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청춘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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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타이요는 일반인에게보다 만화가들 사이에서 더 잘 알려진 작가다. 그의 팬을 자처하며 영향을 고백하는 만화가들만도 벌써 여럿 봤다. 비교적 높은 인기로 영화화까지 진행된 <핑퐁>같은 작품을 보면 그 팬심이 십분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칸을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동세연출은 확실히 독보적이다. 게다가 주로 두 명의 주인공이 짝을 이뤄 갈등하며 엮어내는 스토리 라인의 긴장감도 작가를 범상치 않은 범주에 포함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철콘 근크리트>, <제로>, <고고 몬스터>, 최근에 소개된 <넘버 파이브>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연출과 이야기의 짜임새는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작품들이 비슷비슷하다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오히려 <넘버 파이브>에서는 ‘마츠모토 타이요가 너무 멀리까지 나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독자들의 조바심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애니북스에서 <푸른 청춘>이 나왔다. 근 10년 전에 해적판으로 출간됐던 것을 판형을 키워 새롭게 냈다. 1993년 작품으로 비교적 초기작이다. 게다가 단편집이다. 국내에 번역된 대부분의 작품을 봐왔지만 단편은 처음이다.

불량청소년들의 우울한 청춘 군상을 그려낸 일곱 편의 단편들은 ‘가장 마츠모토 타이요 다운 작품’이라는 홍보문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초기작이고 단편인 만큼 이후의 작업들의 원천소스를 접하는 것 같은, 거꾸로 된 기시감마저 든다. 풋풋하고 거친 듯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작업들이다. 

제일 앞에 실린 ‘행복하다면 손뼉을 치자’에는 학교 옥상 베란다의 바깥쪽에 서서 손을 놓은 채 누가 더 손뼉을 많이 치는가를 겨루는 ‘베란다 게임’이 나온다. 무료한 날들이 계속되는 와중 게임의 2인자는 신기록을 세우고 옥상에서 떨어져 ‘멋있게’ 죽는다. 가히 향후 ‘마츠모토 타이요 월드’에 등장하게 될 갈등하는 히어로들의 원형이라 할만하다.

상식을 허용하지 않는 초현실적인 풍경들의 나열은 마츠모토 타이요의 세계에서는 일상과도 같다. 단순무식한 추격전의 끝장을 보여주는 ‘끝장이네 이거’의 경우, 달려서 지하철을 따라잡는다든가 차에 치여 머리가 깨어졌는데도 벌떡 일어나 추격을 계속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추격전 자체가 아니라 추격전을 드러내는 연출방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리볼버’에서는 우연히 권총을 손에 넣게 된 삼인조가 총으로 인해 좌충우돌하다 바닷가에 가 러시안 룰렛을 벌인다. 이유는 단 하나, ‘살아있다는 긴장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단편집을 지배하는 가장 커다란 정서는 권태다. 단지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주인공들은 베란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손뼉을 치고, 톨루엔(환각제의 일종)을 물고 다니고, 이유 없이 폭력을 휘둘러 대고, 패밀리레스토랑을 순회하며 시간을 죽인다.

작가는 후기에서 학창시절 불량청소년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사진을 찍던 에피소드를 공개한다. 불량청소년들은 하나같이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즐겼는데 작가가 사진을 신경 써서 찍을라치면 씨익 웃어대며 ‘괜찮으니까 그냥 찍기나 해라’고 쑥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는 거다. 작가는 이에 대해 “현재를 이미 과거의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카메라라는 아이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이해가 갑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푸르지만 우울한 청춘, 불투명한 미래와 빠르게 과거에 잠식당하는 현재 사이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분출하는 감정들. 이 모두를 아우르는 것은 압도적인 권태다.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대사들의 남발이라든가, 직선 따윈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자유분방한 그의 선, 자칫 과잉으로 보일법한 연출방식 등이 낯설지도 모르지만 그 낯설음을 거슬러 올라가면 당신도 마츠모토 타이요 월드의 시민이 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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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ksy Wall and Piece 뱅크시 월 앤 피스 - 거리로 뛰쳐나간 예술가, 벽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네다
뱅크시 지음, 리경 옮김, 이태호 해제, 임진평 기획 / 위즈덤피플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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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0,998 유로의 경매낙찰 총액, 경매횟수 102회, 최고 낙찰가 1,166,540 유로. 안드레아 거스키, 안젤름 키퍼, 신디 셔먼, 길버트와 조지, 줄리앙 슈나벨 등 기라성 같은 거장들을 제치고 22위 랭크. 미술시장 분석 전문회사 아트프라이스가 1945년 이후 출생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2007년 7월부터 2008년 6월까지의 판매기록을 분석한 차트에서 이 같은 기록을 보유한 작가는 누구일까.

