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읽은 내용에 연이어서 내용이 이어진다. ‘그 소년‘이 어느날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자, ‘나‘는 ‘그 소년‘의 아버지와 만난 뒤 얼마지나지 않아 ‘그 소년‘의 형들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그 소년‘과는 결이 완전히 달라서 사회적으로 아주 잘나가는, 소위말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동생의 실종 소식에 ‘나‘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게 된다. 오늘 내용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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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이어서 갑자기 ‘나‘는 꿈을 꾸는데, 거기서 신기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스포‘의 위험때문에 자세히 얘기할 순 없지만, 독자인 나는 어떤 특정 부분에 이른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왔던 독자들이라면 비슷한 포인트에서 전율을 느끼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아마 아실 테지만 저희 동생은, M**은 이른바 평범한 아이는 아닙니다." 의대생 동생이 입을 열었다. "통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능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어요. 보통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능력입니다. 어쩌면 그만큼 신의 영역에 가까이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어디선가 신의 금기를 건드릴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일지도요."
나는 말했다. "M**이 보통 사람에 비해 스피리추얼한 영역에 보다 가까이 있다는 말인가요?"
"네, 어쩌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 P642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애 쪽에서 저희에게 말을 붙인 적이라곤 없어요. 늘 자기만의 세계에 꽁꽁 틀어박혀있습니다. 바다 밑바닥의 굴조개처럼. 하지만 선생님에게는 M**이 먼저 나서서 말을 걸었다고요." - P644

"그 지도를 갖고 계신가요?"
"아뇨, 지금 제게는 없습니다. M**이 가져가서요." 거짓말이다. 지도는 우리집 책상서랍에 들어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들에게 지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 P645

나는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의 개요를 두 사람에게 간략히 알려주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동생의 행방을 찾고 있다. 내가 거절할 순 없다. - P646

"그애는 무엇하나가 눈에 들어오면 일반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집중력을 발휘합니다." - P647

"그래도 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M**이 그 도시에 마음이 끌린 건 아마 그곳에서는 두 분이 말씀하시는 사회적 적응력 같은 게 불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애가 그 도시에서 해야 할 일이라면 도서관을 오가며 특수한 책을 읽는 것뿐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마을에서 이 도서관에서 매일 하던 일과 기본적으로 같지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아요. 그리고 그 도시에서는 그 책을 읽는 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 P649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도서관 정원을 천천히 가로질러가던 야윈 암고양이를 문득 떠올렸다. 이어서 그어미와 다섯 마리 새끼고양이를 질릴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바라보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지만. - P650

정확히 말해 그 도시는 열일곱 살의 나와 열여섯 살의 소녀가 함께 힘을 모아 세운 것이다. 나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꺼낼 순 없다. - P650

"제가 생각하기에 도시를 둘러싼 벽이란 아마 선생님이라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의식일 겁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빙산과 같아, 수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건 극히 일부입니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가라앉아 감춰져 있습니다." - P651

"나는 물었다. "의학도라고 들었는데, 어느 쪽 전문이신가요?"
"일단은 외과의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뇌신경외과를 전문으로 삼으려 하고요. 하지만 정신의학에도 관심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뇌신경외과와 겹치는 분야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내가 말했다. "그쪽으로 진로를 잡은 것에 동생M**의 영향도 있었을까요?"
"네, 그렇죠.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겁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요." - P651

"예를 들어 M**은 그 도시로 갈 수 있는 통로 같은 걸 발견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애는 고열에 시달렸으니까요. 그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 통로를 찾아서 집을 나간 겁니다. 잠겨 있는 집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밖으로 나갔죠. 잠옷 한장만 입고. 하지만 물론 그런 통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몹시 추운 밤이었으니…………"
동생이 얘기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길로 가까운 산속에 들어갔다가 추위로 의식을 잃었는지도 모르죠. 그게 저희가생각해낸, 가장 있을 법한 가설입니다." - P652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간 도쿄를 떠나 이곳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현실적인 희생을 치렀을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에 쫓겨 바쁜 법이다. - P653

