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총 6개의 단편 중 ‘반딧불이‘와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는 저자의 대표적인 장편 소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으로 그 스토리가 확장된다. 나머지 4개의 단편에선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동 저자의 작품인《도쿄기담집》처럼 다소 기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록된 작가의 말을 통해 하루키에게 단편이란 장편을 쓰기 위한 준비의 장(場)임과 동시에 장편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한 수단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로 저자의 에세이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백이 나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선문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개선문이라는 게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 그런지 책에 나온 이미지를 보면 굉장히 화려하고 웅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덤으로 본문의 설명을 통해 이 건축물과 관련된 히스토리도 간단하게나마 배울 수 있었다. 눈도 즐거웠고 세계사 관련 지식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어 유익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로마의 마지막 비기독교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272~337년)가 312년 밀비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자 세워졌으며, 팔라티노 언덕과 콜로세움의 중간, 당시 승리의 환호성을 올리던 군인들이 점령했던 비아 트리움팔리스에 자리 잡고 있다. 개선문은 영원히 남을 기념비로 세워지며, 정치적 파워의 과시로 보이기도 했다. 개선문 건축의 전통은 그후 수세기를 누리며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세운 파리의 개선문으로까지 이어진다. - P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 책은 동저자의 작품인 《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었다. 총 6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의 제목이자 가장 먼저 수록된 ‘반딧불이‘는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이름만 3인칭으로 대체되었을 뿐 《상실의 시대》와 99% 동일한 스토리였다. 개인적으론 《상실의 시대》를 최근에 읽었던 터라 마치 공부했던 내용을 복습하는 듯한 느낌으로 쭉 읽어나갈 수 있었다. 솔직히 굳이 다시 읽을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놓치고 지나간 세부적인 부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읽어보았다. 하지만 딱히 큰 차이를 느끼진 못했다.

뒤이어 등장하는 ‘헛간을 태우다‘ 부터가 본격적으로 새롭게 접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어떤 거창한 것보다는 그냥 이야기 중간중간에 저자가 심어놓은 메시지나 교훈 같은 것들을 잘 캐치해낼 수 있길 바래본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의 핵심은 단순함과 복잡함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에 끌리는 경향이라든지 혹은 자신에게 없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본능과도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러한 본능이 왜 생겨나는 것인지를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내 생각엔 상반되는 두 가지가 만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시너지‘같은 게 발생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 개방적이고 천진난만한 단순함이 모종의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단순함과 직면하면 자신들이 갖고 있는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문득 그곳에다 끼워맞춰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 P52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 P54

"아냐, 안 돼. 돈을 모아서 다시 와. 그러면"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 P64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곳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비와 같은 거죠. 비가 온다. 강이 넘친다. 무언가가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합니까? 보세요. 저는 절대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전 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 P68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시 존재?"
"즉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도쿄에도 있고, 동시에 튀니스에도 있다. 야단치는 것도 저고, 용서하는 것도 접니다. 이를테면 그런 겁니다. 그런 균형이 있는 거죠. 그런 균형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물림쇠 같은 겁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스르르 풀어져서 말 그대로 조각조각이 날 겁니다.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의 동시 존재가 가능해지죠."
"즉 자네가 헛간을 태우는 건 도덕적으로 마땅한 행위라는 뜻인가?"
"정확하게는 아니죠. 그건 도덕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 P69

나는 내 몸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관념으로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동시 존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하는 내가 있고, 그 생각하는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다. 시간은 매우 정밀하게 폴리리듬을 새기고 있었다. - P70

가끔은 그가 내가 헛간을 태우게 만드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헛간을 태운다는 이미지를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나서,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넣듯이 그것을 점점 부풀려가는 것이다. 솔직히 가끔 나는 그가 태우기를 가만히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성냥을 그어 태워버리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낡아빠진 헛간이었으니까. - P75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84

"시계는 비싸다고 정확한 게 아니구나." - P85

"진짜 아픔보다 아픈 걸 상상하는 게 더 고통스러워." - P97

"그래, 아픔이라는 것은 가장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니까." - P98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정말로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 P99

