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씨의 유쾌한 이별 공식 오늘까지만 사랑해
김수박 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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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날 밤, 옛 애인의 전화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가? 반대로 내일 결혼할 옛 애인에게 전화해 본 경험은? 뻔한 얘기다. 여자는 옛 애인의 결혼 전날 전화해 다음날 만나자고 한다. 그리고 무작정 선운사로 달려가 기다린다. 결혼식을 마친 남자가 짬을 내 전화하지만, 여자는 안 오길 잘했다고 한다. 눈물처럼 동백꽃이 후두둑 떨어지는 이곳에 왔으면 너는 결코 나를 떠나지 못했을 거라고.(송창식, 선운사)

여자는 꿈이 뭐냐고 묻는다. 남자는 질문을 회피한다. 흔한 얘기다. 서로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란 걸, 피해서는 안 될 대답이란 걸 알면서도 묻고 또 얼버무린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은 시간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격렬한 어긋남을 빚어낸다. 그들은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멀어진다.(롤러코스터, Last Scene)

「지하철 1호선 - 사람의 곳으로부터」와 「아날로그맨」등 독특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은 만화가 김수박이 한 음악사이트에 약 1년간 연재한 만화를 엮어 책을 냈다. 추억이나 회고담을 7080의 전유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김수박의 작품들은 8090 세대의 가요 40곡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들이다. 박인수나 송창식부터 양희은, 나미, 이선희, 푸른하늘, 김현철, 이상은, 015B, 여행스케치, 봄여름가을겨울 등 누구나 한 곡쯤은 마음속 한켠에 아름답게 혹은 가슴저리게 간직하고 있을만한 노래들이 하나하나의 단편과 짝을 이뤘다.

「오늘까지만 사랑해」는 삶에서 응축시켜온 감정과 경험의 농도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여기에는 각종 이별이 다 있다. 내 얘기인 듯 남 얘기인 듯 닳고 닳은 이야기다. 뻔하디 뻔하고 흔하디 흔하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상투적인 경구의 사랑 버전 총합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사람을 울린다. 울린다고 하면, 괜히 질질 짜게 만드는 구질구질함이 있지 않냐고 물을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걱정 마시라, 작품에선 외려 산뜻함이 묻어나니까.

프리미어의 허지웅 기자는 처음 10쪽을 보면서 웃고 울었다는데, 나는 아무래도 감수성이 무딘가보다. 처음 볼 땐 노래를 하나씩 찾아들으며 한편, 한편 음미하듯 즐겼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지하철이었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기억의 옛 페이지들이 역류해 눈으로 넘치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을 나와서도 새빨개진 눈으로 울며 걸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 30여년, 그리 헛헛하게만 살지는 않았나보다 하는 안도감보다 어디서 이런 아슬아슬한 안타까움이 솟아났을까 하는 어리둥절함과 그럼에도 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기억해두고 싶다는 알 수 없는 고집과 미련이 앞섰다.

뻔하다는 건 그만큼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강력한 정서의 환기가 가능한 지점이기도 하지만, 상투성의 늪에 빠질 위험도 높은 부분이다. 그러나 「오늘까지만 사랑해」는 진부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수박씨의 유쾌한 이별 공식’이라는 책표지의 어깨제목처럼 이별을 통해 조금씩 강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개인들의 모습이 돋보인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작가가 고른 노래들이 소환하는 추억과 감정,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작가는 당연하게도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간다. 줄거리가 새롭지 않다고 드라마를 마다하는 이들은 없다. 작가는 짤막한 이야기들에도 다양하게 엮이는 사연들을 생기 있게 오밀조밀 배치하는 마법을 부린다. 슬쩍슬쩍 통념의 경계를 벗어나는 연출이 그렇고, 대사의 감칠맛과 기분 좋은 손글씨가 그렇고,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몽타주가 그렇다.

책의 마지막까지 보게 되면 모든 에피소드들이 작가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다. 단편 단편 어지러이 얽힌 이야기들이 질서를 찾고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스토리를 이룬다는 것도 중반 이후에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웬일인지 순대국에 소주 한잔이 간절해진다.

당신은 테스트를 하지 않고 못 배길 거다. 왜냐구? 궁금할테니까. 자신이 담아온 세월과 그 모든 사연들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킬지 실험해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테니까. 작가의 블로그에 가면 노래와 함께 에피소드 몇 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서비스. 그의 팬이 되는 것은 그 다음에라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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