문제가 너무 어려운가? 조금 더 쉬운 힌트.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등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 전시중인 작품들 사이에 태연자약하게 걸어놓는 방식으로 ‘도둑전시’를 했다. 재밌는 것은 그의 작품이 발견되자마자 떼어내고 폐기처분한 전시장이 있는가하면 대영박물관 같은 경우 원시인이 쇼핑카트를 끌고 있는 그의 작품을 영구소장하기로 결정했다는 거다.

그래피티 작업을 주로 하는 그를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그를 인터뷰한 한 언론에 의해 이름과 1974년생 고등학교 중퇴자라는 일부 경력만이 밝혀졌을 따름이다. 그는 ‘얼굴 없는 작가’, ‘아트 테러리스트’, ‘그래피티의 살아있는 전설’ 등으로 불린다.

국내에서도 이 작가의 작품은 블로그와 각종 사이트를 통해 수없이 퍼날라지고 복제되었다. 복면을 한 채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대의 모습, 총을 들고 헬맷까지 착용한 경직된 경찰의 얼굴자리에 들어가 있는 스마일 마크, 아나키스트의 상징을 그리고 있는 영국 왕실 근위병의 모습, 폭탄을 사랑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소녀의 초상, 열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정복차림의 경찰 동성애 커플 등 통념을 뒤집고 상식의 허를 찌르는 그의 작품은 많은 이들을 열광케 했다.

이제 아시겠는가? 그의 이름은 뱅크시. 영국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그는 이미 위의 수치에서 확인했듯 더 이상 뜨내기나 얼치기 예술가가 아니다. 주류예술계에서도 몇 손 가락 안에 꼽히는 중요한 작가가 되어버린 뱅크시의 작품과 그의 짧은 글들을 소개한 책이 나왔다. <뱅크시, 월 앤 피스>는 우연한 계기로 출간되었다. 영화감독 임진평이 뱅크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국내에 출시된 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판관계자에게 뱅크시를 소개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수많은 미술인들을 제쳐두고 영화감독을 통해 출간되었다는 게 아리송하긴 하지만, 아무튼 덕분에 우리는 뱅크시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웹에서 만날 수 있던 그의 작품들을 보는 것이 산발적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면 <뱅크시, 월 앤 피스>는 그 갈증을 조금은 풀어준다. 원숭이, 경찰, 쥐, 소, 아트, 거리의 조각상 등 소재에 따라 분류된 책은 뱅크시의 작품을 조금 더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접근해 분석의 여지를 마련해 준다. 주로 해프닝식으로만 알려졌던 미술관 도둑전시에 대한 그의 입장들과, 그래피티에 대한 태도,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패러디 등 그의 촌평들은 짧고 거칠지만 뱅크시의 작품들이 가진 특성들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업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스템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며 시스템에 함몰되지 않고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나도 모르게 고심하게 된다. 특히 팔레스타인을 격리하고 있는 벽에 진행한 그의 작업들과 일화는 그가 예술가인 동시에 명민한 활동가의 속성 역시 가지고 있음을 훌륭히 보여준다.

그의 말을 하나만 인용해 보자.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보여준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고찰을 보는 것만 같다.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그의 공격은 가차없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며 언제나 핵심을 찌른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지금부터다. 해설을 쓴 이태호 교수는 “그의 작품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가로 매매되기 시작한 이후, 과연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를 주목할 것이다”라고 글 말미에 밝히고 있다. 첫머리에 쓴 것처럼 그는 이제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가의 잘 팔리는 작가가 됐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데미안 허스트와 뱅크시를 동급에 놓기도 한다. 물론, 작가로서의 자기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둘은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시 뱅크시가 제도화된 반항을 넘어 예술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태호 교수가 던진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책을 손에 든 이들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뱅크시의 앞날을 주목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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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씨의 유쾌한 이별 공식 오늘까지만 사랑해
김수박 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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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날 밤, 옛 애인의 전화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가? 반대로 내일 결혼할 옛 애인에게 전화해 본 경험은? 뻔한 얘기다. 여자는 옛 애인의 결혼 전날 전화해 다음날 만나자고 한다. 그리고 무작정 선운사로 달려가 기다린다. 결혼식을 마친 남자가 짬을 내 전화하지만, 여자는 안 오길 잘했다고 한다. 눈물처럼 동백꽃이 후두둑 떨어지는 이곳에 왔으면 너는 결코 나를 떠나지 못했을 거라고.(송창식, 선운사)