암이란 요컨대 그 사람이 평소에 살아가는 방식이 응축된 거야 - P120

"의사들은 모두 똑같아. 어느 병원이고 다. 원인을 모르는 게 있으면 뭐든지 남한테 떠넘겨, 귓속을 살펴보고 엑스레이를 찍고 반응을 측정하고 뇌파를 살펴보고, 그래도 별 이상이 없으면 결국은 모두 내 탓으로 돌려버려. 귀에는 결함이 없으니 내 쪽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태껏 그래왔어. 그래서 모두 나를 비난하게 된 거야." - P121

‘괜찮습니다. 각하가 인디언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실제로 인디언이 없다는 얘기니까요.‘ - P125

"누구의 눈에나 보이는 것은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가." - P125

"그럴까?" 사촌동생이 말했다.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귀 때문에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을 때마다 난 언제나 그 영화(리오그란데의 요새)의 장면을 떠올려. ‘인디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인디언이 없다는 얘깁니다‘라고 말하는." - P125

"정해져 있거든." 난쟁이는 말했다. "이제 누구도 그걸 바꿀수는 없어. 그러니까 너랑 나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 P137

"모두 나이를 먹어. 자네도 역시 곧 나처럼 될 거야. 기대하게나." - P145

하긴 뭐, 꿈속에서는 여러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다. - P157

"가르쳐줄 수도 있지." 난쟁이가 말했다. "하지만 하루이틀 배워봐야 소용없어. 매일 꼬박 배워도 최소한 반년은 해야 해. 그정도 연습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춤을 출 수 없어." - P158

만약 내가 하나의 꿈을 위해 다른 꿈을 이용하고 있는거라면, 진정한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 P164

그러나 극히 한순간의 일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원래의 아름다운 여자와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 P169

아닌 게 아니라 사람은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 P204

책 제목을 짓는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 P211

내게 단편이라는 포맷은 다양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점검하고 시도해보기 위한, 이른바 테스트 코스같은 장이었다. - P212

단편소설이란 아무리 용을 써도 장편은 되지 못할 소재를 유효하게 활용하기 위한, 혹은 짧은 형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심상 등을 나타내기 위한 그릇이기도 하다. 그래서 숨가쁘게 장편을 하나 써내고 나면 한동안은 느긋하게 단편을 쓰고 싶어진다. 장편에서 채 쓰지 못한 것을 단편으로 써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 P212

미국인이 헛간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것은 크고 위풍당당한 헛간barn이다. 그러나 내가 헛간이라는 말에서 떠올린 것은 밭 한구석에 서 있는 작고 허름한 가건물이다. 포크너가 ‘헛간을 태우다‘라는 말로 표현한, 하늘까지 불길을 뻗치는 장려한 배덕감이 여기서는 남들 몰래 헛간을 태워 없애는 조용한 음산함에 그친다. 마음 한구석에서 가만히 타오르다 무너져버리는 그런 헛간이다. - P215

내 기억에 따르면 우선 ‘꿈에 난쟁이가 나타나 나더러 춤을 추지 않겠느냐고 했다‘라는 한 줄을 쓰면서 시작된 것 같다. 즉 피아니스트가 도입부 네 소절을 피아노 건반으로 통통 쳐보다가 하나의 곡으로 발전해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 P216

독일이라는 나라에는 확실히 뭔가 농후한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흩트리는 어떤 것. - P2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댄스 댄스 댄스 -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단 현실과 비현실(환상),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이야기를 써내려간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개인적으론 수많은 에피소드들 속에 담긴 의미나 그것들이 암시하는 바를 나름대로 추론해가며 읽는 맛이 있었다. 그리고 본문을 통해 상실감이라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수없이 경험하면서, 평범하게만 느껴졌던 내 현실과 일상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닌 굉장히 소중한 것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었던 《상실의 시대》에서도 그렇고 오늘 읽는 이 《댄스 댄스 댄스》에서도 그렇고 일관되게 나오는 감정이 있는데 그건 바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마도 이 작품을 쓰던 시기에 저자가 갖고 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일정부분 투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레 해보게 된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도 어김없이 이러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나온다. 주인공인 화자는 자신이 호감을 갖고 만났던 돌핀 호텔의 프런트 직원인 유미요시라는 사람과 통화를 하는데, 자신이 예전에 꿨던 어떤 불길한 꿈(?)으로 인해 그녀를 만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 이와 관련된 단서들이 몇 가지 등장한다)

비단 이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들이나 혹은 실생활에서도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행동에 굉장히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와 관련된 생각들이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은지라 이와 관련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섣불리 쓰지 못하고 있는데, 향후에 기회가 된다면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써보고 싶다.

