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왕국
현길언 지음 / 물레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숲의 왕국-현길언

<숲의 왕국>을 읽고 갑자기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에 속하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이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이제부터 여기에 관해 잠시 써보도록 하겠다.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비극을 진정한 극예술의 길로 이끈 인물이다. 그는 배우 1명과 코로스의 노래로 구성된 그리스 비극을 이인극으로 바꾸고, 비극을 극예술의 경지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그는 아테네의 전성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아테네의 미덕을 표현하고 신을 찬양하는 극작가로 기억된다. 그는 동방의 강국 페르시아를 그리스 연합군이 격파한 살라미스 해전과 마라톤 전투에 직접 참여했고, 뒤이은 아테네의 전성기를 몸소 체험하며, 아테네의 위대함과 미덕을 굳건히 믿었고, 페르시아로 대변되는 오만한 인간들이 재앙을 겪는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이 모든 것 뒤에서 신은 인간이 오만하지 않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다고 믿었다. 그에게 신은 조화와 질서의 수호자였고, 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는 존재였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종교적인 이유는 바로 이 신에 대한 찬양과 믿음 때문이고, 그가 인간의 이야기를 하지만 신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극 속에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믿음, 신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올바르고, 아테네가 위대하다는 그 믿음을 견지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은 그의 후배 격인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비교해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인 소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을 진정한 극예술로 만든 그리스 비극의 대표자이다. 그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의 차이는 두 사람의 삶의 차이를 반영한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네의 전성기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의한 급격한 몰락을 모두 겪은 인물이다. 그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해 패망하기 전에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기 아테네의 성장과 번영, 위기와 몰락을 모두 겪었다. 아테네가 급격하게 성장해서 역시 급격하게 몰락한 것을 모두 본 소포클레스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신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극에서 신을 불가해한 존재로 그리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얘기한다. 신의 의도를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는 죽기 전까지 아테네의 미덕을 믿었다.

 

이에 비해 그리스 비극의 3대 극작가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와 다르다. 그건 그의 삶이 두 사람의 삶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잠깐 동안 아테네의 전성기를 경험한 에우리피데스는 뒤이어 아테네의 몰락을 몸소 경험한다. 그의 삶의 다수의 시간은 아테네의 몰락으로 점철된 것이다. 전쟁과 전쟁에 의한 고통, 스파르타의 압박과 아테네의 패전에 따른 온갖 부조리한 경험이 그의 삶을 채우고 있다. 전쟁을 외치면서도 막상 전쟁터에 나서면 이기지 못하는 정치가들, 그런 정치가들을 계속해서 찍어주고 그에 따라 온갖 고통을 경험하는 아테네 시민들, 어른거리는 죽음과 패망의 그림자를 어떻게든 극복하려 하면서도 어떤 해결책도 보여주지 못하는 아테네의 상황, 슬픔과 고통과 기아와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의 모습들. 여기서 에우리피데스는 이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에게 신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이자 부조리한 존재였고, 아테네의 미덕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인간들은 자신의 눈앞에 닥친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존재였다. 그는 신과 아테네의 미덕에 회의를 표하고, 인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리스 비극을 인간의 탐구로 만들었다. 그는 인간 내면의 심리를 탐구하고, 부조리한 신에 의해서 시련을 겪는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허약한지를 그려낸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에 대한 이상적인 믿음을 유지한 아이스킬로스와 세상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에우리피데스. 나는 이 두 사람의 모습에서 <숲의 왕국>을 쓴 현길언 씨와 나를 대입시켜본다. 완벽한 의미의 비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유사성을 찾아본다면 <숲의 왕국>을 쓴 현길언 씨는 아이스킬로스에 가깝고, 나는 에우리피데스에 가깝다고. 나이로 보나 살아온 시대상으로 보나 책의 저자인 현길언 씨는 나의 윗세대에 속한다. 군부 독재를 겪으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나의 윗세대들은 거시적인 사회적인 비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믿음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나의 윗세대들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믿음을 상당부분 상실한 것은 맞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그것을 가졌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숲의 왕국>에는 그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인간과 세상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그림자. 그래서 나는 현길언 씨가 아이스킬로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나와 나의 선배, 후배를 포함한 세대들에게 거시적인 사회의 비전에 대한 경험은 미약한 수준이다. 우리의 대부분의 삶은 IMF 이후에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고용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항상 따라다닌다. 우리는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대를 살아왔고, 사회적인 비전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 대한 걱정만으로 벅찬 삶을 살아왔다. 친구들과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거시적인 사회적 비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과 삶의 불안을 메우려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우리의 존재 조건은 언제나 생존 그 자체였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에우리피데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 더 익숙한 것이 우리 세대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니체의 회의주의와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에 끌렸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 사회적인 비전에 대한 믿음을 얘기하는 담론들보다는 세상을 회의하고, 세상의 부조리함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를 매혹시켰다. 무턱대고 인간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내 존재 조건에 비추어보건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숲의 왕국>을 읽고 나니 갑자기 그 믿음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맹신과 복종이 아니라, 대책없이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에 끌림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그건 낭만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낭만을 가진다는 건, 팍팍한 삶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 낭만성, 인간과 세상에 대한 대책없는 믿음을 가진다는 건 지금보다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현길언 씨의 믿음을 믿고 싶어졌다. 그것을 믿는다면 지금의 삶보다는 더 나아지리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마음 속에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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