"비유적인지, 상징적인지, 암시적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M**이 어떤 통로를 발견해서 그 도시로 가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수면 아래 깊은 곳, 무의식의 어두운 영역으로요." - P653

설령 그곳에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아마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이쪽 세계로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으리라. 물론 형들에게그런 말을 할 순 없다. - P654

"비유적인지, 상징적인지, 암시적인지 잘 모르겠지만"이라고 의대생 동생은 말했다.
아니, 그건 비유도 상징도 암시도 아닌, 흔들림 없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나는 현실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그 현실의 도시 거리를 걷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을, 그리고 그 도시를. - P654

안쪽 벽에 딱 하나 작은 나무문이 있었다. 창고 아니면 옷장같다. 나는 그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가능하면 열고 싶지 않았지만 역시 열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를 찾아 여기까지 먼길을 왔으니, 닫힌 문을 열어보지 않고 물러날 순 없다. - P657

안에 있는 건 인형 하나뿐이었다. 주위가 어두운 탓에 그게 나무로 조각한 인형이란 걸 알아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상당히 큰 인형이다. 키가 1미터는 넘어 보인다. 팔다리 관절이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는지, 피곤한 사람이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듯한 자세로 안쪽 벽에 세워져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 인형이 요트파카 같은 걸 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초록색 파카에는 옐로 서브마린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 P658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인형의 얼굴을 살폈다. 칠이 많이바래긴 했어도 분명 M**이었다. 나무에 물감으로 그린 M**의 얼굴은 상당히 희화화되어 있다. 마치 익살스러운 복화술인형 같다. 웃으려다 만 것처럼 어딘가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찾던 것이 이 인형이라는 걸.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다름 아닌 이 인형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고, 깊은 숲을 헤치고, 거무칙칙한 짐승들의 눈을 피해.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숨을 참고 똑바로 나무 인형을 바라보았다. - P658

그렇다. 이것은 M **의 허물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M**은 이 깊은 산속에 육체를 버렸고, 버려진 육체는 낡고 빛바랜 나무 인형이 되었다. 그리고 육체라는 감옥의 구속을 벗어난 그의 영혼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이행했다. 그것이 내가 확인하고 싶은 사실이었다. - P658

그러나 뒤에 남겨진 이 나무 인형을, 소년의 허물을 과연 내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마을로 가져가서 그의 형들에게 보여줘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내버려둬야 할까. 그도 아니면 어딘가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줘야 할까.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이대로 두는 게 제일 옳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중에 소년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P659

그때 문득 알아차렸다. 인형의 입가가 보일락 말락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주위가 어두워서 처음에는 시각적 착각이려니 했다.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본 것이라고.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다. 잘 보니 인형의 입이 작고 희미하게. 그러나 틀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할말이 있는 것처럼, 보아하니 입 부분만 위아래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것 같았다. 복화술사가 조종하는 인형과 마찬가지로. - P659

인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보려고 최대한 집중해서 귀기울였지만, 내 귀에 들리는 건 낡고 망가진 풀무처럼 픽픽거리는 바람소리뿐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조금씩 말의 형태를 띠는 듯 느껴졌다.
조금 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P659

조금 더..……… 라고 그것은 거듭 말했다. 이번에는 약간 큰소리로.
나는 그 입가 가까이 귀를 갖다댔다.
그 순간, 인형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고개를 뻗어 순식간에 내 귀를 깨물었다. 귓불이 찢어진 줄 알았을 만큼 세게, 깊게, 힘껏. 고통이 실로 격렬했다.
나는 크게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주위는 컴컴했다. 조금 지나자 그게 꿈이었음을 알았다. 혹은 꿈에 근접한 무언가라는 것을 나는 내 집,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길고 생생한 꿈(같은 것)을 꾼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세게 깨물린 오른쪽 귓불에 선명하게 통증이 남아 있었다. 착각 같은 것이 아니다. 내 귓불은 실제로 욱신거리며 아팠다. - P661

