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초반부를 읽고 있는데, 아직 각각의 인물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까지 살펴본건 아니지만 예상외로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았다. 내 나름대로 정리해서 하나씩 적어보자면 일단 이 책의 화자는 이정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통해 추론해보니 소설 속 인물임과 동시에 저자의 분신같다는 생각도 들게 하는 인물이었다. 실제 저자의 인적사항과 관련된 내용이 본문에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화자의 친구이자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인 서인주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어릴 때 나름 유복한 가정(아버지가 의사였다고 한다)에서 자랐으나 어떤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이어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자라게 된다. 근데 소설을 읽다보니 이 외삼촌(이동주)도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뭔진 몰라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서인주는 결혼을 해서 민서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또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결혼 후 얼마지나지 않아 남편과 이혼을 해서 별거를 한다. 남편(정선규)은 과거에 건축사무소를 운영했다고 하는데, 이혼 후에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민을 간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소설의 또다른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미술정신‘이라는 잡지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나온다. 여기서 미술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이유는 서인주와 서인주의 외삼촌(이동주)이 그림을 그렸던 것과 관련이 있다.

소설속에서 서인주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녀 혹은 그녀의 외삼촌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미술작품에 대해 강석원이 평론같은 것을 썼다. 그런데, 강석원이 쓴 글을 읽은 서인주의 친구이자 이 책의 화자인 이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강석원이 쓴 글의 내용에 차이가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를 직접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눈다.

뭐 여기서 그들의 자세한 대화 내용까지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대화의 분위기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뭔가 어두침침하고 담담하면서도 긴장감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다. 아직 소설의 초반부라 뒤에 나오는 내용이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동안은 비슷하게 이어질 듯하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 책의 화자인 이정희가 남긴 말인데, 이는 소설 속 인물의 말임과 동시에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밑줄쳐보았다. 맨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다고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별도의 종이에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도를 간단하게 끄적여보면서 본문을 읽어나갔는데, 이렇게 읽다보니 내 머릿속도 고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뒤범벅되어 읽어나가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지만 큰 흐름을 놓치지 않고 한 번 잘 따라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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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읽다보면 우주와 관련된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칼 세이건 저자의《코스모스》를 통해 우주와 관련된 내용들을 조금이나마 읽어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과학 분야에 완전 무지했던 나였기에 본문을 읽을 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무지 힘들었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그 때 그렇게 고생스럽게 읽었던 내용들이 오늘 이 소설을 읽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만약 내가 과거에 《코스모스》를 읽지 않고 지금 이 소설을 읽었다면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거나 혹은 설령 읽더라도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 같다.

이런 경험을 통해 고생이라는 걸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의 의미가 오늘따라 더 깊이있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고생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고요하지 않은 것은 내 기억들뿐이다. - P50

자명종 시계의 야광 바늘은 완고하게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각에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면 원수일 것이다. 밤새 뒤척이며 모욕을 곱씹은 자. 돌려받아야 할 전 재산 때문에 눈이 뒤집힌 자. 빼앗긴 애인 때문에 죽거나 죽이기를 결단한 자. - P51

말해봐. 뭐가 당신을 잠 못 이루게 하는지, 어떤 죄, 어떤 후회인지. - P51

침묵은 이미 깨어졌다. 다시 울릴지 모르는 휴대폰을 옆에 두고 나는 호주의 국가번호와 지역번호 일곱 자리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들여다본다. - P51

어둠은 무겁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허물처럼 가벼운 어둠의 속을 더듬어 옷장의 손잡이를 찾는다. - P51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 P52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 P53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 P53

달리고 있으면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져 - P54

늙어가는 사람은 점점 어린아이 같아진다 - P55

한 번의 획에 모든 걸 담아봐 - P55

네가 경험한 모든 것이 한 번의 획에 필요하다고 생각해봐. 자연, 너를 키운 사람, 기르다 죽은 개, 네가 먹어온 음식들, 걸어 다닌 길들...... 그 모든 게 네 속에 있다고. 네가 쥔 붓을 통과해 한 획을 긋는 사람은, 바로 그 풍만한 경험과 감정과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 P56

내가 풍만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 호흡을 참으며 선 하나를 그었을 때, 내 몸속에 미처 몰랐던 공간이 있었던 것을 알았다. 그 안에 숱한 요철과 구멍들이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을 알았다. 잠자코 선을 그어가는 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소한 일들이 떠올랐다가 이내 침묵에 씻겨 사라졌다. - P56

꿈속에서 흰 새는 아무렇지도 않게 울었다. 그저 자신의 일이라는 듯이, 자신의 본성일 뿐이라는 듯이. 구슬프지도 처절하지도 않게 우는 동안 새의 머리에서 흰빛이 빠져나갔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그저 담담히 중력의 법칙을 따르는 듯, 안 보이는 시간의 결을 어루만지는 듯 조용히. - P56

인주와 삼촌, 그들이 그린 그림ㅡ그것들이 내가 쓰려는 전부다. 단지 그들이 내 기억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냄새, 소리, 색깔 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불려나오는 것뿐이다. - P57

