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르 지만지 희곡선집
장 라신 지음, 송민숙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9.페드르-장 라신

 

1.

라신의 눈은 세밀하다. 그의 눈은 인간이 감추고 있는 내면을 섬세하게 파헤치고,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의 흐름을 좇아서, 그것들의 변화의 양상을 글

로써 펼쳐보여준다. 특히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

는데 있어서 그의 비극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더욱 더 놀라운 건, 그가 남자

도 불구하고 여성의 심리 묘사에 능하다는 사실이다. 남자라는 성적인 한계

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의 심리 묘사에 능하다는 사실은,그

세밀하고 섬세하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고,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려준다. 이것은 그의 라이벌인 코르네유의 비극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차이가

는데, 코르네가 그려내는 남성적이고, 의지에 가득찬 인간들의 세계에서

념이 의지에 종속거나 아니면 정념이 의지의 힘에 눌려서 그 빛을 잃어버리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지 앞에 무력한 정념, 혹은 의지 앞에서 사라져버리는 정념.

코르네유에게 정념의지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나친

지에의 강조는 오히려 르네이유 비극의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어버

다. 권력에의 욕구,국가에충성 혹은 강력한 이상의 추구에 헌신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의 비극세계는 그의 극 자체를 현실이나 삶의 모습이라기보다

는 이상적인 이념이나 구호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인간들이 이상이

나 대의,국가정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 있다면서 극을 통해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선동한다.

 

하지만 라신은 그와 반대다. 라신은 인간 감정과 심리의 모순적이고,비이성적이며,

란스러움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는 인간들이 입으로는 이상과 이성을 말하면서도

작 자기 자신이 그에 따르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삶과 추상적인 구호와 철학의 괴리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얼마나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일 수 있는지, 얼마나 이상하

게 변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라신의 세밀한 눈은 그런 모습을 파악해서 비극에 담

는다. 정념비극이라고 불리는 그의 비극에서 인간들은 애정에 눈이 멀어 파멸이라

불꽃에 다가가는 부나방이 되어버린다. 라신은 이상과 구호가, 삶의 실체와 인간

감정의 혼란스러움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져내리는지 보여준다. 그는 인간들이

입으로는 이상이니 정의를 떠들어도, 극으로 상연되는 작품에서는 불같은 사랑과

그에 따른 파멸적인 인간의 행동을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 정도에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코르네이유와 라신의 경쟁은 라신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그리

라신은 섬세한 눈과 작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지위도, 돈도 없이 태어났다는 핸

디캡을 극복하고 문학적 성공과 정치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이룩한다. 그에게 세한 눈이란 삶과 정치적, 문학적 성공을 위한 강력한 무

다름 아니었다.

 

2.

라신의 눈은 냉정하다. 그가 섬세하게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유

하다는 말과는 다르다. 그의 섬세함과 세밀함은 역설적으로 그의 냉정함이 없었다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이념이나 이상,구호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그려나간다. 그가

바라본 인간들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정념의 비극을 창조해내

고, 그것을 계속 써나갔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극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출세,정치

에도 이용한다. 그가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에 그의 극을 상연시켜주었던 희극의 대가

몰리에르를 배신하고, 그의 대본을 몰래 공연했던 일이나,그렇게 몰리에르가 자신과

절연을 선언하자 몰리에르 극단의 유명 여배우를 데리고 떠난 일, 코르네유와의 경쟁

에서 코르네유의 약점을 폭로하며 철저하게 승리한 일, 사교적인 재능으로 왕의 신

임을 얻어 왕의 치세에 대한 공식역사를 쓰는 사료편찬관을 시작으로 정치적인 출세

길로 들어선 일까지, 그는 냉정한 시각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인간의 성향과 성격을

악하고, 그 분석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삶의 성공을 거둔다. 3세에 부

님을 모두 여의고, 9세에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가서 운좋게 교육을 받을 수 있

던, 이 아무것도 없었던 남자는 삶을 바라보는 냉정한 시각이 없었다면 삶에서 성공

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시에 이 냉정함은 라신의 철저한 현실인식을 형성하고, 극작품의 세계관을 결정짓

는데 큰 역할을 한다. 부모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자신에게 지식을 가르쳐준 수도원

마저 왕의 압박으로 폐쇄된 상황에서, 라신은 무엇보다 정치적 권력의 힘과 현실의

무서움을 실감한다. 그에게 세상이란, 인간의 노력을 통해 변화할 수 있거나 어떤 특

정한 이상을 추구해서 살아가는 대상이 아니라 변화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적응할 수밖에 없는 가혹하고 냉정한 곳이었다. 라신의 이런 자각은 그 자신이 극작가

로서 철저하게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의 규범을 지키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

력했다는 사실, 작품 속에서 정치적 권력관계는 변하지 않고, 정념에 빠진 인간들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표현하면서도 체제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라신은 반드시 5막 구조여야 하고, 군주와 귀족들의 이야기여야 하고, 등장인물들이

반드시 군주와 귀족 계급에 한정되며, 그 계급에 맞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왕이나

여왕, 귀족들이 살았던 인위적이고 제한된 세계만을 묘사하며, 주의 깊게 구성된 12음

절 시인 '알렉상드린'을 대사로 써야하고, 행동-시간-장소의 삼일치를 이루어야 하

며, 상이나 초현실적인 사건들을 배제하며, 권선징악을 표현해야 하며, 이성을 중시

한다는 절대왕정의 문학적 형상화인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비극의 규범을 철저

하게 지키면서도 동시에 이 규범의 준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 안에 인간의 정념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요소를 가미시켜 자신만의

극을 창조해냈다. 그의 비극은 체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창조적이고, 창조적이면

서 체제 유지적인 문학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이 없었다

면 불가능했던 일로, 라신은 이 냉정한 눈으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 창조와 삶의 성공

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쥔다.