여자는 꿈이 뭐냐고 묻는다. 남자는 질문을 회피한다. 흔한 얘기다. 서로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란 걸, 피해서는 안 될 대답이란 걸 알면서도 묻고 또 얼버무린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은 시간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격렬한 어긋남을 빚어낸다. 그들은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멀어진다.(롤러코스터, Last Scene)

「지하철 1호선 - 사람의 곳으로부터」와 「아날로그맨」등 독특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은 만화가 김수박이 한 음악사이트에 약 1년간 연재한 만화를 엮어 책을 냈다. 추억이나 회고담을 7080의 전유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김수박의 작품들은 8090 세대의 가요 40곡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들이다. 박인수나 송창식부터 양희은, 나미, 이선희, 푸른하늘, 김현철, 이상은, 015B, 여행스케치, 봄여름가을겨울 등 누구나 한 곡쯤은 마음속 한켠에 아름답게 혹은 가슴저리게 간직하고 있을만한 노래들이 하나하나의 단편과 짝을 이뤘다.

「오늘까지만 사랑해」는 삶에서 응축시켜온 감정과 경험의 농도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여기에는 각종 이별이 다 있다. 내 얘기인 듯 남 얘기인 듯 닳고 닳은 이야기다. 뻔하디 뻔하고 흔하디 흔하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상투적인 경구의 사랑 버전 총합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사람을 울린다. 울린다고 하면, 괜히 질질 짜게 만드는 구질구질함이 있지 않냐고 물을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걱정 마시라, 작품에선 외려 산뜻함이 묻어나니까.

프리미어의 허지웅 기자는 처음 10쪽을 보면서 웃고 울었다는데, 나는 아무래도 감수성이 무딘가보다. 처음 볼 땐 노래를 하나씩 찾아들으며 한편, 한편 음미하듯 즐겼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지하철이었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기억의 옛 페이지들이 역류해 눈으로 넘치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을 나와서도 새빨개진 눈으로 울며 걸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 30여년, 그리 헛헛하게만 살지는 않았나보다 하는 안도감보다 어디서 이런 아슬아슬한 안타까움이 솟아났을까 하는 어리둥절함과 그럼에도 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기억해두고 싶다는 알 수 없는 고집과 미련이 앞섰다.

뻔하다는 건 그만큼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강력한 정서의 환기가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상투성의 늪에 빠질 위험도 높은 부분이다. 그러나 「오늘까지만 사랑해」는 진부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박씨의 유쾌한 이별 공식’이라는 책표지의 어깨제목처럼 이별을 통해 조금씩 강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개인들의 모습이 돋보인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작가가 고른 노래들이 소환하는 추억과 감정,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작가는 당연하게도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간다. 줄거리가 새롭지 않다고 드라마를 마다하는 이들은 없다. 작가는 짤막한 이야기들에도 다양하게 엮이는 사연들을 생기 있게 오밀조밀 배치하는 마법을 부린다. 슬쩍슬쩍 통념의 경계를 벗어나는 연출이 그렇고, 대사의 감칠맛과 기분 좋은 손글씨가 그렇고,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몽타주가 그렇다.

책의 마지막까지 보게 되면 모든 에피소드들이 작가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다. 단편 단편 어지러이 얽힌 이야기들이 질서를 찾고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스토리를 이룬다는 것도 중반 이후에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웬일인지 순대국에 소주 한잔이 간절해진다.

당신은 테스트를 하지 않고 못 배길 거다. 왜냐구? 궁금할테니까. 자신이 담아온 세월과 그 모든 사연들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킬지 실험해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테니까. 작가의 블로그에 가면 노래와 함께 에피소드 몇 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서비스. 그의 팬이 되는 것은 그 다음에라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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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씨의 유쾌한 이별 공식 오늘까지만 사랑해
김수박 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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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응축시켜온 감정과 경험의 농도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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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남긴 한 마디 - 아지즈 네신의 삐뚜름한 세상 이야기 마음이 자라는 나무 19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이종균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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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있다. 이 나라, 왕 선출 방식이 유별나다. 1년 중 하루 모든 국민이 광장에 모여든 가운데 까마귀가 머리 위에 똥을 세 번 싸는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까마귀 형제여, 나를 파디샤(이슬람권 국가의 군주)로 선출해 줘. 제발.”이라며 자기 머리 위에 똥이 떨어지길 간절히 원한다. 한 젊은이가 이 나라에 도착한다. 이 젊은이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꿈에 푹 젖어있다. 자신에게 권력이 주어진다면 악을 뿌리 뽑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는 이 젊은이의 머리 위에 까마귀가 세 번 연속으로 똥을 떨군다. 평소 소원대로, 그렇게나 바라던 왕이 된 것이다. 이 젊은이는 어떻게 됐을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착한 왕이 됐을까?

