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ksy Wall and Piece 뱅크시 월 앤 피스 - 거리로 뛰쳐나간 예술가, 벽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네다
뱅크시 지음, 리경 옮김, 이태호 해제, 임진평 기획 / 위즈덤피플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6,180,998 유로의 경매낙찰 총액, 경매횟수 102회, 최고 낙찰가 1,166,540 유로. 안드레아 거스키, 안젤름 키퍼, 신디 셔먼, 길버트와 조지, 줄리앙 슈나벨 등 기라성 같은 거장들을 제치고 22위 랭크. 미술시장 분석 전문회사 아트프라이스가 1945년 이후 출생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2007년 7월부터 2008년 6월까지의 판매기록을 분석한 차트에서 이 같은 기록을 보유한 작가는 누구일까.

문제가 너무 어려운가? 조금 더 쉬운 힌트.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등에서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 전시중인 작품들 사이에 태연자약하게 걸어놓는 방식으로 ‘도둑전시’를 했다. 재밌는 것은 그의 작품이 발견되자마자 떼어내고 폐기처분한 전시장이 있는가하면 대영박물관 같은 경우 원시인이 쇼핑카트를 끌고 있는 그의 작품을 영구소장하기로 결정했다는 거다.

그래피티 작업을 주로 하는 그를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그를 인터뷰한 한 언론에 의해 이름과 1974년생 고등학교 중퇴자라는 일부 경력만이 밝혀졌을 따름이다. 그는 ‘얼굴 없는 작가’, ‘아트 테러리스트’, ‘그래피티의 살아있는 전설’ 등으로 불린다.

국내에서도 이 작가의 작품은 블로그와 각종 사이트를 통해 수없이 퍼날라지고 복제되었다. 복면을 한 채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대의 모습, 총을 들고 헬맷까지 착용한 경직된 경찰의 얼굴자리에 들어가 있는 스마일 마크, 아나키스트의 상징을 그리고 있는 영국 왕실 근위병의 모습, 폭탄을 사랑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소녀의 초상, 열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정복차림의 경찰 동성애 커플 등 통념을 뒤집고 상식의 허를 찌르는 그의 작품은 많은 이들을 열광케 했다.

이제 아시겠는가? 그의 이름은 뱅크시. 영국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그는 이미 위의 수치에서 확인했듯 더 이상 뜨내기나 얼치기 예술가가 아니다. 주류예술계에서도 몇 손 가락 안에 꼽히는 중요한 작가가 되어버린 뱅크시의 작품과 그의 짧은 글들을 소개한 책이 나왔다. <뱅크시, 월 앤 피스>는 우연한 계기로 출간되었다. 영화감독 임진평이 뱅크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국내에 출시된 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판관계자에게 뱅크시를 소개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수많은 미술인들을 제쳐두고 영화감독을 통해 출간되었다는 게 아리송하긴 하지만, 아무튼 덕분에 우리는 뱅크시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웹에서 만날 수 있던 그의 작품들을 보는 것이 산발적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면 <뱅크시, 월 앤 피스>는 그 갈증을 조금은 풀어준다. 원숭이, 경찰, 쥐, 소, 아트, 거리의 조각상 등 소재에 따라 분류된 책은 뱅크시의 작품을 조금 더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접근해 분석의 여지를 마련해 준다. 주로 해프닝식으로만 알려졌던 미술관 도둑전시에 대한 그의 입장들과, 그래피티에 대한 태도,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패러디 등 그의 촌평들은 짧고 거칠지만 뱅크시의 작품들이 가진 특성들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업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스템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며 시스템에 함몰되지 않고 시스템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나도 모르게 고심하게 된다. 특히 팔레스타인을 격리하고 있는 벽에 진행한 그의 작업들과 일화는 그가 예술가인 동시에 명민한 활동가의 속성 역시 가지고 있음을 훌륭히 보여준다.

그의 말을 하나만 인용해 보자.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보여준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고찰을 보는 것만 같다.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그의 공격은 가차없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며 언제나 핵심을 찌른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지금부터다. 해설을 쓴 이태호 교수는 “그의 작품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가로 매매되기 시작한 이후, 과연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그를 주목할 것이다”라고 글 말미에 밝히고 있다. 첫머리에 쓴 것처럼 그는 이제 세계에서 손꼽히는 고가의 잘 팔리는 작가가 됐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데미안 허스트와 뱅크시를 동급에 놓기도 한다. 물론, 작가로서의 자기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둘은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시 뱅크시가 제도화된 반항을 넘어 예술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가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태호 교수가 던진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책을 손에 든 이들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뱅크시의 앞날을 주목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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