그런데 아무리 주의깊게 살펴도 깨물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미끈한 귓불이 보일 따름이다. 남은 것은 깨물렸을 때의 통증뿐이었다. 그러나 그 통증은 틀림없는 진짜다. 그 목각 인형이ㅡ혹은 인형의 형상을 한 누군가가ㅡ내 귓불을 깨물었다. 재빠르게, 세게, 깊게. 그건 내 꿈속에서 벌어진 일일까, 아니면 ‘의식의 어두운 수면 아래‘에서 벌어진 일일까···· - P661

그러나 귓불에 격심한 아픔을 느끼는 한편, 속으로는 적잖이 안도했다. 나는 그 외딴 숲속 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오두막에서 마침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남기고 간 ‘육체‘를, 혹은 그 허물을, 그건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실종(혹은 가미카쿠시)이라는 수수께끼 사건을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 P662

가게 안 작은 스피커에서 제리 멀리건의 솔로가 흘러나왔다. 아주 오래전에 자주 들었던 연주다. 나는 뜨거운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기억의 밑바닥을 더듬어 곡명을 생각해냈다. <워킹 슈즈>, 아마 맞을 것이다. 피아노리스 쿼텟의 연주, 트럼펫은 쳇 베이커다. - P663

"혹시 괜찮으면, 손가락으로 만져봐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기꺼이." 그녀는 말했다. 그러고는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오른쪽 귓불을 집듯이 부드럽게 몇 번 문질러주었다.
"귓불이 크고 부드럽네." 그녀가 감탄한 투로 말했다. "부러운걸. 내 귓불은 무척 작고 딱딱하거든. 복이 없어 보이지."
"고마워." 나는 말했다. "만져준 덕분에 많이 편해졌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손끝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자 내 귀의 아픔은ㅡ그 희미한 꿈의 자취는ㅡ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P665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왜 내 귓불을 그렇게 세게 깨물어야했을까?‘
나는 그 한 가지를 집중해서 생각했다. 그 의문이 아침부터쉴새없이 내 마음을 흔들고, 날카로운 바늘로 신경을 찔러댔다. - P665

그 소년은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 확실한 흔적을 내 의식과 육체에 또렷이 아로새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각인을 남기듯이, 잊기 힘들 만큼의 물리적 통증을 수반해서. 그 정도로 엄청난 통증이었다. - P665

이 세계.
그러나 그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이, 전체의 축척이 여느 때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천장이 너무넓고 바닥은 너무 좁다. 그 결과 벽이 압력을 받아 휘어졌다.
잘 보면 방 전체가 마치 장기의 내벽처럼 미끄덩거리며 꿈틀대고 있다. 창틀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고, 창유리가 물결치듯 출렁거린다.
처음에는 큰 지진이 난 줄 알았다. 그러나 지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건 나의 내부에서 우러나온 진동이다. 내 마음의 떨림이 바깥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을 뿐이다. - P666

하지만 전부 나의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예민해졌는지도 모른다. 간밤의 생생한 꿈 (같은 것) 때문에, 신경이 비정상적인 상태가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꿈의 안과 밖 경계선이 불명확해진 게 분명하다. - P667

나는 오른쪽 귓불을 손끝으로 살며시 만져봤다. 부드럽고 따뜻한 귓불에 통증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통증이 남은건 내 의식의 안쪽뿐이다. 그리고 그 통증은, 그 또렷한 잔존기억은 이제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그건 뚜렷한 열을 품은 각인과도 같다.
한 세계와 또다른 세계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각인. 나는 아마도 그것을 내 존재의 일부로 간직한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 P667

머릿속에서 요리 순서를 하나하나 자세히 떠올리는 사이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실제적인 일에 머리를 쓰면 다른 문제는 잠시 잊을 수 있다. 제리 멀리건 쿼텟이 연주하는 곡의 제목을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 P669

"뭐 읽어?" 나는 더플코트를 벗어 행거에 걸면서 물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좋아해?"
"응, 좋아하는 편이야. 작품을 거의 다 읽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이 책을 특히 좋아해." - P671

"내가 좋아하는 건 이 부분이야." 그녀는 가름끈을 끼워둔 책장을 펼치고 읽어주었다.

