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난 시의 소리를 신경 쓰긴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어떤 형식의 시 낭송도 별로 참아 내지 못한다. 시 낭송은 어떤 형식이 됐든 멀리 퍼져야 하고 들릴락 말락 해야 할 노래를 우리 귓가에 큰 소리로쏟아 낸다. 우리는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들을 수 있지만 소리에 대한 갈증과 호기심은 파괴되고 만다.
나는 멀리서 어렴풋이 들리는 노랫소리를 좋아한다. 이건 내 편견이자 편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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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0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생각과 선택이다 분명해졌다. 확실히 시가 존재하고 이 세상에 시가 필요한 건 우리가 익숙한 세상에서만 사는 걸 달가워하지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형적 발전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 주변에 대해 소원해지고 황폐해지기는 했다. 하지만우리는 그것 때문에 시를 벌할 수 없고 시와 시인이 모험을 떠나는 걸 막아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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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시는 극히개인적이고 고독한 심리적 가치의 산물이다. 시인은 외롭고 허전하게 우주의 거대한 흐름에,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시간과 상하좌우의 모든 공간 그리고 바글대는 사람들 사이에 처해 있다. 그는 독특한 격정을 찾는동시에 그 격정을 표현할 독특한 형식을 찾지만 이 양자는 어떠한 전례도 보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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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리미가 있는 풍경」에나오는 ‘자유의 불‘과 다소 비슷할 것 같았다. 유목이 타는 불은 가스 난로의 불, 라이터의 불, 일반적인 모닥불과 다르다. 자유로운 장소에서 타오르는 자유로운 형상의 불이며 자유로운 까닭에 불을 지켜보는 사람의 심정을 반영해 나타낼 수 있다.
유목이 타는 불에서 유목의 자유를 구상해 냈다. 이렇게 해서 그 해변에서의 내 심정과 딱 맞아떨어지는 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난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탐색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시를 찾을 것이다. 물론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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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를 산 사람끼리 이 정도의 유사성을 공유한다는 게 놀랍다. 다만 그 사진은 한 가지를 더 말해주고있었다. 정면을 응시한 단호한 눈길은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은 단독자의 삶에 길들여진 사람의 것이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그는 지독한 외로움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소외감이었다. 격정을 누를 길 없어 사진집을 한 장씩 넘기는 일에 열중했다. 각기 다른 표정을 지닌 다양한 나이와 인종과 성별의 얼굴을 대면했다. 그와 무관한 그들의 태연한 표정이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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