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을 읽다 - 마르크스와 자본을 공부하는 이유 유유 고전강의 2
양자오 지음, 김태성 옮김 / 유유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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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6.자본론을 읽다-양자오(2)

'잔디를 밟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 팻말이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저 팻말의 말을 들을까요? 누군가는 저 팻발의 말을 어길텐데... '미성년자는 담배와 술을 금합니다'라는 말을 봐도 비슷한 생각이 듭니다. 저렇게 말을 해도 어기는 사람은 분명 있을텐데.^^;; 물론 다수의 사람은 금지의 말을 하면 지킬 겁니다. 언제나 지키지 않는 건 소수에 불과하죠. 하지만 소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금지가 있기 때문에, 금지 하는 행동을 했을 때 느끼는 묘한 해방감은 커질 겁니다. 이렇듯 금지에는, 금지의 말에는, 이 금지를 넘어서서 행동한다면 금지하지 않을 때보다 더 묘한 기분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금지의 말에 숨겨진, 금지하는 행동을 촉구하는 듯한 묘한 단어의 이질감. 누군가에게는 금지의 말은 '금지하는 것을 해라'라는 말로도 들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론을 읽다>의 서문에 나오는 양자오의 행동이 위에 제가 적은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책의 서문을 보면, 과거 한국과 비슷했던, 아니 어쩌면 더 심했을 수도 있었던 반공국가의 분위기가 있었던, 과거의 대만에서 저자는 대학 도서관에 가서 금단의 열매와 같았던 <자본론>과 우연히 마주칩니다. '읽지마', '읽으면 안 돼', '읽으면 넌 위험해'라는 금지의 단어가 보이지 않는 글씨로 적혀 있던 책을 마주하고, 양자오는 그 단어들을 '반드시 읽자'라는 단어로 바꾸고 읽습니다. 그 때 그가 느낀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그건 마치 금단의 열매를 먹고 느꼈던 누군가의 쾌락과 비슷할 겁니다. 금지했기에, 하지 못하게 했기에, 했을 때 무언가를 위반한 듯한 아찔한 쾌감이 찾아오는 겁니다. 더군다나 그게 보통의 책도 아니고, 우리의 시야를 트이게 해주는 마르크스의 책이었기에 양자오가 느낀 감정은 더 짜릿할 겁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말한 뒤에 저자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특징과 핵심을 짚어주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정당화하며, 지금 일어나는 경제적인 일들을 정당화시키는 주류 경제학과 달리 마르크스의 경제학,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그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마르크스는, 눈앞의 경제적 현실이 수요 공급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경제학적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마련한 자본주의적 구조에 따른 결과라고 알려줍니다. 그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특수한 것이라고 하면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기에, 마르크스에게 그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건 논의하고 분석하면서 비판하는 대상이 됩니다. 논의와 분석과 비판의 끝에서 마르크스는 그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의 결과이자 자본주의적 역사의 현상이 됩니다.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의 결과이자 자본주의적 역사의 현상으로서 그것은 계급투쟁의 결과물에 다름 아니게 됩니다. 가진 자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가지지 않은 자들의 지배당함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산물로서.

여기에 노동가치설, 잉여가치, 소외, 상품, 화폐, 물신 같은 개념들을 설명하고 거기에 마르크스의 통찰력과 19세기 사회에 대한 관찰한 결과들을 덧붙여서 마르크스의 사상과 <자본론>을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서 양자오는 마르크스 사상의 비어 있는 부분들을 채워주는 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과 이론을 더해서 마르크스라는 한 개인의 사상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끊임없이 만들어져가는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사상의 밑그림을 보여줍니다. 자본주의 사상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소외되지 않는 주체적인 개인의 삶에 대한 이상을 반영한 사회상에 대한 염원,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배려하는 삶,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지는 사회에 대한 추구 같은.

읽다보면 양자오의 의도대로, 마르크스의 사상과 <자본론>에 대한 밑그림은 충분히 그려집니다. 거기서 더 나아갈려면 다른 책들을 더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도 저는 양자오의 마르크스와의 첫 만남에서 얻은 기쁨이 부럽습니다. 금지된 것을 맛 볼 때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저 같은 경우는 마르크스를 금지한 시대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마르크스에 대한 금지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에게 마르크스는 금지된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금지된 열매가 아니었기에, 금지를 넘어설 때 느끼는 강한 쾌감은 없었습니다. 자유를 통해서는 금지를 넘어서는 강렬한 느낌을 느낄 수 없으니까요. 다만 시야를 넓혀주고, 제가 서 있는 지반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느낌은 있습니다. 이상에 대한 공감도 어느정도 있었지만, 양자오가 경험한 강렬한 느낌은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양자오가 부럽습니다. 금지된 책들을 읽을 때의 강렬한 경험을 저는 느낄 수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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