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초반부를 읽고 있는데, 아직 각각의 인물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까지 살펴본건 아니지만 예상외로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았다. 내 나름대로 정리해서 하나씩 적어보자면 일단 이 책의 화자는 이정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통해 추론해보니 소설 속 인물임과 동시에 저자의 분신같다는 생각도 들게 하는 인물이었다. 실제 저자의 인적사항과 관련된 내용이 본문에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화자의 친구이자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인 서인주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어릴 때 나름 유복한 가정(아버지가 의사였다고 한다)에서 자랐으나 어떤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이어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자라게 된다. 근데 소설을 읽다보니 이 외삼촌(이동주)도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뭔진 몰라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서인주는 결혼을 해서 민서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또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결혼 후 얼마지나지 않아 남편과 이혼을 해서 별거를 한다. 남편(정선규)은 과거에 건축사무소를 운영했다고 하는데, 이혼 후에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민을 간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소설의 또다른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미술정신‘이라는 잡지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나온다. 여기서 미술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이유는 서인주와 서인주의 외삼촌(이동주)이 그림을 그렸던 것과 관련이 있다.

소설속에서 서인주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녀 혹은 그녀의 외삼촌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미술작품에 대해 강석원이 평론같은 것을 썼다. 그런데, 강석원이 쓴 글을 읽은 서인주의 친구이자 이 책의 화자인 이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강석원이 쓴 글의 내용에 차이가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를 직접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눈다.

뭐 여기서 그들의 자세한 대화 내용까지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대화의 분위기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뭔가 어두침침하고 담담하면서도 긴장감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다. 아직 소설의 초반부라 뒤에 나오는 내용이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동안은 비슷하게 이어질 듯하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 책의 화자인 이정희가 남긴 말인데, 이는 소설 속 인물의 말임과 동시에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밑줄쳐보았다. 맨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다고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별도의 종이에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도를 간단하게 끄적여보면서 본문을 읽어나갔는데, 이렇게 읽다보니 내 머릿속도 고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뒤범벅되어 읽어나가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지만 큰 흐름을 놓치지 않고 한 번 잘 따라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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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읽다보면 우주와 관련된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칼 세이건 저자의《코스모스》를 통해 우주와 관련된 내용들을 조금이나마 읽어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과학 분야에 완전 무지했던 나였기에 본문을 읽을 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무지 힘들었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그 때 그렇게 고생스럽게 읽었던 내용들이 오늘 이 소설을 읽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만약 내가 과거에 《코스모스》를 읽지 않고 지금 이 소설을 읽었다면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거나 혹은 설령 읽더라도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 같다.

이런 경험을 통해 고생이라는 걸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의 의미가 오늘따라 더 깊이있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고생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고요하지 않은 것은 내 기억들뿐이다. - P50

자명종 시계의 야광 바늘은 완고하게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각에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면 원수일 것이다. 밤새 뒤척이며 모욕을 곱씹은 자. 돌려받아야 할 전 재산 때문에 눈이 뒤집힌 자. 빼앗긴 애인 때문에 죽거나 죽이기를 결단한 자. - P51

말해봐. 뭐가 당신을 잠 못 이루게 하는지, 어떤 죄, 어떤 후회인지. - P51

침묵은 이미 깨어졌다. 다시 울릴지 모르는 휴대폰을 옆에 두고 나는 호주의 국가번호와 지역번호 일곱 자리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들여다본다. - P51

어둠은 무겁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허물처럼 가벼운 어둠의 속을 더듬어 옷장의 손잡이를 찾는다. - P51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 P52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 P53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 P53

달리고 있으면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져 - P54

늙어가는 사람은 점점 어린아이 같아진다 - P55

한 번의 획에 모든 걸 담아봐 - P55

네가 경험한 모든 것이 한 번의 획에 필요하다고 생각해봐. 자연, 너를 키운 사람, 기르다 죽은 개, 네가 먹어온 음식들, 걸어 다닌 길들...... 그 모든 게 네 속에 있다고. 네가 쥔 붓을 통과해 한 획을 긋는 사람은, 바로 그 풍만한 경험과 감정과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 P56

내가 풍만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 호흡을 참으며 선 하나를 그었을 때, 내 몸속에 미처 몰랐던 공간이 있었던 것을 알았다. 그 안에 숱한 요철과 구멍들이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을 알았다. 잠자코 선을 그어가는 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소한 일들이 떠올랐다가 이내 침묵에 씻겨 사라졌다. - P56

꿈속에서 흰 새는 아무렇지도 않게 울었다. 그저 자신의 일이라는 듯이, 자신의 본성일 뿐이라는 듯이. 구슬프지도 처절하지도 않게 우는 동안 새의 머리에서 흰빛이 빠져나갔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그저 담담히 중력의 법칙을 따르는 듯, 안 보이는 시간의 결을 어루만지는 듯 조용히. - P56

인주와 삼촌, 그들이 그린 그림ㅡ그것들이 내가 쓰려는 전부다. 단지 그들이 내 기억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냄새, 소리, 색깔 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불려나오는 것뿐이다. - P57

