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남긴 한 마디 - 아지즈 네신의 삐뚜름한 세상 이야기 마음이 자라는 나무 19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이종균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한 나라가 있다. 이 나라, 왕 선출 방식이 유별나다. 1년 중 하루 모든 국민이 광장에 모여든 가운데 까마귀가 머리 위에 똥을 세 번 싸는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까마귀 형제여, 나를 파디샤(이슬람권 국가의 군주)로 선출해 줘. 제발.”이라며 자기 머리 위에 똥이 떨어지길 간절히 원한다. 한 젊은이가 이 나라에 도착한다. 이 젊은이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꿈에 푹 젖어있다. 자신에게 권력이 주어진다면 악을 뿌리 뽑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는 이 젊은이의 머리 위에 까마귀가 세 번 연속으로 똥을 떨군다. 평소 소원대로, 그렇게나 바라던 왕이 된 것이다. 이 젊은이는 어떻게 됐을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착한 왕이 됐을까?

세상에나, 작가는 깜짝 놀랄만한 결론을 준비해 놓는다. 젊은이는 왕이 되자마자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을 왕으로 뽑아준 까마귀들에게 온 정성을 쏟는다. 사람은 먹을 게 없어도 까마귀를 굶기면 안 되고, 국민들이 길거리로 내앉아도 까마귀를 위한 둥지는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 결과는? 국민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지만, 까마귀들은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매해 그를 왕으로 뽑아준다. 그러나 어느 해, 온갖 호사에 길들여져 황소만큼이나 몸집을 키운 까마귀들이 한꺼번에 똥을 싸자 그는 까마귀의 똥더미에 파묻힌 채 숨이 막혀 죽어버린다.

<개가 남긴 한마디>의 첫 번째 이야기로 등장하는 ‘까마귀가 뽑은 파디샤’의 내용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왕이 까마귀 똥에 깔려 죽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왕의 죽음을 본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까마귀 형제여, 나를 파디샤로 선출해 줘. 제발.”이라고 외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 참...이라고 혀를 차게 되면서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방법이 없다.

터키의 국민작가 아지즈 네신이 보여주는 세계는 이처럼 통쾌하고 짜릿한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대체 선거에 대해 이만큼이나 노골적이고 신랄한 풍자를 한 작가가 예전에 있던가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상상력이다. 아, 이 어리석은 파디샤와 국민들을 보기 위해 굳이 터키까지 갈 필요는 없다. 이 일화는 매년 우리 주변에서 멈춤 없이 반복되고 있으니까.

책 제목이기도 한 ‘개가 남긴 한마디’를 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카슴은 동물을 매우 사랑하는 남자다. 어느 날 그가 14년 동안이나 함께 살며 가장 아끼고 서로를 이해해 준 개 카라바쉬가 죽고 만다. 친구보다, 가족보다 가까운 카라바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고 거짓말한 카슴. 카라바쉬를 위한 마지막 선물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다. 그러나 관을 묻으려는 순간 관 밖으로 삐져나온 꼬리 때문에 들통이 나 신성 모독으로 재판에 처해진다. 재판관에게 선처를 구하기 위해 카라바쉬가 살아생전 각종 선행을 베풀었다고 증언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카슴을 구한 것은 있을 리 없는 개의 유언이다. 카라바쉬가 금화 오백냥을 재판관 앞으로 남겼다고 말하는 순간, ‘개가 어떻게 유언을 남기느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던 재판관의 태도가 싹 바뀐다. “카슴 선생! 좀 더 말해 보시오. 고인의 유언을 모조리 실행합시다. 그건 종교적으로 보나 뭐로 보나 선행 중의 선행이지 않습니까?”

얄팍한 속내와 빤히 들여다보이는 탐욕, 순식간에 폭로되는 위선과 유치한 이기심의 퍼레이드가 보는 이를 슬며시 미소 짓게 하고 때로는 폭소를 자아낸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근엄한 척 무게를 잡고 있어도 삐뚜름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네신이 던지는 풍자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이야기들을 계속 읽어 가다 보면 주인공들을 마음껏 비웃을 수 없는 순간이 꼭, 찾아온다.

‘아주 무서운 농담’은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재기발랄하면서도 섬찟하게 보여준다. 한 스파이가 왕을 비웃는 농담을 접수한다. 그는 왕에게 가 그 우스갯소리를 들려준다. 배를 움켜쥐고 뒹굴 만큼 박장대소하던 임금은 그건 아마도 경호실장 이야기 같으니 그가 듣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스파이는 경호실장에게 농담을 들려준다. 경호실장 역시 눈물이 맺힐 만큼 웃어제끼며 그것은 총리의 어리석음을 표현한 이야기라고 한다. 스파이는 다시 총리에게 농담을 들려준다. 총리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아마 그것은 내무부 장관의 이야기 같다고 말한다. 내무부 장관은 외무부 장관의 이야기라 하고 외무부 장관은 자신의 차관 이야기라고 한다. 누구도 자신이 비웃음의 당사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모자란 행동을 남의 얘기라며 마냥 비웃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지즈 네신은 “풍자는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서 구해준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풍자가 소중한 이유는 이 세계가 온갖 악덕으로 썩어 문드러지지 않도록 방부제의 역할을 담당해 주기 때문이다. <개가 남긴 한마디>에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조롱부터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작가의 고발이 들어있다. 세상의 진면목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이 이 책을 많이 접하기를 바란다. 책에 실린 열 다섯 개의 짤막한 이야기들은 50년 전에 쓴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역시 사람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걸까? 번역자의 말처럼 언젠가는 더 이상 풍자할 대상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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