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의 죽음 미래의 문학 9
존 크리스토퍼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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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모두 진짜 야만인이네요. ... 아마 세상 모든 남자들이 마찬가지겠죠.(27)
여차하면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을 수도 있어요. 지금 말씀하시려는 뜻이 그거 아니에요? 우리는 또다시 그들을 잊고 말았어요. 그리고 앞으로 5분 뒤에는 또다시 그들을 잊어버릴 많한 또 다른 핑계를 아마 발견하게 될 거고요.(37)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어. ...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된 시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폭넓은 충성심은 문명화된 사치품일 뿐이야. 앞으로는 충성심이 이전보다 더 좁아질 것이고, 더 좁아지는 대신에 더 격렬해지겠지.(93)
우리가 이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어. 최소한 우리 일을 우리가 결정할 수는 있을 테니까. 더는 자국민을 속이고 괴롭히고 이용하는 국가의 묵인하에 살게 되지는 않을 거야.(103)
자비란 언제나 사치이게 마련이야. 저런 비극이 충분히 편안한 거리를 두고 벌어지면 아무 문제가 없어. 극장 좌석에 앉아서 구경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 비극이 우리 집 문간에, 사실상 모든 집 문간에 닥쳤을 때에는 상황이 다르지.(265)
나를 바꿔놓은 뭔가가 있다면, 그건 피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비인격적인 뭔가야. 즉 우리가 앞으로 살 수밖에 없는 종류의 삶이라고.(289)

외딴 섬에 표류된 인간의 이야기를 그린 대표적인 서양문학 작품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들 수 있습니다.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의 삶을 그린 작품인데, 소설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신기하게도(^^;;) 합리적인 근대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대되는 소설도 있습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사고로 난파되어 무인도에 표류된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이 소설은 <로빈슨 크루소>와 반대로 소년들이 고립된 섬에서 살다 문명인의 껍질을 벗고 야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앞에서 하는 게 이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지금 제가 서평을 쓰고 있는 <풀의 죽음>이 두 책 중에서 어디에 가깝냐를 이야기하기 위해 두 책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풀의 죽음>은 어디에 가까울 까요? <풀의 죽음>은 로빈슨 크루소보다 <파리대왕>에 더 가깝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풀의 죽음>은 볏과 식물들을 죽이는 충리 바이러스가 아시아를 거쳐 영국을 습격하며 심각한 식량난이 벌어진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은 무능하고 폭력적인 정부의 대응,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려지며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 처 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말합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풀의 죽음>에서 문명인을 자처하던 영국인들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파리대왕>처럼 문명의 가면을 벗어던진 야만인으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풀의 죽음>은 <파리대왕>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파리대왕>의 소년들은 난파와 무인도에서의 삶을 통해서 야만적인 행동을 하나 마지막으로 인간의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소년들에게 야만인이 된 것은 일시적인 일탈에 불과한 것이죠. 그런데 <풀의 죽음>은 <파리대왕>과 달리, 자신을 기다리는 따뜻한 인간의 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습니다. 충리 바이러스는 여전히 세상을 장악하고 있고 무정부 상태의 영국에서 사람들은 원시적인 부족 상태로 돌아갔기에 <풀의 죽음>의 주인공 존 커스턴스 무리는 앞으로도 쭉 야만적인 상태를 유지한 채 살아갈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극단이 아닙니다. 영국 뉴웨이브  SF를 대표하는 작가 J. G. 발라드의 <하이라이즈>과 비교해보면 <풀의 죽음>은 양호한 편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초고층 아파트가 스스로 고립되며 벌어지는 퇴행과 야생의 드라마를 독특하게 그려낸 이 소설은, 문명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본능을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부유층의 모습을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며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굳이 따지자면 <풀의 죽음>은 <파리대왕>과 <하이라이즈>의 중간에 위치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진짜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야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걸까요? 흡사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진실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 같은 책을 들이댈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서로를 돕는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며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서 반드시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또한 이타적 본능에 대한 생물학의 이론을 이야기하며 이타적 행동이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최악의 상황에서 이기적인 행동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최악의 상황에서 야만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어쩌면 주류세력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 나오는 모습이 하나의 행동방식일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풀의 죽음>처럼 된다고 해서 반드시 <풀의 죽음> 속 주인공처럼 된다는 건 아닌거죠. 우리가 이런 가능성을 가슴에 품을 때 <풀의 죽음>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가능성의 소설이 됩니다. 아주 끔찍한 소설이 아니라. 저는 이 소설을 가능성의 소설로 읽을 때 책을 조금 더 자유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하나의 소설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다양한 소설을 읽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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