 

3.

세밀하고도 냉정했던 라신. 창조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라신. 체제 유지적이면서도 체

제를 이용할 줄 알았던 라신. 삶에서는 철저하게 성공 지향적이면서도 문학에서는 정

념을 강조했던 라신.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문학에

서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보여줬던 라신. 이 모순적인 작가는 35세에 이미 아카데미 프

랑세즈 회원이자 문단의 지도자로 올라서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페드르>를

써내지만, 적대자들의 음모로 인해서 이 작품이 저평가 받자 8개월 뒤에 공식적으

작가 자리에서 물러나 사료 편찬관이 된다.(나중에 두 편의 작품을 더 써내지만, 그것

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라기보다는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으로, 예술적인 목적이 아

니라 교육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라신의 이전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작품

들이다.) 그리고는 작가의 길로 다시는 돌아서지 않고, 정치적인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조용히 숨을 거두다.

 

4.

라신의 모든 것이 집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 그의 작품의 정수를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 <페드르>이다. 출세의 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자신의 작가

인생의 모든 것들을 정리해서 써낸 <페드르>는 전형적인 고전주의 희곡의 규율을 철

저하게 따르면서, 라신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빛을 발한다. 특히 여성들의 애정

심리를 철저하게 파고들어가면서 사랑의 무시무시함을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드러낸

이 작품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프랑스 고전주의

비극의 언어 중시적인 측면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언어로 인물 간의 갈등 관계, 애정,

치열한 대결의 양상을 표현한다. 그는 구절구절, 대사 하나하나마다 고전주의의 조화

미와 질서미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아름다운 시구들을 쏟아내고, 그것으로 인물들의

치열하기 그지없는 정념의 투쟁을 그려낸다. 새어머니의 양아들에 대한 금지된 사랑

을 그린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에서 소재를 취해서 조금

더 극적이고 투쟁적으로 변화시킨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비합리적인 감정이 초합리

적인 힘으로까지 변화해서 새어머니 페드르를 파멸로 몰아넣는 과정을 보여주며, 라

신 비극이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시선 역시 놓치지 않고 제

시하고 있다. 사랑이 아무리 강력해도 견고하기 그지없는 체제에 균열조차 만들 수

없다는 냉정한 사실의 표출 또한 여전하다. 이 모든 것들을 포착한 이 작품의 독서가

끝나고 나니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작품의 언어적 수사가 삶의 냉혹한 진실

앞에서 무용하다는.

 

5.

솔직히 라신의 이 작품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쓰지 않는 표현과 문장들

즐비한데다, 구어체의 대화와 표현에 익숙했던 내가 노래하듯 주고 받는 운문 대사의

낯설음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읽다보면

노래하듯 주고받는 대사의 아름다움, 대사 자체가 하나의 시가 되는 독특함 예술성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부분에서 라신이 보여주는 정념의 무시무시함은 그

취하고 있는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정념의 비극을 통해서 그가

살아간 사회적 체제의 견고함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당대의 지배층들은

연극을 보면서 파악했고, 그래서 그를 아끼고 종용했던 것이리라. 이 깨달음을 얻고

니, 갑지가 <페드르>에서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성공을 위해서 향해서 걸어

는 이 남자의 뒷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의 앞길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

니고, 그가 얼마나 성공이라는 목표를 이루려고 시달렸는지 너무다 잘 알고 있기 때

문이다. 어쩌면 이 남자가 만든 작품에서 파멸하고 죽음을 맞는 페드르 보다 그가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죽음을 통해서 삶의 억압에서 벗어난

페드르에 비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삶의 억압에 매여서 힘들게 허덕인 이 남자가 더

가엾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6.

라신은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고, 삶의 결말만 놓고 보면

그의 삶은 비극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몸부림이, 그의 삶의 면면이, 그가 삶이라는

길을 걸어간 길에서는 왠지 모를 비극의 냄새가 풍긴다. 그의 삶은 비극이 아니었지

만, 그의 삶에서 비어져 나오는 비극의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비극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비극을 써야 했기에 썼다. 그는 비극의 운명에 취해서

비극을 토해냈다. 아, 이것이야말로 진짜 비극이다. 삶은 비극이 아니었으되, 삶을

살아간 인간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던 것. 이것을 비극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하겠

는가! 이 삶의 비극 앞에서 라신이 쓴 <페드르>는 숨을 죽인다. 나는 <페드르>에서

이 숨죽임을 포착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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