세상에나, 작가는 깜짝 놀랄만한 결론을 준비해 놓는다. 젊은이는 왕이 되자마자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을 왕으로 뽑아준 까마귀들에게 온 정성을 쏟는다. 사람은 먹을 게 없어도 까마귀를 굶기면 안 되고, 국민들이 길거리로 내앉아도 까마귀를 위한 둥지는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 결과는? 국민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지만, 까마귀들은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매해 그를 왕으로 뽑아준다. 그러나 어느 해, 온갖 호사에 길들여져 황소만큼이나 몸집을 키운 까마귀들이 한꺼번에 똥을 싸자 그는 까마귀의 똥더미에 파묻힌 채 숨이 막혀 죽어버린다.

<개가 남긴 한마디>의 첫 번째 이야기로 등장하는 ‘까마귀가 뽑은 파디샤’의 내용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왕이 까마귀 똥에 깔려 죽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왕의 죽음을 본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까마귀 형제여, 나를 파디샤로 선출해 줘. 제발.”이라고 외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 참...이라고 혀를 차게 되면서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방법이 없다.

터키의 국민작가 아지즈 네신이 보여주는 세계는 이처럼 통쾌하고 짜릿한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대체 선거에 대해 이만큼이나 노골적이고 신랄한 풍자를 한 작가가 예전에 있던가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상상력이다. 아, 이 어리석은 파디샤와 국민들을 보기 위해 굳이 터키까지 갈 필요는 없다. 이 일화는 매년 우리 주변에서 멈춤 없이 반복되고 있으니까.

책 제목이기도 한 ‘개가 남긴 한마디’를 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카슴은 동물을 매우 사랑하는 남자다. 어느 날 그가 14년 동안이나 함께 살며 가장 아끼고 서로를 이해해 준 개 카라바쉬가 죽고 만다. 친구보다, 가족보다 가까운 카라바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고 거짓말한 카슴. 카라바쉬를 위한 마지막 선물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다. 그러나 관을 묻으려는 순간 관 밖으로 삐져나온 꼬리 때문에 들통이 나 신성 모독으로 재판에 처해진다. 재판관에게 선처를 구하기 위해 카라바쉬가 살아생전 각종 선행을 베풀었다고 증언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카슴을 구한 것은 있을 리 없는 개의 유언이다. 카라바쉬가 금화 오백냥을 재판관 앞으로 남겼다고 말하는 순간, ‘개가 어떻게 유언을 남기느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던 재판관의 태도가 싹 바뀐다. “카슴 선생! 좀 더 말해 보시오. 고인의 유언을 모조리 실행합시다. 그건 종교적으로 보나 뭐로 보나 선행 중의 선행이지 않습니까?”

얄팍한 속내와 빤히 들여다보이는 탐욕, 순식간에 폭로되는 위선과 유치한 이기심의 퍼레이드가 보는 이를 슬며시 미소 짓게 하고 때로는 폭소를 자아낸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근엄한 척 무게를 잡고 있어도 삐뚜름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네신이 던지는 풍자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이야기들을 계속 읽어 가다 보면 주인공들을 마음껏 비웃을 수 없는 순간이 꼭, 찾아온다.

‘아주 무서운 농담’은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재기발랄하면서도 섬찟하게 보여준다. 한 스파이가 왕을 비웃는 농담을 접수한다. 그는 왕에게 가 그 우스갯소리를 들려준다. 배를 움켜쥐고 뒹굴 만큼 박장대소하던 임금은 그건 아마도 경호실장 이야기 같으니 그가 듣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스파이는 경호실장에게 농담을 들려준다. 경호실장 역시 눈물이 맺힐 만큼 웃어제끼며 그것은 총리의 어리석음을 표현한 이야기라고 한다. 스파이는 다시 총리에게 농담을 들려준다. 총리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아마 그것은 내무부 장관의 이야기 같다고 말한다. 내무부 장관은 외무부 장관의 이야기라 하고 외무부 장관은 자신의 차관 이야기라고 한다. 누구도 자신이 비웃음의 당사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모자란 행동을 남의 얘기라며 마냥 비웃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지즈 네신은 “풍자는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서 구해준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풍자가 소중한 이유는 이 세계가 온갖 악덕으로 썩어 문드러지지 않도록 방부제의 역할을 담당해 주기 때문이다. <개가 남긴 한마디>에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조롱부터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작가의 고발이 들어있다. 세상의 진면목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이 이 책을 많이 접하기를 바란다. 책에 실린 열 다섯 개의 짤막한 이야기들은 50년 전에 쓴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역시 사람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걸까? 번역자의 말처럼 언젠가는 더 이상 풍자할 대상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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