잘 숨을 수 있을까.
얼굴도, 목소리도, 발자국도 없이 이 부서진 조각들 사이를 아슬아슬한 난간들을 짚고 갈 수 있을까. - P57

삼촌이 그랬듯이 인주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고요한 푸른빛을. 푸른 시간을, 밤의 비밀과 낮의 명료함이 맞바뀌는 지진 같은 떨림을. 피와 뼈까지 파랗게 배어드는 서늘함을 잠든 사람들의 체온이 가장 내려가는 순간. 지표면이 가장 차가워지는 이 순간. - P57

아무렇지 않은 네가 걸어 나온다. 어둠보다 어둡게, 박명을 등지고 걸어 나온다. 이상하다. 아니, 당연하다. 얼굴에 눈물이 없다. 흐르는 피도 말라붙은 피도 없다. 너를 지나쳐서 나는 걷는다. 눈을 닫고 걷는다. 입을 닥치고 걷는다. - P58

우주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우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천체들의 나이로 미루어 약 150억 년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우리 은하에는 수십만 개의 별들이 공처럼 뭉친 구상성단들이 있는데, 이들의 나이는 모두 100억 년이 넘는다. 그러나 150억 년보다 더 늙은 천체는 찾아볼 수 없다. - P61

비록 우주 공간이 무한하다 해도,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도 유한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그 대상에서 나온 빛을 느껴 안다는 것이다. 이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빛이 150억 년간 달려온 거리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별을 볼 수 없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는 약 390억 광년으로 한정된다. 이것이 우주의 지평선이다. 그 너머의 별들이 낸 빛은 미래에 우리에게 도달할 것이다. - P61

천체물리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시간과 공간이 같은 것을 말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멀리서 반짝이는 별은 오랜 과거의 별이며, 이미 존재하지 않는 별일 수도 있다. 더 멀리 볼수록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주의 지평선은 그렇게 우리가 멀리 볼 수 있는 한계, 더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오를 수 있는 한계다. 그것이 없다면 우주가 태어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 P61

그러니까, 혹시...... 이 우주의 물질은 원래 하나인 거예요? 같은 중성자가 어떻게 양자와 결합했느냐에 따라 수소, 탄소………… 그런 게 되는 거예요? 이 종이랑 담벼락이랑 사람의 몸이랑 물이랑...... 이 모든 게?
그렇지.
삼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같은 구슬을 이렇게 묶느냐 저렇게 묶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 P62

나의 몸과 그의 몸이 같은 물질, 같은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절실하게 느껴졌다. - P62

그런데, 그 알갱이는 거의 비어 있다고, 이 책에는..
그렇지.
그러니까. E=mc²이란 말은.....
비어 있다고 해서 그게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고,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거지. 네가 말한 건 에너지가 곧 물질이라는 등식이니까.
수증기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물이 되고 얼음이 되는 것처럼요?
적절한 예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슷해. - P62

그러니까, 여러 조건들, 시간까지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이있다면 이 세상은...... 한 점인 거네요. 빅뱅 이전의 한 점, 아니, 점도 아닌,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우리가 산다는 건...... - P62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풍화되는 대지와 마르는 강물, 폭발하는 별들이 스쳐간 것을. 모든 것이 하나로 꿰어지는 순간의 격렬함을 경험한 것을. 슬픔도 고통도, 그렇다고 기쁨도 아닌 그 순간을. - P62

당신의 손의 원소가 내 손의 원소와 같다는 것을 간절하게 실감했기 때문이라고. 아니, 모르겠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다. 당신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도 단언할 수 없다. 모른다고밖에는 모든 것이 덩어리로 다가왔다고밖에는. 스며들고 번져갔다고밖에는. 당신의 그림 속에 떨고 있던 모세혈관들처럼. - P63

먼저 고백해야만 한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내 눈물을 믿지 않는다고.
내 진실을 믿지 않는다고.
내 기억을, 고통을 믿지 않는다고. - P63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특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 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 P64

밥부터 먹고,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해. - P65

모든 것이 수축되는 한 점에서, 시간과 공간, 물질과 비물질이 하나가 된 그 점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죽은 적도 태어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 P67

이 모든 말들은 궤변에 불과하다. - P67

몹시 차가운 것은 첫 순간 뜨겁게 느껴진다. - P68

그 시절의 수학 시간에 결코 이해해낼 수 없었던 숫자들이 있다.
0과 무한.
어떤 숫자든 0을 곱하면 블랙홀에 빨려든 듯 0이 되고, 0으로 나누면 반대로 무한이 된다. - P69

가령 3이라는 숫자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0을 생각하고 있자면, 서로를 끝없이 비춰주는 어두운 거울들을 지켜보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 P69

우주가 태어났다는 것은 0이 스스로 무한이 되었다는 걸 뜻한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우주 공간 속에서 0이 끝없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는 뜻이다. - P69

우주의 비어 있는 공간을 0이라고 생각하니까 혼란스러운 것 아닐까? - P70

아마 물고기는 물이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서도 허공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허공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아. 바람이 불고, 벼락이 치고, 강한 압력으로 우리 몸을 누르지.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 더 높은 차원의 눈으로 우주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거야. - P70

