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의 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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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의 꿈-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자식들을 친적집에 맡긴 아버지를 둔 남자. 친척 집에서 성장하며 모험가를 동경하고, 야만인들을 문명화시키는 성스러운 백인의 의무를 자신의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인 남자. 그 이상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가서 직접 모험가가 되고, 자신이 존경하던 모험가가 아프리카인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고 크나큰 실망을 하는 남자. 영국의 외교관으로 아프리카 콩고에 가서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대리인들이 콩코인들을 다루는 잔혹한 모습을 보고 고발에 나서 유럽에 반향을 불러일으켜 벨기에의 콩고 지배 형태를 바꾼 남자. 페루에 가서 아마존 회사가 저지르는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수탈을 보고 고발에 나서 큰 좌절감을 느꼈으나 결론적으로 아마존 회사의 비인간적인 실태를 널리 알린 인권 운동의 아버지격인 남자. 아일랜드 신교도로 영국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인권 운동으로 훈장과 귀족작위도 받았으나 말년에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심취한 남자.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급진적인 독립 운동을 지원하며 1차 대전에 영국의 적인 독일의 지원을 얻어 아일랜드의 독립을 쟁취하려다 실패하여 영국의 감옥에 갇힌 남자.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부활절 봉기와 그 결과로 자신의 동료들이 죽음을 맞는 걸 감옥에서 묵묵히 듣던 남자. 자신의 명성 때문에 감형운동이 일어나나 영국 정부가 공개한 그의 일기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논란이 일어 여론이 분열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은 남자. 동성애자 논란 때문에 아일랜드에 유해가 가지 못하고 뒤늦게서야 아일랜드에 묻힌 남자. 보수적인 아일랜드가 자유로운 분위기가 된 1990년대 쯤에 가서야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남자.

 

이 남자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이 남자의 삶을 소설을 쓰려고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드라마틱합니다. 급전직하, 상승과 하강, 절정과 나락의 파노라마가 거대한 삶의 에너지를 뿜어내는데, 어느 소설가라도 이 남자의 삶을 소설로 쓰고 싶어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경쾌하면서도 리드미컬한 특유의 문체는 이 남자의 드라마틱한 삶을 따라가면서 이 남자의 삶에 드리운 무게감을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머물게 노력합니다. 무더운 아프리카와 남미의 정글에서 마주친 참혹한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면서도 우리는 마리의 바르가스 요사 덕분인지 지나치게 어둡지 않게, 그러면서도 세상의 진실을 받아들 수 있게 책을 읽어나가게 됩니다. 사지절단, 폭력, 학살, 강간, 참혹한 인권유린과 차별의 무게감에 파묻히지 않으면서도 그 진실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또 이 소설이 그 무게감에 파묻히지 않는 건 책의 구성 덕분입니다. 책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사형을 앞둔 로저 케이스먼트가 자기 앞에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말년의 삶을 회상하는 부분과 어린 시절을 거쳐 영국 외교관이자 인권운동가를 거쳐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 실패하는 부분. 앞 부분이 뒤 부분의 무게감을 줄여주고, 동시에 뒤 부분의 결말이 앞부분으로 이어지는 이런 순환적인 구성은 각 부분이 서로가 서로를 도우면서도 이야기를 커다단 삶으로 모으는 문학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이런 구성을 통해 우리는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한 남자의 드라마틱한 삶을 우리 삶의 보편성과 일치시키게 됩니다. 그가 행했던 놀라운 업적과 한 인간으로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고뇌와 분노, 공포와 무력감을 함께 느끼며.

 

저 자신을 엄습한 무더위를 감내하며 이 책을 읽는 건 제게 기묘한 경험이었습니다. 책의 주인공인 로저 케이스먼트가 무더위로 고생하면서 참혹한 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더위로 고생하는 저와 묘한 일치감을 느꼈으니까요. 물론 제 앞에는 학대받는 식민지의 주민들 대신 저 자신의 삶의 모습 밖에 없고, 아일랜드 독립을 외치는 투사들 대신 인터넷과 SNS에서 말로서 치고 받는 키보드 워리어들 밖에 없지만.^^;; 무더위 속에서 무더위와 싸우며 인권 운동을 했던 한 남자의 삶을 소설로서 읽는 건, 촉각의 무더위와 시각의 무더위라는 이중의 체험을 하는 것이었으며, 그 외에도 드라마틱하고 문제적 삶을 읽는 즐거움을 제시했습니다. 이 이중의 체험을 쉽게 잊을 수 없겠죠. 쉽게 잊지 않는 만큼, 저 자신의 삶에 로저 케이스먼트라는 이름은 각인되어 남을 겁니다. 잊혀지지 않는 문제적이고 드라마틱한 삶을 산 남자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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