잘 숨을 수 있을까.
얼굴도, 목소리도, 발자국도 없이 이 부서진 조각들 사이를 아슬아슬한 난간들을 짚고 갈 수 있을까. - P57

삼촌이 그랬듯이 인주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고요한 푸른빛을. 푸른 시간을, 밤의 비밀과 낮의 명료함이 맞바뀌는 지진 같은 떨림을. 피와 뼈까지 파랗게 배어드는 서늘함을 잠든 사람들의 체온이 가장 내려가는 순간. 지표면이 가장 차가워지는 이 순간. - P57

아무렇지 않은 네가 걸어 나온다. 어둠보다 어둡게, 박명을 등지고 걸어 나온다. 이상하다. 아니, 당연하다. 얼굴에 눈물이 없다. 흐르는 피도 말라붙은 피도 없다. 너를 지나쳐서 나는 걷는다. 눈을 닫고 걷는다. 입을 닥치고 걷는다. - P58

우주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우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천체들의 나이로 미루어 약 150억 년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우리 은하에는 수십만 개의 별들이 공처럼 뭉친 구상성단들이 있는데, 이들의 나이는 모두 100억 년이 넘는다. 그러나 150억 년보다 더 늙은 천체는 찾아볼 수 없다. - P61

비록 우주 공간이 무한하다 해도,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도 유한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그 대상에서 나온 빛을 느껴 안다는 것이다. 이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빛이 150억 년간 달려온 거리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별을 볼 수 없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는 약 390억 광년으로 한정된다. 이것이 우주의 지평선이다. 그 너머의 별들이 낸 빛은 미래에 우리에게 도달할 것이다. - P61

천체물리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시간과 공간이 같은 것을 말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멀리서 반짝이는 별은 오랜 과거의 별이며, 이미 존재하지 않는 별일 수도 있다. 더 멀리 볼수록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주의 지평선은 그렇게 우리가 멀리 볼 수 있는 한계, 더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오를 수 있는 한계다. 그것이 없다면 우주가 태어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 P61

그러니까, 혹시...... 이 우주의 물질은 원래 하나인 거예요? 같은 중성자가 어떻게 양자와 결합했느냐에 따라 수소, 탄소………… 그런 게 되는 거예요? 이 종이랑 담벼락이랑 사람의 몸이랑 물이랑...... 이 모든 게?
그렇지.
삼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같은 구슬을 이렇게 묶느냐 저렇게 묶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 P62

나의 몸과 그의 몸이 같은 물질, 같은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절실하게 느껴졌다. - P62

그런데, 그 알갱이는 거의 비어 있다고, 이 책에는..
그렇지.
그러니까. E=mc²이란 말은.....
비어 있다고 해서 그게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고,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거지. 네가 말한 건 에너지가 곧 물질이라는 등식이니까.
수증기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물이 되고 얼음이 되는 것처럼요?
적절한 예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슷해. - P62

그러니까, 여러 조건들, 시간까지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이있다면 이 세상은...... 한 점인 거네요. 빅뱅 이전의 한 점, 아니, 점도 아닌,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우리가 산다는 건...... - P62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풍화되는 대지와 마르는 강물, 폭발하는 별들이 스쳐간 것을. 모든 것이 하나로 꿰어지는 순간의 격렬함을 경험한 것을. 슬픔도 고통도, 그렇다고 기쁨도 아닌 그 순간을. - P62

당신의 손의 원소가 내 손의 원소와 같다는 것을 간절하게 실감했기 때문이라고. 아니, 모르겠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다. 당신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도 단언할 수 없다. 모른다고밖에는 모든 것이 덩어리로 다가왔다고밖에는. 스며들고 번져갔다고밖에는. 당신의 그림 속에 떨고 있던 모세혈관들처럼. - P63

먼저 고백해야만 한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내 눈물을 믿지 않는다고.
내 진실을 믿지 않는다고.
내 기억을, 고통을 믿지 않는다고. - P63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특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 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 P64

밥부터 먹고,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해. - P65

모든 것이 수축되는 한 점에서, 시간과 공간, 물질과 비물질이 하나가 된 그 점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죽은 적도 태어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 P67

이 모든 말들은 궤변에 불과하다. - P67

몹시 차가운 것은 첫 순간 뜨겁게 느껴진다. - P68

그 시절의 수학 시간에 결코 이해해낼 수 없었던 숫자들이 있다.
0과 무한.
어떤 숫자든 0을 곱하면 블랙홀에 빨려든 듯 0이 되고, 0으로 나누면 반대로 무한이 된다. - P69

가령 3이라는 숫자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0을 생각하고 있자면, 서로를 끝없이 비춰주는 어두운 거울들을 지켜보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 P69

우주가 태어났다는 것은 0이 스스로 무한이 되었다는 걸 뜻한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우주 공간 속에서 0이 끝없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는 뜻이다. - P69