삼촌의 책장에서 빌려간 딱딱한 책들을 건빵처럼 입속에서 불려 읽던 그 가을, 때로 나는 막막하게 되새겨보곤 했다. 내가 굳건히 딛고 걸어가는 땅이, 실은 전속력으로 회전하는 전자들이 결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핵과 전자들 사이의 공간은 소금 알갱이들이 흩어진 커다란 성당만큼이나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삼촌과 함께 있을 때 그것은 자연스러운 기적, 또렷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에서부터 이미 나는 더 믿을 수 없었다. 0이 변한 텅 빈 무한 속에서 0을 딛고 걸어가는 0, 그것이 바로 나라니. 그 몸속에서 이토록 고통스럽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붉고 더운 피를 쉴 새 없이 뿜어내고 있다니. - P71

가끔은 부드럽고도 무정하게 말했다.
이 선은 죽었구나.
‘죽었다‘는 말이 엄하고 예리한 날로 가슴을 긋는 것 같아, 나는 귓불을 붉힌 채 주먹으로 심장께를 문질렀다. - P71

그래, 안 될 때는 쉬어야지. - P72

왜 그렇게 오래 그 그림을 들여다보았는지 나는 모른다. 볼수록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화면에는 사람 하나, 짐승 하나, 발자국 하나 없다. 거대한 바위들은 곧 허공에서 얼어붙고 말 불길처럼 단단하게 타오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림을 읽으면 꿈속의 꿈으로 걸어들어가 마침내 복사나무 숲을 만나게 되고, 당시의 독법으로ㅡ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ㅡ복사나무 숲을 빠져나와 현실의 벌판에 다다르게 된다. 가파른 협곡이 세로질러 삼킨 길, 화면 왼편의 먼 복사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나는 마치 꿈의 마지막 순간인 듯 거슬러 더듬어가보곤 했다. - P73

안견은 왜 꿈의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부분을 그렸을까. 어떤 어두운 예감의 힘으로 꿈꾼 사람의 앞일을 그림에 담았던 걸까. 꿈을 꾼지 칠 년 뒤, 안평은 서른일곱의 나이에 친형 수양이 내린 사약을 받고 유배지 강화에서 죽었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글씨, 남다른 감각으로 수집한 수백 점의 서화들, 재주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재동 집의 풍류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경계를 넘어갔다. - P74

마지막 방에 전시된 몽유도원도 앞에 다다랐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면 오른쪽에 무리 지어 선 복숭아나무들이었다. 비단에 그린 그림이니 물감들은 옷감과 함께 오랜 시간 퇴색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 그렸을 때는 얼마나 선명한 붉은 꽃들이었을까. - P74

삼촌이 들려주었던 인면도화(人面桃花)라는 말을 기억했다. 복숭아꽃처럼 어여쁜 얼굴이라는 뜻ㅡ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하면 그리움 때문에 얼굴이 아름답게 기억된다는 뜻이다. 그 그림의 복사꽃에는 어떤 귀기도, 농염함도 없었다. 그저 다시 못 볼 사람의 얼귤, 누구의 생시에도 얼비치지 않을 꿈으로 늙은 비단 위에 무리 지어 피어 있었을 뿐이다. - P74

이 선은 죽었구나.
온화한 그 온화함 때문에 도리어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그는 나무라곤 했다. 죽은 선을 그은 나는, 그 선을 긋는 동안 죽어 있었던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살아 있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두려움과 고통이 뒤섞인, 가장 끔찍하고 가장 달콤한 순간이 파르스름하게 흔들리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외면했다. - P75

알고 있었어, 라고 인주는 말했다.
두 사람, 다 알고 있었어.
인주는 무엇을, 어디까지 알았을까. 얼마나 어렵고 더딘 시작이었는지. 마지막 열흘 동안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워했고, 얼마나 서슴없었는지. 서로의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아 새들이 가슴털을 비비듯이, 불꽃이 당겨질 때까지 떨리는 손으로 성냥을 긋듯이, 어두운 방 가운데에서 어깨를 웅크린 채 수없이 입술을 포개었는지. - P75

때로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단 한 번도 믿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이 태어났다는 것을. 격렬히 고동치던 그 심장들이 실은 텅 빈 것이었다는 것을. 마른 입술, 두려워하는 손, 갓 꺼낸 밀빵 껍질같이 달아오른 네 개의 뺨조차, 어두운 꿈의 마지막 순간처럼 영원히 없는 것, 사라지기 전에 이미 없던 것, 없던 것이었다는 것을. - P76

일어서.
소리치지마.
참아.
다리를 끌지 마. 멈추지 마.
아픈 데를 만지지 마.
그래. 계속 걸어가.
너는 괜찮아. - P79

무엇이든 견딘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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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세상에는 상반된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서 반대말도 많다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유독 중력만큼은 반대 개념이 없다는 말을 했었다. 일반적으로 중력이라고 하면 인력 즉 잡아당기는 힘만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오늘 시작하는 본문에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을 깨부수는 얘기가 나온다. 바로 중력이 밀어내는 쪽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근거한 것인데, 이어지는 본문 내용을 통해 그 원리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아보면 좋을 듯하다.

