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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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유하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라는 제목이 새롭다. 시간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몸부림을 기록한 이 제목은 책의 첫 출간연도(1995년)와 책 속의 내용과 더불어 이 책을 진짜 새로워 보이게 만든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부터 계속해서 영화감독으로 알고 있던 유하가 시인이었다는 사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압구정동과 오렌지족, 이소룡을 위시한 홍콩 영화의 위세, 이름도 생소한 과거의 한국 영화배우 문희를 비롯한 과거 한국영화의 족적, 60년대 한국인들의 삶, 과거 극장의 흔적, 그 시절 유행한 팝송, 과거 재즈 뮤지션들의 활약상, 90년대 시인들의 시와 그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과거를 지나와서 미래에서 되돌아보면 ‘추억이 미래보다 새롭다’라는 것을 하나의 고정된 진실로서 깨닫는 순간으로서의 독서의 순간, 내 머릿속에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이 짓쳐든다. 지금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순간조차 언젠가는 새로워질 것이라는.

 

 

 

 

아마도 유하는 이것을 알고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는 추억이라는, 지나간 시간의 몸부림과 그것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미래의 예측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자신의 글을 써나갔을 것이다. 그 고뇌와 고독과 외로움이 빚어낸 사고의 흔적인 이 글을 읽는다는 건 그래서 걸어갔던 그 길을 다시 걷는 길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저 그가 걸어가며 흘린 열매들을 주워 먹으면 된다. 그 맛이 과거의 맛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맛이라는 사실을 알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을 걸으며 그가 흘린 열매들을 주워 먹으면서 서글퍼졌다. 그것은 내가 독서를 하는 한 계속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나의 독서가 글을 쓴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들이 흘린 열매를 주워 먹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의 수동적인 구현.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 비실존적이고 비본래적인 것으로서의 독서 행위의 필연적인 예감. 거기서 반복은 지옥이 된다. 아니, 반복은 지옥이 될 것이라고 나는 예측했다. 이 ‘지옥의 예감’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반복은 지옥이 된다’라는 말을 가능성의 문장으로 바꾸었다. 그 순간 나의 서글픔은 다시 새로운 의지의 구현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벗어나야 겠다는. 나는 이 서글픔에서, 이 ‘반복의 지옥’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아니, 벗어나겠다. 내가 벗어남을 외치는 순간, 사건이 생겨났다. 이건 내 독서 인생에서 있어 왔던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한 사건이다. 이제 나의 사건은, 나의 독서는 차이 없는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을 향한 여정이 된다. 끝없이 반복되지만, 언제나 다른, 차이가 있는 반복으로서의 독서를 향한 여정. 서글픔을 느낄 때는 진짜 서글픔에 힘들었지만, 서글픔이 사건을 향한 꿈꾸기를 불러오자 나는 다시 힘을 얻었다. 나는 서글프지만 서글프지만은 않다. 나에게 새로운 꿈과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유하가 걸어간 길을 뒤따라 걷는 나의 발걸음은 이제 힘차다. 그건 내가 새로운 꿈과 의지로 걷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뒤따라 걷는 것은 맞지만, 그를 맹목적으로 따라 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의 뒤에서 걷는 단독자다. 그는 그냥 앞에서 걷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의 걸음의 순서는 차이가 있지만, 같은 단독자라는 점에서 그와 나는 같다. 단독자로서의 나의 행보는 그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가 흘린 열매를 먹지만, 그건 그의 열매이자 나의 열매가 된다. 아니 내가 먹는 순간만큼은 나의 열매다. 그의 추억도 나의 추억이 된다. 그의 이소룡은 나의 이소룡이 되고, 그의 문희는 나의 문희가 되고, 그의 찰리 파커는 나의 찰리 파커가 된다. 하지만 그건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가 있는 반복이다. 아니, 그것들을 겪어 보지 않은 나에게 그것은 아직 오지 않는 기대와 미지의 사건으로서의 반복이다. 겪지 않았지만 겪었고, 겪을 것으로서 예상되지만 겪은 반복. 그래서 그건 언제나 새로울 것이다.

 

 

 

 

다시 하나의 문장을 적어본다.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라고 적은 이의 추억을 경험한 나에게, 그의 추억은 추억 그 자체로서 새롭고, 지나갈 추억으로서 새롭고, 다가올 추억으로서 새롭고, 지나가서 되돌아볼 추억으로서 새롭다고. 그건 유하의 문장이 진짜 나의 문장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장 옆에 덧붙일 것이다. 독서는 추억보다 새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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