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신의 오후 민음사 세계시인선 16
말라르메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1월
평점 :
품절



26.목신의 오후-말라르메

 

1.

보들레르의 시도 읽었고, 랭보의 시도 읽었고, 발레리의 시도 읽었으니 말라르메의

시를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당연함은 언제

나 당연하지 않음을 동반했고, 나는 삶의 흐름 앞에서 말라르메와는 상관없는 듯이

살아갔다. 내게 '악의 꽃'을 이야기하는 시인 보들레르는 시의 상징성과 이중성을 감

각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악마적인 시인이었고, 랭보는 상징과 현실 너머의 낯선 세계

나를 인도하는 지옥에서 온 시인이었고, '해변의 묘지'로 나를 인도하는 폴 발레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 같은 시인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나는 말라

르메의 시 속으로 뛰어들어 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집>을 거부했고, 프랑

스 상징주의를 추억에 파 묻은 채 삶을 살아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기억의 한 구석을

차지한 프랑스 상징주의는 내 삶과는 상관없이 빛나고, 아름다운 추억의 사진같은 존

재들이 되었고, 나는 그 추억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채로, 삶이라는 대지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징주의가 내게 다시 찾아왔다. 목신 판의 

관능적인 피리소리를 동반한 <목신의 오후>라는 제목과 함께.

 

2.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언어는 변화하기 마련이다. 언어 표현, 의미, 단어 생성, 다른

언어들과의 교류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모두 포괄하는 언어의 변화를 보고 있노라

면, 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프랑스 상징주시인들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언어를 통해서 이 세상 너머의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에 나선다. 그들

은 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 세상의 것도 아니고,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보는 견자의

시각으로, 그 모든 것들을 표현해낼 수 있는 '악의 꽃'을 피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인간 인식과 사고의 불완전성 때문에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필패라는 결과를 떠안고

그들은 여기에 도전하며 자신들의 시를 써내려간다. 너무 당연하게도, 말라르메도

이 필패할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시도에 도전했다. 그는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보이

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절대의 책을 쓰려는 감당할 수 없는 욕망

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절대적 꿈을 위한 여정의 일환으로 그는 계속해서 상징적인 시

들을 써나갔던 것이다. 그것이 절대의 책이 아닌, 절대의 책의 조각이나 단편에 불

과할지라도, 그는 계속해서 써내려 갔다. 여기에서 그의 시들은, 이제 절대의 책이라

는 그 자신의 꿈을 향한 여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불가능한 꿈

을 이루기 위해서 차근차근 길을 밟아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초기의 도피적인 성향의

시들도, 절대의 책으로 나아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

게 <목신의 오후>도 절대의 책나아가는 시인의 발걸음에 포함된다. 목신 판의 관

능적인 꿈은, 시인 자신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꿈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3.

솔직히 말라르메의 시는 어렵다. 아무리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하기 쉽지 않다. 서정의 표현이나 묘사인 듯 보이면서도 상징을 품고 있고, 동시에 이

세상을 넘어서면서도 이 세상 모두를 표현하려는 모순적인 시인의 열정을 품고 있기

에,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인 다층성을 가진 시가 되어 읽는 독자를 괴롭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라르메의 시를 씹꼬 또 씹으리라. 씹다가 '이해불가'라는

에 걸려 이해라는 이빨이 빠져나가고 생각이라는 잇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일이 있

어도 포기하지 않고 씹으리라. 씹다 보면 절대의 책에서 흘러나오든한 미약한 빛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인도 그것을 알기에 시를 계속 썼던 것이 아닐까.

 

'그대를 찬미하노라, 처녀들의 분노여,

오 성스러운 전라의 잠이 주는 미칠 듯한 감미로움이여, 번갯불이 몸을 떨듯,

불타는 내 입술의 목마름을 피하려 그대는 미끄럽게 달아난다.

살의 저 은밀한 몸서림치이여

무정한 여자의 발끝에서부터 수줍은,

여자의 가슴에까지.

광란의 눈물에, 혹은 보다 덜 슬픈

한숨에 젖은 순진함은 벌써 옛날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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