그(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밀어내는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 옛날 뉴턴은 밀어내는 중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우리도 그런 힘을 겪은 적이 없지만,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에 의하면 별이나 행성처럼 질량이 뭉쳐 있는 천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잡아당기는 중력을 행사하지만,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중력이 물체를 밀어낼 수도 있다. - P81

‘밀어내는 중력을 도입하면 우주의 오랜 미스터리가 풀린다‘ - P81

아인슈타인의 우주는 팽창하는 우주를 허용하고 있으며,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관측 데이터는 이것이 사실임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그렇다면 140억 년 전에 대체 어떤 힘이 팽창을 유발했을까? - P81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거스Alan Guth는 공간이 ‘우주 연료 cosmic fuel‘라는 특별한 물질로 가득 차 있고, 그안에 포함된 에너지가 별이나 행성처럼 특정 지역에 집중되지 않고 공간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면, 중력이 밀어내는 쪽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지름이 10억 × 10억 × 10억분의 1미터밖에 안 되는 작디작은 영역에 특별한 형태의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있고(이것을 인플라톤 inflaton이라 한다. 급속 팽창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오타가 아니다!), 이 에너지가 욕실의 수증기처럼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으면, 밀어내는 중력이 폭발적으로 작용하여 순식간에 현재의 관측 가능한 우주만큼 팽창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밀어내는 중력이 빅뱅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다. - P82

본문에 언급된 ‘우주 연료(cosmic fuel)‘는 스칼라장(scalar field)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전기장이나 자기장은 공간의 모든 점에 벡터가 할당되지만(벡터의 길이와 방향이 해당 위치에서 장의 세기와 방향을 나타낸다), 스칼라장은 각 점에 하나의 값만 할당된다(이 값으로부터 장의 에너지와 압력이 결정된다). 거스의 원조 논문과 그 후에 발표된 후속 논문들은 우주론의 심각한 장애물이었던 자기홀극문제(monopole problem)와 지평선문제 (horizon problem), 그리고 편평성문제(flatness problem)를 일거에 해결했다.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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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태도가 가장 강력하다
손서율 지음 / 채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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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삶에서 직접 경험하고 거기서 느꼈던 점들을 다양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인간관계에 관한 꿀팁들, 저자만의 마인드컨트롤 방법, 스트레스 해소법 등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을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 상황에 맞게 잘 적용한다면 삶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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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의 소제목은 <자신감 특효약 ‘난년 주문법‘> 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제목을 딱 봤을 때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잠깐 어리둥절했었는데, 본문에 나온 저자의 설명을 통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추가로 하나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는 저자가 여성이기에 ‘난년‘이라고 썼지만, 이 책의 독자분들 중에 남성분들이 계시다면 ‘난년‘을 ‘난놈‘으로 바꾸면 그 의미가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기서의 핵심은 ‘나는 난년이야‘ , ‘나는 난놈이야‘ 같은 말이 어떤 중대한 일을 앞둔 상황에서 자기 내면에 있는 부담감을 덜어줌과 동시에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겐 사소해보일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마인드컨트롤을 위한 좋은 꿀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대한 일을 앞두고 심적인 부담감이 몰려올 때 "나는 난년이야."라고 되뇌면 특효약처럼 마인드 컨트롤에 효과가 빨랐다. - P170

"나는 할 수 있다." 이 말은 아직 하기 전인 상태로 인지되지만 "나는 난년이다." 이 말은 이미 나는 난년이라서 당연히 해낼 수 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P171

우울함이라는 감정은 오래 품고 있을수록 비슷한 부류의 감정들을 끌어당기는데 슬픔, 외로움, 무기력함, 자격지심, 그리고 또다시 우울함. 도돌이표처럼 돌고 도는 부정적인 감정은 에너지로 변환되어 안 좋은 일들까지 끌어당겼다. - P173

‘긍정적인 마음도 운동처럼 꾸준하게 단련해야 습관이 될 수 있다‘ - P174

우리의 감정은 마치 고장 난 TV처럼 수시로 화면이 바뀌는데 부정적인 화면이 나오면 즉시 채널을 돌려야 한다 - P174

코어 운동을 꾸준히 하면 코어 근육이 척추와 골반을 바르게 잡아 주어 굽은 몸의 형태가 올곧게서는 것처럼 마음도 꾸준하게 트레이닝을 해 줘야 긍정적인 마음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힘이 생기며 휘어 있던 내면도 올곧아진다. - P175

인생의 대부분은 아무 이벤트 없는 평범한 하루로 이뤄져 있다. 이런 일상 속에서도 틈틈이 사소한 행복을 넣어 줘야 풍요로운 하루를 만들 수 있고 그 하루들이 모여 행복한 인생을 만든다.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자. - P176

일상의 소확행 리스트를 실천할 때마다 기쁨을 최대한 확대해서 느껴야 한다. 우울함과 부정적인 감정은 축소하고, 행복은 작고 사소하더라도 최대한 확대하는 연습을 한다. - P177

우리가 내뱉는 문장과 단어들 속에는 파동 에너지라는 게 있는데 이 에너지는 우리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뿐만 아니라 뒤이어 불러일으키는 사건까지 영향을 끼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 P178

우리는 무의식중에 수많은 말들을 내뱉고 살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 일일이 컨트롤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럴 때는 "감사합니다."라는 문장을 습관처럼 자주 이야기하면 컨트롤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감사합니다."만큼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 문장은 없기 때문이다. - P178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생각의 회로도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고 입 밖으로 내뱉는 말들도 긍정문이 되어 좋은 파동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 P179

