것은 흡사 기시감이다. 기시감은 있었던 것 같았던 일을 마주하게 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김병수는 기시감이 아니라 기시감처럼 느끼고 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이야. 어쩐지 그의 상황이 익숙해 그는 사냥을 하고 있어.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박주태와 첫 대면 후 이어지는 부분이다. 박주태는 30대 초반의 남자, 지프를 사냥용으로 개조한, 뱀의 눈을 한 사내. 나는 확신한다. 그때 우리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짚고 가자. 나의 기억이 나를 알아보고 나 또한 기억이 나를 보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김병수의 독백에서 알아보았다는 층위는 얕다. ‘살인을 아는 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젊었을 때 나를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위트로 작동하는 것이다. 김병수의 기억은 ‘혹시’ 하고 있다. 분리된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은희와 박주태는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아이러니. 이 참상. 은희는 아이인 동시에 은희 엄마의 아우라를 지닌다. 은희가 컸더라면 닮았을 나이의 여자와 젊었을 적 자신이 마음 내었던 은희의 엄마를 덧씌운다. 게다가 자신의 젊었을 적 모습을 불러내 그들을 만나게 하고 질투한다. 일흔 살의 김병수는 자신이 실제로 죽이고 기억으로 살려냈던 은희와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 젊은 날의 나를 불러와 기억으로 죽이기 위해서 상체를 단련한다. 그러므로 말된다. 자신의 인생에 있을 마지막 살인을 준비한다는 의미심장함. 그러나 이 목표,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김병수는 알지 못한다.

 

자신을 연료로 태워 살아가는 사람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무라카미 하루키, 『어둠의 저편』

 

이곳에서 하루키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위트니 실소를 바란다. 언젠가 하루키는 기억에 대해 인상 깊은 말을 써 놓았다. 기억은 연료라는 말. 그래서 기억의 질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그것은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는 응원의 말이었다. 괴로운 일, 안 좋았던 옛날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마저 없는 이들은 어떻해야 할까 묻는다. 기억 자체가 사라져 태울 연료가 없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물어본다. 기억의 끝은 내가 '있다'는 감각이다. 하루키식을 따를 때 기억의 끝에 다다른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나를 지각한다는 마지막 기억을 태우는 것이다. 자신을 연료로 만들어 나를 소진해 내일로 가려는 사람은 현실을 완전하게 부술 수밖에 없다. 김영하는 그 어떤 기억이라도 남지 않았을 때, 필연적으로 비틀거릴 수밖에 없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지는 사람에 대해 썼다. 그것을 살아가는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혹시 죽어가는 모습은 아닐까, 조용히 묻는 질문에 한마디를 더 얹는다. 살아가며 죽어가고 있다. 분해되지 않는 가치. 당신의 입술엔 어떤 표정이 걸릴까.

 

그가 사라지고 남은 보도블럭 위에 저 긴 그림자도 사라진다. 그것이 해가 어두워져서인지 그가 사라져서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라진다는 것만은 자명하다. 그림자가 사라진 거리는 그 위에 무엇이 있었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찰 것이다. 그러나 이 빈 풍경을 읽어야 한다며 소설을 써낸 사람이 있다. 먼지조차 그려지지 않는 거리라고 해서 기억의-자세한-혼동을 없었던 일이라고 할 것인가. 김병수는 박주태와 은희를 만났다. 우리는 김병수의 걸음을, 정처 없었으나 걸었던 것을 기억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실은 기억의 살인법을 말하는 것이었고 이 완벽한 살인에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이다. 어떤 침묵이 어울릴까 저마다 입매를 매만지는 저녁. 기억의 살인자- 되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차근히 되어가고 있다는 기. 시. 감. 에 피 도는 손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이 놀라운 명백함, 지울 수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둠의 저편』을 제외한 모든 이탤릭체 본문 인용. 




+사진 출처 : 알라딘

작성 : 2013/09/09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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