"우리는 자꾸 이동해 가고 있어. 그리고 이동해 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우리 주위에 있는 여러 가지가 사라져 간다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무엇 하나 머물러 있지 않아. 의식 속에는 머물러 있지. 하지만 이 현실 세계로부터 사라져 가는 거야. 나는 그게 걱정이야." - P350

"꽤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현실로 돌아왔어. 여러 가지 기묘한 것들 속을 통과해 왔어. 여러 사람이 죽었어. 여러 가지 것을 상실했지. 굉장히 혼란해졌는데, 그 혼란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냐. 아마 혼란은 혼란스러운 대로 존속되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느껴. 나는 이로써 한 바퀴 돌았다는걸. 그리고 여기는 현실이야. 나는 한 바퀴 도는 동안 기진맥진해서 녹초가 되어 있었어. 하지만 어떻게든 계속 춤을 추었지. 제대로 스텝을 밟았어. 그래서 이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 P355

"정해져 있어. 정해져 있는 것을 나는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싶지 않아. 그렇게 하다 보면, 거기에 있는 중요한 뭔가가 깨져 버리기 때문이야.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 P356

그 따스함이나 무게나 떨림은 정말로 현실의 것이었다. - P357

그것은 연기고, 화면 위에서 노니는 빛의 이동이며, 한 세계로부터 또 하나의 세계로 빠져나가는 그림자였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이건 현실이다. 어쩜. - P357

"그러니까 정해져 있었던 거야"라고 나는 말했다. - P359

"나는 이 장소가 좋아. 여기는 당신의 장소인 동시에 내 장소이기도 하거든." - P361

그렇다.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문장. 시나 소설이나 자서전, 편지 나부랭이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단순한 문장. 주문도 마감도 없는 단순한 문장. - P363

"귀를 기울이면 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뚫어지게 바라보면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그 대상물이 보여." - P367

그래, 여기가 내 연결 지점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여기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것은 현실이다. 괜찮아, 이제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나는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음매를 회복하고, 그리고 현실과 이어져 있다. 내가 그것을 바라고, 양 사나이가 그것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 P368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려웠다. 그건 어떤 이유도 통하지 않는 근원적인 공포였다. 유전자에 새겨지고, 태고의 시대부터 면면히 전해 내려온 공포였다. 어둠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두렵고 꺼림칙한 것이다. 그건 사람을 몽땅 삼켜 버리거나, 그 존재를 일그러뜨리고 파괴하거나, 소멸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대체 누가 완전한 어둠 속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어둠의 존재 이유ㅡ대체 누가 그런 것을 믿겠는가?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게 쉽게 일그러지고, 뒤바뀌며 소멸되어 버린다. 그리고 어둠의 논리인 허무가 모든 걸 뒤덮어 버리는 것이다. - P370

"무섭지 않아. 이번에는 내가 함께 있어. 서로 손을 잡고 있자. 손을 놓지 않으면 괜찮아. 어떤 일이 있어도 손을 놓으면 안 돼. 가만히 붙잡고 있는 거야." - P371

"아니, 나는 걱정이 돼. 저리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그가 어떤 이유로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또 우리를 이 세계로 연결시킨 거야." - P372

"가자. 손을 꼭 잡고 있는 거야. 나는 당신을 원하고 있고 당신은 나를 원하고 있어.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여기 머무는 거야. 어디에도 가지 않아. 분명히 돌아갈 수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 P373