아름답고 행복한 영상만 보고 살기에도 짧은 인생 - P179

사람은 마음가짐에 따라 천국에서 살 수도 있고 지옥에서 살 수도 있다. 겉으로 크게 문제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도 마음의 힘을 잃으면 끝없는 지옥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 P179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게 정상이에요? 다 안 이루어지는 게 정상이에요? 다 안 이루어지는 게 정상이지요. 근데 우리는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질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뜻대로 안되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에요. 세상이 내 뜻대로 돼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 P192

"이 세상일이라는 거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괴로워할 일이 아니에요. 안 되면 ‘어, 안 됐구나‘ 이러면 돼요. 그래도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 한 번 더 하면 돼요. 그런데 두 번 할 힘이 없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 그만두면 돼요. 그래도 미련이 남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 한 번 더 하면 돼요. 두 번 해도 안 되면 어떻게 하면 된다? 그만두면 돼요. 그래도 미련이 남으면? 한 번 더 해 보면 되는 거예요. 괴로워하지 말고!" - P193

"그래, 세상이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겠어. 지금은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잠시 그만두지만 다시 미련이 생기는 날 한 번 더 해 보겠어!" - P193

"안 되는 건 정상이야, 잘못된 게 아니야. 기운 날 때 또 해 보자 괴로워하지 말고!" - P194

"진짜 인연은 걸리는 게 없이 술술 풀려. 혹여나 장애물이 생긴다고 해도 금방 극복하게 되어 있어." - P199

간발의 차이라도 약간의 오차가 생긴다면 최종적으로 인연이 되지 못한다. 결국 그 기회는 애초부터 나와의 인연이 아니었던 거다. 내 자리가 아니었고, 내 사람이 아니었고, 내 돈이 아니었던거다. 하지만 반대로 그 어려운 확률과 변수들을 모두 초월하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조건이 모두 맞아떨어지며 복잡한 내 인생의 퍼즐에 정확히 끼워 맞춰지는 기적 같은 기회들도 있다. 이 기회들이 내가 말하는 진짜 인연이다. - P202

진짜 인연은 언제 불쑥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절망을 견뎌 내며 꾸준하게 노력을 유지해야 찾아오는데 마치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 같이 꽁꽁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고 또 풀다 지치면 잠시 쉬고, 다시 힘을 내서 또 풀다 보면 언젠간 실타래의 끄트머리 부분이 내 엄지와 검지 사이로 쏙 들어오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 끝을 쭈욱 잡아당기면 그간의 고생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한순간에 실타래가 술술술 풀려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 P202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 발에 꼭 맞는 유리구두와 같은 진짜 인연이 찾아온다. - P202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요리하고 그 요리를 즐겁게 맛보는 과정은 정말로 영혼을 치유해 준다. - P207

양자물리학 이론에서는 우리가 과거라고 생각하는 지나온 시간도 다른 시공간에서는 현재의 시점으로 흘러가고 있다던데 - P218

현명한 사람들을 분석해 보니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그들은 짜증, 분노, 절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는 시간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빨랐다. 이렇게 빠른 시간 동안 감정 처리가 가능한 이유는 감정을 에너지라는 하나의 재화로 보기 때문이다. - P224

기쁨, 분노, 슬픔과 같은 다양한 감정은 마음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원재료로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매 순간 에너지를 한 곳에 선택하여 쓸 수밖에 없다. 분노와 기쁨을 동시에 느낄 수 없고 이성적인 사고와 감정적인 사고의 회로를 동시에 돌릴 수 없듯,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좀 더 투자가치 있는 쪽으로 선택해서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P225

실제 상황을 드라마라고 가정하는 방법 ...(중략)... 지금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다면, 비련의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벗어나 드라마의 관객이 된 것처럼 3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전체적인 화면을 볼 수 있는 ‘시야 확장 트레이닝‘을 꾸준히 해야 한다. - P226

자신의 상황을 3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트레이닝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통찰력이 생긴다. 그동안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던 감정의 늪에서 한결 자유로워지고 비로소 자신의 마음 에너지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이렇게 가장 효율적인 곳에 쓰인 에너지들이 매일매일 복리처럼 쌓여 누적되면 인생은 훨씬 풍요로워진다. - P227

"한두 끼 굶고, 비쩍 마르거나 한 끼 배불리 먹고 금세 표가 나는 것은 천한 짐승들의 일이다. 상황의 작은 변화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은 군자의 몸가짐이 아니다. 이랬다저랬다 감정의 기복이 잦은 것은 내면의 수양이 그만큼 부족한 탓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들뜨고 가라앉지 마라. 세상을 다 얻은 양 날뛰지도 말고, 세상이 다 끝난 듯 한숨 쉬지도 마라. 바람이 불어 흔들 수 있는 것은 표면의 물결뿐이다. 그 깊은 물속은 미동조차 않는다. 웅숭깊은 속내를 지녀 경박함을 끊어라." _다산 정약용 - P227

"구름 속에 가려진 진짜 인생을 보고 왔거든." - P231

우리는 명함이 ‘없는‘ 거고 그녀는 명함이 ‘필요 없는‘ 거였다 - P237

"사람은 그 사람만이 풍기는 고유의 향기가 있어야 해." - P239

나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고 있다 - P240

(왕대는 여왕벌이 될 알을 받아 벌이 될 때까지 기르는 벌집을 말한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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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한강 작가님의 책을 지난 달부터 몇 권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 소설《채식주의자》는 지난 달에 완독을 했고, 《여수의 사랑》, 《작별하지 않는다》는 첫 부분만 조금 읽다가 한동안 읽지 못해 손놓고 있다. 그리고《희랍어 시간》은 약 1/3정도 읽다가 잠시 쉬고 있는 상태다.

