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벨 꽃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427
최하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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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벨 꽃집-최하연

 

1. 

<팅커벨 꽃집>을 읽다가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나는 이런 시집을 읽고 있는 것일까. 어쩌자고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시들이 가득한 이런 시집을 읽는 것일까.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전위니 실험이니 하는 말들 이전에, 독서 본연의 의미를 생각하며, 읽을 수 없는 글을 읽는다는 것의 서글픔을 실감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저 그 ‘알 수 없음’의 영역에서 약간이라도 ‘알 수 있음’에 가닿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염원은 ‘알 수 없음’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알 수 없음’은 나의 희망과 염원을 짓밟고 나를 무지의 영역에 내팽개쳐 두고 떠나버렸다. 남겨진 자에게 남은 것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서글픔뿐. 해설을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해설은 오히려 시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향의 시집을 다시 읽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알 수 없음의 무자비한 짓밞음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나는 이런 시집들일 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를 꾸준히 읽어왔고 앞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자의 서글픈 숙명이기 때문이다.

 

2. 

이런 시들을 읽는다는 건 시인의 자폐적이고 폐쇄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괴로운 건, 내가 이런 시들을 읽음으로서 나 스스로 자폐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시를 읽는 이마저 자폐적으로 만드는 시 읽기의 힘겨움. 그래도 나는 읽을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이런 시들을 읽어왔고, 앞으로 읽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음미하며 읽어나가는 이에게 서글픔이 다가오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글픔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렵다. <팅커벨 꽃집>을 읽는다는 건 서글픔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를 서글퍼하는 독자의 고통을 새삼 실감하는 자리였다. 그것은, 그 시간이 내게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의 고통을 환기시키는 삶의 흔적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앞으로 이 시집의 시들이 사라지면서 남긴 고통을 생생히 간직한 채 살아가리라. 그런데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이 시집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닐까. 자신만의 상처로 살아가는 시인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만의 상처로 살아가게 되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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