우리는 어둠 속에서 이어져 있었다. - P373

양 사나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혹시 죽어 버린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때, 그는 몹시 피로하고 훨씬 더 늙어 보였다. 그대로 죽어 버렸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굉장히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그 역시 늙어 간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는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만일 그가 죽어 버렸다면, 이제 누가 이 세계와 나를 연결시켜 줄 것인가? 누가 나를 이어 준단 말인가. - P373

"양 사나이가 이 세계를 관리하고 있어. 여기가 이음매 같은 곳인데, 그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를 이어 주고 있어. 전화의 배전반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그는 양의 모피를 입고 오래전부터 계속 살아왔어. 그리고 여기에 머문거야. 세상의 모든 것이 싫어서."
"무엇 때문에 숨어 있어?"
"무엇 때문일까? 전쟁이 싫어서, 문명이 싫어서, 법률이 싫어서, 시스템이 싫어서... 양 사나이답지 않은 세상의 모든 것이 싫어서." - P374

나는 세계의 끝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대인이 생각한 세계의 끝. 모든 게 폭포처럼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 듯한 세계의 끝이다. 그 끝부분에 우리는 서 있다. 단둘이서. 우리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암흑의 허무가 펼쳐져 있을 뿐이다. 방의 공기는 뼈에 스며들듯이 차가웠다.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을 통해 겨우 따스함을 나누고 있었다. - P375

"어두운 데서 안 좋은 일을 생각하면 안 돼. 되도록 좋은 쪽으로 생각해" - P375

"간단한 것처럼 보여. 하지만 그쪽으로 가버리면 다시 돌아올 수 없어. 당신은 그걸 모르고 있어. 거기는 아니야. 거기는 현실이 아니라고. 거긴 저쪽 세계야. 이쪽 세계와는 다른 곳이라고." - P377

나와 유미요시는 이쪽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걸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왔다. 나는 그걸 위해 복잡한 스텝을 밟으면서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 P378

나는 유미요시를 쫓아 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미요시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키키가 벽으로 빨려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벽을 빠져나갔다.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불투명한 공기의 층. 매끄럽고 딱딱한 감촉. 물과도 같은 차가움. 시간이 흔들리고, 연속성이 구부러지고, 중력이 뒤흔들렸다. 태고의 기억이 시간의 심연 속에서 증기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내 유전자다. 나는 자신의 육체 속에서 진화의 기운을 느꼈다. 나는 복잡하게 뒤얽힌 나 자신의 DNA를 뛰어넘었다. 지구가 팽창하고, 그리고 냉각되어 오므라들었다. 동굴 속에 양이 숨어 있었다. 바다는 거대한 사념인데, 그 표면으로 소리도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파도가 밀어닥치는 물가에 서서 앞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 P378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이 거대한 실 덩어리가 되어 하늘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허무가 사람들을 삼키고, 그보다 더 거대한 허무가 그 허무를 삼켰다. 사람들의 살이 녹아 백골이 드러나고, 그것도 티끌이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아주 완전히 죽어 있다, 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어쩜,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내 살은 분해되어 날려가고, 그리고 또 하나로 응결됐다. - P379

"무엇이든 진지하게 보려고 하면 어둠 속에서도 제대로 보이는가 봐." - P380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는 취약하고 그리고 위태롭다. 이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간단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 P381

나는 상실된 것을 위해 울고, 아직 상실되지 않은 것을 위해 울었다. - P382

시간이 현실을 새기고 있었다. - P382

현실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여기에 머무는 것이다. - P382

말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고 표현이 있다. - P383

춤을 춘다는 것은 음악과 분위기에 잘 맞추고, 파트너의 발을 밟지 않도록 신경 쓰고, 다른 커플들과 부딪치지 않게 하는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춤을 춘다는 것은 ‘나‘ 자신이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새로이 정립해 나가는 적극적인 행동의 비유임을 알 수 있다. - P389

‘나‘의 ‘재생‘을 위해서는 ‘나‘의 ‘죽음‘이 불가피했다 - P390

‘상실감‘과 ‘절망‘과 같은 삶에 있어서의 부정적인 부분을 뚫고 나옴으로써, 사람은 누구나 ‘재생‘이랄 수 있는 재출발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 P3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