위에 적어놓은 작품들은 작가님이 쓴 수많은 작품들 중 일부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사이에서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꿈‘이라는 것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핵심 소재가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최근에 읽었던《채식주의자》에서도 어떤 꿈에서 본 이미지를 바탕으로 뒤에 나올 이야기들의 분위기를 어느정도 유추해볼 수 있었는데, 오는 읽기 시작한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도 꿈에서 본 이미지가 하나 등장한다. 물론 작가가 쓴 작품마다 꿈에서 본 이미지들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꿈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것이 허용되는 공간을 바탕으로 작가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하는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시도가 독자인 나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또한 꿈 속에 나타난 이미지들을 통해 이야기가 어디로든 흘러갈 수있는 자유가 있다는 점이 좋게 느껴졌다. 향후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연스럽게 유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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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읽다가 중간에 정확한 제목을 알 수 없는 어떤 책의 내용이 일부 인용된다. 인용된 내용을 보면 별의 탄생에 관한 것인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칼 세이건의《코스모스》가 생각났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그 책을 읽어내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완독을 하고나서 오늘처럼 이와 관련된 내용들을 접하다보니 별에 관한 일말의 지식도 없을 때보다는 확실히 낯선 감이 덜하다는 걸 몸소 느끼게 된다. 이를 통해 비록 사소할지라도 배경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체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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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후반부에서 ‘플랑크의 시간‘ 이라는 양자역학과 관련된 개념이 하나 소개되는데, 여기에 뒤어어지는 내용에서 개인적으로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동 저자의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서 만났던 ‘마크 로스코‘라는 화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저자의 작품에서 이 화가의 이름이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저자의 생일과 마크 로스코의 사망일이 약 9개월 가량 차이나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이게 무슨 상관인가 할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마크 로스코가 죽는 시점에 자기 자신이 부모의 씨로부터 이세상에 잉태되었다는 것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듯 보인다. 지구전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생명이 사라짐과 동시에 또다른 생명이 생겨나는 것이기에 어떤 생명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처음 접한 저자의 작품이 위에서 언급한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였는데, 거기서 어느정도 예습이 되어서인지 오늘 이 소설을 읽을 때는 그때보다는 좀 더 익숙한 것들이 많아진 듯하다. 저자만이 가진 감성과 어떤 느낌들을 시집을 통해 살짝 맛봤다면 이 소설을 통해 저자만이 가진 감성과 느낌들을 좀 더 깊이있게 경험하는 것 같다.

문득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꿈의 다른 정황은 흐릿해 잡히지 않고, 하얗고 목이 긴 새 한 마리가 마른 땅 위에 서 있던 것만 떠올랐다. 새가 우는 동안 새의 머리에서부터 흰 빛이 빠져나갔다. 내 눈앞에서 새의 목 아래까지 투명해졌다. 흰 날갯죽지로 덮인 몸뚱이 아랫부분과 가늘고 긴 두 개의 다리만 남았다. 이제 더 노래하면 완전히 투명해지겠구나, 생각하다 눈을 뜨자 깊은 밤이었다. - P7

후회하지 않을 거다. - P8

나는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미소 짓고 있었지만, 나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리잔을 들어 그의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을 수 있었다. 유리잔을 깨고 예리한 사금파리로 그의 목을 겨눌 수 있었다. - P14

인주는 언제나 자신의 그림 귀퉁이에 굵은 8B 연필로 구슬 주(珠) 자를 썼어요. 그 먹그림에 서명이 없는 건, 그걸 그린 사람이 그런 행위를 싫어했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완성해놓고도, 그게 자기가 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믿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 P15

태연한 거짓말들을 키보드에 두드려갔을, 지금 담배를 집고 있는 그의 축축하고 말랑말랑한 손가락들을 차례로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나는 말했다. - P15

기다리는 답신은 오지 않았다. 내가 보낸 메일의 수신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메일을 보낸 뒤 사흘 동안 나는 수없이 컴퓨터를 켰다 껐고, 그때마다 몸속에서 무엇인가가 함께 켜졌다가 캄캄해졌다. - P16

내가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침묵할 수 있는 공간과 약간의 돈을 갖기 위해서다. - P17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왔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 P17

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우리 은하와 같은 나선은하들의 원반에는 젊은 별들과 밝은 구름 덩어리들이 실들에 꿰어져 돌고 있는 듯한 모습의 나선팔들이 있다. 이 나선팔들에서 지금도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있다. - P17

이미 태어난 뜨거운 별에서 나오는 강한 빛이 주위의 물질을 밀어붙인다. 늙은 별이 터지며 나온 충격파가 주위에 있던 성간구름을 수축시킨다. 자극받은 성간구름은 계속 수축한다. 이 수축된 성간구름이 별이 되기 위해서는 구름의 질량이 일정한 값보다 커야 한다. 이것이 중력수축에 필요한 ‘진스의 임계질량‘이다. 구름의 질량이 임계질량을 넘어서는 순간 별의 일생이 시작된다. - P18