우주의 비어 있는 공간을 0이라고 생각하니까 혼란스러운 것 아닐까? - P70

아마 물고기는 물이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서도 허공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허공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아. 바람이 불고, 벼락이 치고, 강한 압력으로 우리 몸을 누르지.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 더 높은 차원의 눈으로 우주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거야. - P70

삼촌의 책장에서 빌려간 딱딱한 책들을 건빵처럼 입속에서 불려 읽던 그 가을, 때로 나는 막막하게 되새겨보곤 했다. 내가 굳건히 딛고 걸어가는 땅이, 실은 전속력으로 회전하는 전자들이 결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핵과 전자들 사이의 공간은 소금 알갱이들이 흩어진 커다란 성당만큼이나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삼촌과 함께 있을 때 그것은 자연스러운 기적, 또렷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에서부터 이미 나는 더 믿을 수 없었다. 0이 변한 텅 빈 무한 속에서 0을 딛고 걸어가는 0, 그것이 바로 나라니. 그 몸속에서 이토록 고통스럽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붉고 더운 피를 쉴 새 없이 뿜어내고 있다니. - P71

가끔은 부드럽고도 무정하게 말했다.
이 선은 죽었구나.
‘죽었다‘는 말이 엄하고 예리한 날로 가슴을 긋는 것 같아, 나는 귓불을 붉힌 채 주먹으로 심장께를 문질렀다. - P71

그래, 안 될 때는 쉬어야지. - P72

왜 그렇게 오래 그 그림을 들여다보았는지 나는 모른다. 볼수록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화면에는 사람 하나, 짐승 하나, 발자국 하나 없다. 거대한 바위들은 곧 허공에서 얼어붙고 말 불길처럼 단단하게 타오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림을 읽으면 꿈속의 꿈으로 걸어들어가 마침내 복사나무 숲을 만나게 되고, 당시의 독법으로ㅡ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ㅡ복사나무 숲을 빠져나와 현실의 벌판에 다다르게 된다. 가파른 협곡이 세로질러 삼킨 길, 화면 왼편의 먼 복사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나는 마치 꿈의 마지막 순간인 듯 거슬러 더듬어가보곤 했다. - P73

안견은 왜 꿈의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부분을 그렸을까. 어떤 어두운 예감의 힘으로 꿈꾼 사람의 앞일을 그림에 담았던 걸까. 꿈을 꾼지 칠 년 뒤, 안평은 서른일곱의 나이에 친형 수양이 내린 사약을 받고 유배지 강화에서 죽었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글씨, 남다른 감각으로 수집한 수백 점의 서화들, 재주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재동 집의 풍류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경계를 넘어갔다. - P74

마지막 방에 전시된 몽유도원도 앞에 다다랐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면 오른쪽에 무리 지어 선 복숭아나무들이었다. 비단에 그린 그림이니 물감들은 옷감과 함께 오랜 시간 퇴색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 그렸을 때는 얼마나 선명한 붉은 꽃들이었을까. - P74

삼촌이 들려주었던 인면도화(人面桃花)라는 말을 기억했다. 복숭아꽃처럼 어여쁜 얼굴이라는 뜻ㅡ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하면 그리움 때문에 얼굴이 아름답게 기억된다는 뜻이다. 그 그림의 복사꽃에는 어떤 귀기도, 농염함도 없었다. 그저 다시 못 볼 사람의 얼귤, 누구의 생시에도 얼비치지 않을 꿈으로 늙은 비단 위에 무리 지어 피어 있었을 뿐이다. - P74

이 선은 죽었구나.
온화한 그 온화함 때문에 도리어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그는 나무라곤 했다. 죽은 선을 그은 나는, 그 선을 긋는 동안 죽어 있었던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살아 있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두려움과 고통이 뒤섞인, 가장 끔찍하고 가장 달콤한 순간이 파르스름하게 흔들리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외면했다. - P75

알고 있었어, 라고 인주는 말했다.
두 사람, 다 알고 있었어.
인주는 무엇을, 어디까지 알았을까. 얼마나 어렵고 더딘 시작이었는지. 마지막 열흘 동안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워했고, 얼마나 서슴없었는지. 서로의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아 새들이 가슴털을 비비듯이, 불꽃이 당겨질 때까지 떨리는 손으로 성냥을 긋듯이, 어두운 방 가운데에서 어깨를 웅크린 채 수없이 입술을 포개었는지. - P75

때로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단 한 번도 믿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이 태어났다는 것을. 격렬히 고동치던 그 심장들이 실은 텅 빈 것이었다는 것을. 마른 입술, 두려워하는 손, 갓 꺼낸 밀빵 껍질같이 달아오른 네 개의 뺨조차, 어두운 꿈의 마지막 순간처럼 영원히 없는 것, 사라지기 전에 이미 없던 것, 없던 것이었다는 것을. - P76

일어서.
소리치지마.
참아.
다리를 끌지 마. 멈추지 마.
아픈 데를 만지지 마.
그래. 계속 걸어가.
너는 괜찮아. - P79

무엇이든 견딘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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