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이야기 바벨의 도서관 28
레옹 블루아 지음, 김계영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불쾌한 이야기-레옹 블루아

불쾌하도 또 불쾌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보통 즐거움이나 기쁨,슬픔,아픔,

아련함,씁쓸함,혼란스러움,고뇌 등의 감정을 독서를 통해 느끼는데, 이 책은 불쾌함이라는 드문

감정을 독서를 통해서 느끼게 했다. 다 읽고 나서 떠오르는 생각도 '내가 왜 이런 불쾌한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였다. 도대체 작가는 왜 이런 책을 쓴 것일까? 진짜 세상에 불쾌한 일이 많아

서 그것을 알리고 싶어서? 아니면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싫어서 그 불쾌함을 표출

하고 싶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기 위해서 책의 처음에 나오는 보르헤스의 작가와 작품

소개글과 마지막의 해제를 들여다본다.

레옹 블루아. 부르주아 세계에 봉사하는 공범자로 보았던 성직자들과 공식 문학과 단절하는 태

도를 보여 세상 불화했던 작가. 인간 자체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과 사회 자체를 조롱하고

경멸했으며, 이에 대한 신랄한 독설을 선보인 작가. 블랙 유머의 창시자로 자신만의 블랙 유머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 작가. '우리는 이미 지옥에 있고, 모든 인간은 자신

의 동료를 고문할 책임을 맡은 악마'라고 생각한 인물. '프랑스가 선택된 민족이고 다른 민족

들은 그 접시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핥아 먹어야 한다' 주장한 인물. 반유대주의자. 프로

이센 군을 무서워하는 저격병 마르슈누아르와 지금 세대들에게 레옹 블루아로 알려진 냉정한

논객의 이중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 '우주는 일종의 신성한 암호문이고, 그 안에서 모든 인간

하나의 단어, 문자 혹은 단순한 구두점'으로 우주의 심연과 별들이 단지 인간 의식의

투사일 뿐이라고 주장한 남자. 실증주의와 대립하고 인간의 진보 따위는 믿지 않고 인간과 역사

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 인물. 영국,미국,독일,벨기에를 공평하게 혐오하고 증오한 인간. 에밀

졸라를 위시한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혹독하기 그지없는 비난을 퍼붓던 작가.

레옹 블루아에게 인간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

혐오감을 표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글쓰기를 선택했고, 글쓰기를 통해 자기 안에 가득찬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여지없이 표출한다. 그가 창안한 블랙 유머라는 문체적 스타일은

그의 혐오감과 증오심의 표출을 돕는데 일조하고, 그는 그걸 통해서 자신만의 독설의 경지를 창조

해낸다. 소설도 독설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불쾌한 이야기>는 레옹 블루아식 독설의 힘을 보여

주는 불쾌한 이야기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소설에서 내내 들떠있다. 마치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는 듯이. 그는

기쁘고 즐겁 불쾌한 이야기들을 독자의 눈 앞에 내민다.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그의

활력적이고 유쾌한 문체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내용은 그의 문체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해서 죽음으로 몰아넣딸, 돈 때문에 살아 있는 아버지를 화장시켜버리는

아들, 딸과 사위가 자신과 따로 사는 것에 앙심 품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딸과 사위를 압박해

서 죽게 만드는 어머니, 자신을 괴롭히던 예전 집주인의 머리를 길에서 우연히 주운 작가, 충실

하게 교회다니고 자선을 베풀지만 직업이 킬러인 남자, 재혼 위해 아들 죽이는 어머니, 모든

함께하는 네 남자, 자신이 사랑했던 죽은 누이의 목소리를 창녀에게서 듣는 남자 ...... 레옹

블루아는 어둡기 그지없고,음습하며,더럽고,찝찝한 비윤리적인 이야기들을 너무나 즐거운 말투

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말투를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몸 전체를 엄습하는 불쾌감을 만날 수

있다.

현재의 책들 중에서 이 책보다 잔인한 책들은 많다. 그러나 이런 독특한 스타일로 대량의 불쾌감

을 조성해내책을 만나기란 지금 이 시대에도 쉽지 않다. 잔인한 표현이 거의 없는데고 잔인

하고, 더럽고 찝찝한 표현을 쓰지 않는데고 더럽고 찝찝하게 여겨지는 이야기들을 창조해내는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시대를 앞서 독설과 불쾌감의 선구자로서. 그 이상의 무언가

를 찾는 것은 어렵다. 사실 이 책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처

럼 느껴진다. 불쾌감을 즐겁게 독자의 몸에 묻히는 책에서 뭔 의미를 찾는단 말인가?

실증주의를 조롱하고 인간의 진보 따위 믿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증오한 레옹 블루아의 글에서

어떤 철학적인 메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독서에서 항상 의미를

찾는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강박증을 가진 불쌍한 독서광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의미를 찾아나섰다. 그리고는 온몸에 불쾌감만 잔뜩 묻히 퇴각해야 했다.

온몸에 불쾌감이라는 오물을 잔뜩 묻힌 채로 책을 덮으니,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쉽게 찾았다. 책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나는 <불쾌한 이야기>가 내 눈앞에 있었기에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로 불쾌감

이라는 결실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이런 류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독서라는 덫에 빠진 나는 나중에 또 이런 책들을 읽으리라. 그리고 또 불평하리라. <불쾌한

이야기>가 주는 불쾌감은 여기서 최절정에 달한다. 내가 이 불쾌한 독서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

못하리라는 예측 자체가 이 책이 내게 전해준 최악의 불쾌감으로 다가왔다. 이 최악의 불쾌감

앞에서 나는 그저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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