초신성이 폭발하면, 그 은하를 구성하는 10억 개의 별들의밝기를 합한 것만큼의 빛이 수일 동안 방출된다. 지구가 속한 은하에서 초신성이 폭발했던 15세기의 기록들은 밤마다 그 빛으로 책을 읽올 수 있을 정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 P18

흰 점 같은 별들 위로 거대하고 둥글게 퍼져나가는 불꽃을 나는 들여다본다. 붉으면서 푸르고, 희면서 검다. 죽음이면서 시작이다. 늙은 별이 폭발한 바로 그 에너지로, 희부연 성간구름들 속에서 새 별이 태어난다. - P18

나를 놓고 싶지 않다. 지금은 나를 놓아서는 안 된다. - P17

......인간에게는 느껴지지 않지만 지구는 하루에 한 바퀴씩, 멈추지 않는 팽이처럼 돈다. 적도 위에 있는 사람은 초속 460미터로 지축 둘레를 회전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동시에 지구는 한 해에 한 바퀴씩, 초속 3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인간이 만든 어떤 로켓보다 빠르게 지구는 우주 공간을 날아가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천체들은 이와 같은 숙명적인 반복운동을 하고 있다. - P19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 태양 역시 우리 은하의 중심을 축으로 공전한다. 태양의 공전 속도는 초속 250킬로미터다. 우리 은하에는 별들이 1천억 개쯤 있는데, 원반에 있는 별들은 모두 태양과 비슷한 속력으로, 같은 시계 방향으로 공전한다.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으로부터 8천 파섹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약 2억 년 뒤에 우리 은하를 한 바퀴 돌고 현재의 자리로 되돌아올 것이다. - P19

12킬로미터 높이의 대류권과 그 너머의 성층권, 열권을 합한다 해도 대기권의 높이는 고작 450킬로미터,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에 불과하다. - P20

나에게 중요한 건 그리는 순간이니까. 그게 전부니까. - P28

이해하기 위해 나는 거기 서 있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 할 때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그 대상을 보고, 들여다보고, 또 본다. 대체 이것들은 뭘 의미하는 건가. 이 작업들에 바쳐진 인주의 일 년은. 마지막이 되어버린 일 년은. - P30

이 그림들의 사진을 보여주면, 홀치기염일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판화가 아니냐고 묻기도 하고, 물방울의 입자를 찍어서 한지에 감광액을 발라 인화한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P31

소금이나 세제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럼 어떻게?
먹과 물만으로 가능해요.
먹이 마르기 전에 물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먹이 번져가게 하는거란 말입니까? 세제나 소금, 아교를 쓰지 않으면 불가능할 텐데요.
아니요. 먹과 물의 농도가 다르니까, 삼투압의 원리와 모세관 현상을 이용하면...... 이만큼, 이 손바닥만큼 번져나가는 데 열흘이 걸려요. 그러니까 저만한 크기의 그림이 완성되려면 두 달에서 석 달쯤 걸렸을 거예요.
전문가들의 생각과 다르군요.
식물이 자라는 속도와 비슷한 거라고 했어요. - P32

그것들은 추측이고 상상일 뿐이지 증거가 되지 않아요. - P33

그 사람의 방식으로 이해한 거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 P33

.....당신에게, 그걸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 P33

책을 쓴 건, 그게 나에게 남겨진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쓴거라고 할 수도 있어요. 내가 설령 그 여자의 삶을 왜곡한다 해서, 그 여자가 살았던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상관없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 P34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냉정하게 생각하기 위해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 P35

그는 매우 논쟁적인 사람임이 분명했다. 긴 대화가 오가는 동안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았고, 공격적이면서도 침착했고, 확신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가 평생을 헤쳐나올 수 있었던 무기이자 연장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세 치의 혀와 능란한 글. - P36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는 인주를 사랑하고 있었다.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도. - P36

안 됩니다.
그는 갑자기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안 됩니다.
그 순간 나 역시 그를 이해했다. 그의 고통을. 숨겨진 집착을. 더이상의 요구는 불필요했다.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나가지요. - P37

모든 도시들, 국경선과 흙과 바다, 숲과 골목과 시궁창, 무덤과 개들, 나무들, 연인들, 감옥, 전쟁터, 교실과 극장, 장례행렬, 덜컹거리는 지하철, 고함치는 노천 시장 들은 450킬로미터의 대기권 안쪽에 있다. 더러 융기하고 더러 가라앉은 지각 위에 넓거나 좁은 무수한 도로들 틈에, 450킬로미터의 납작한 두께 안에 삶이 펼쳐져 있다. - P38

납작함 속에서 치열하게, 납작함 속에서 안이하게, 납작함 속에서 웃고 말하고 병들고 춤춘다. 납작한 세계의 안쪽을 땀 흘리며 껴안는다. 죽음의 순간까지, 아니, 죽음 뒤에도 육체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다만 시선과 생각들, 의식들만이 이상한 생명처럼, 혼령처럼 성운 사이의 텅빈 어둠 속을 헤엄쳐 다닌다. - P39

이제는 아니지・・・・・・보이저호가 있으니까.
1978년 우주 공간으로 진수된 보이저호가 해마다 보내온 사진들이 신문들과 과학잡지에 컬러 화보로 실리면, 삼촌은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오려 작업실 책상 앞에 붙여놓곤 했다. 그는 호들갑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깊은 감동이나 충격을 받은 일은 오히려 되도록 말하지 않았다. - P39

앞으로 오십 년 안에 보이저호는 태양계를 벗어날 거야. 그때부턴 별들 사이의 무한하고 텅 빈 공간 속으로 끝없이 나아가겠지. ・・・・・・그렇게 은하의 중심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쯤이면, 지구에선 수억년이 흘러 있겠지. - P39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글을 시작할때만은 종이에 쓰는 것이 희곡을 쓰던 때의 버릇이었다. - P40

소박하게 살면 빠듯이 살아질 만큼의 수입이란, 불필요한 욕망을 일깨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편안한 것이었다. - P40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 백지 앞에 앉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공포를. 쓰레기 위에 덮인 눈 같은 생활의 고요가 물기와 썩은 고깃점들에 뒤범벅이 되는 순간의 예감을.
그러나 지금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팔 년 만에, 백지 위에 무엇인가를 쓰려고 한다. - P40

어떻게든, 강석원의 글과는 전혀 다른 것을. 전혀 다른 사실들을. 분명한 건 하나뿐이다. 내 말들은 그의 말처럼 매끄럽지 않을 것이다. 견고하지 않을 것이다. 일사불란하지 않을 것이다. - P41

나는 더듬을지도 모른다.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내 말들로 그의 말에 부딪칠 거다. 부서질 거다. 부술 거다. 조각조각 부수고 부서질거다. - P41

생명이 타들어간다고 느낄 때 물을 마시게 되는 것은 물이 생명이기 때문일까. 몸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 P41

내일 인주의 방으로 갈 것이다. 열쇠 수리공을 불러 새로 열쇠를 맞춰서라도 들어갈 것이다. 삼촌의 그림을, 아니, 인주의 그림을 볼 것이다. 이해하려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않으면 쓸 수 없기 때문이다. - P42

지금은 여기서,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원히 연장되는 시간을, 정적을 견뎌야 한다. - P42

고대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젊은 신 마르두크는 모든 신들의 어머니 티아마트ㅡ혼돈ㅡ를 죽인 뒤 그 몸통을 반으로 갈라 하늘과 대지를 만들고 머리로 산과 강을 만든다. - P43

몽고의 신 오치르바니는 태초의 바다에 사는 뱀ㅡ혼돈ㅡ로순을 잡아 우주의 중심인 수메르 산에 세바퀴 감고 머리를 부숴버렸다고 전해진다. - P44

중국의 반고 신화에서는 오랜 세월 잠자던 거인 반고가 태어나면서 자신이 태어난 근원인 알을 깨뜨리는데, 맑은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한 것은 가라앉아 땅이 된다. 후대로 내려와 장자에 이르면 혼돈은 숙과 홀이 뚫어준 일곱 개의 구멍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 - P44

붉은빛의 불덩어리 새든, 태초의 바다에 사는 뱀이든, 근원의 알이든 혼돈은 죽는다. 머리가 부서지고, 깨뜨려지고, 구멍이 뚫려 죽는다. 그 죽은 몸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초목과 짐승들이 태어난다. - P44

우주의 시작은 양자역학적인 물리량이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앞뒤를 따질 수 있는 고전적인 시공간은 태초 이전에는 무의미하다. 고전적인 우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우주의 에너지는 0이지만, 시공간은 양자역학적 혼돈 상태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그러던 어느 확률적 순간, 에너지의 벽을 뚫은 시공간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고전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적용된다. 오랜 혼돈이 갈라지고 천지가 창조되는 짧은 시간, 우주는 급팽창하고 물질이 생성된다. 놀랍도록 신화에 가깝게, 플랑크의 시간이라고 불리는 10^‐43초, 그 찰나의 찰나에. - P44

나는 잠자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의 가운데가 분할되었고, 서로 다른 색채의 커다란 사각형 두 개가 바탕색을 향해 번지며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색채가 번지게 하기 위해서, 붓 대신 스펀지를 쓰기도 했다고 해. - P45

색채들의 충돌이 인간의 내부에서 스며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시작도 끝도 없던 혼돈이 방금 갈라져 피 흘리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의 비구상 화면에서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 P45

큰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친밀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이 사람은 말했어. 작은 그림을 그린다는 건, 스스로를 경험 밖에 두고 거기서 그 경험을 환등기나 축소경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했지. 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면,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가 있어서 어떤 것도 한눈에 볼수 없게 된다고 했어. - P46

도록을 넘겨갈수록 로스코의 색채들은 어두워졌다. 말년의 그림들은 짙은 푸른빛과 검정, 회색, 진한 갈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분할된 화면들은 어두운 정신과 더 극단적으로 어두운 정신의 끈질긴 대비처럼 보였다. 그 사이사이로, 불안할 만큼 밝고 생경한 색채의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 P46

얼핏, 그의 죽음을 즈음해 형성되고 있었을 내 첫 세포를 생각했다. 어머니조차 모르는 사이 연붉은 자궁안에 막 한 점으로 맺혔을 그것을. 바로 그 무렵, 북반구의 2월 하순,
차가운 흙 속에서 아직 썩지 않았을 그의 손을.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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