페르미나 다사와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점심식사 시간까지브리지에 있었다. 점심시간 조금 전에 칼라마르 촌락을 통과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매일 축제 소동을 벌였던 그 항구도 지금은 거리에 인적이 없고 완전히 쇠락했다. 흰옷을 입은 여자가 손수건을 흔들며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저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태워주지 않는지 페르미나 다사가 신기하게 여기고 있자, 선장이 저건 물에 빠져 죽은 여자의 망령이며, 지나가는 배를 건너편 해안의 위험한 소용돌이 쪽으로 꾀어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가 바로 여자의 옆을 지나갔으므로 페르미나 다시는 햇살을 받은 그 여자의 모습을 아주 자세하고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이 세상 것이 아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낯익은 얼굴처럼 보였다.

"그의 이야기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이 한데 뒤섞여 있어." 그녀는 말했다. "마치 평범한 일상 속의 일들인 것처럼." - P672

"그런 걸 매직 리얼리즘이라고들 하더군." 내가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비평적 기준으로는 매직 리얼리즘일지 모르지만,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에게는 이런 이야기 방식이지극히 평범한 리얼리즘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해.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혼재했고, 그런 풍경을 보이는 대로 썼던 게 아닐까." - P672

"요컨대 그가 사는 세계에서는 리얼과 비리얼이 기본적으로 이웃하며 등가적으로 존재했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것을 꾸밈없이 기록했을 뿐이다?"
"응,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그리고 난 마르케스 소설의 그런 부분을 좋아해." - P672

가르시아 마르케스 소설 이야기는 내게 고야스 씨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라면 고야스 씨를 만나도,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매직 리얼리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것과 관계없이. - P672

"생활의 질을 따지면 물론 조금 불만이 있지만, 배부른 소리 할 처지는 아니니까." - P675

"다만 계속 이런 데서 생활하다보면 자꾸 영화 《안네의 일기》가 생각나. 암스테르담에서 주인공이 살았던 비밀 방. 천장이 낮고 창이 작고…………" - P675

그러나 잠시 후 나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녀린 온몸을 이상할 만큼 긴밀한 무언가가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 P677

"그래, 그럴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스칼렛 오하라의 시대도아니고. 하지만 이런 걸 입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돼. 내가 든든히 보호받는 것 같아서. 방어가 된다고 할까." - P677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사이 나의 의식은 열일곱 살이었던 무렵으로 하릴없이 끌려갔다. 마치 강한 조류에 휩쓸려가는 표류자처럼. 나의 내부에서 주위 정경이 전환한다. - P678

그러나 그것은 한번 딱딱해지면 의지와 달리 좀처럼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무리 목줄을 당겨도 말을 듣지 않는기운찬 대형견처럼. - P679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해."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좋아해. 그래서 가능하면 받아주고 싶어. 정말이야. 하지만 도무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아." - P679

"기다려도 괜찮을까?" 나는 말했다.
"기다린다면.......내가 그런 영역에서 적극적인 기분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뜻이야?"
"적극적이지 않아도 상관없어."
"보다 수용적인 기분이 된다는 얘기인가." - P680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기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몰라. 아니, 적극적이건 수용적이건 두 번 다시 그럴 기분이 들지 않을지도 몰라. 나한테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테니까."
"기다리는 것엔 익숙해."
그녀는 잠시 또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렇게 참을성 있게 기다릴 만한 가치가 나에게 있을까?"
"글쎄" 나는 말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들여서라도 기다리고 싶다는 마음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 입술은 역시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다른 부분과 다르게 단단한 무언가로 방어되어 있지 않았다. - P680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 나무상자 하나에 들어간 더 작은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에 들어간 더 작은 상자. 끝없이 정묘하게 이어지는 세공품, 상자는 점점 작아진다ㅡ그리고 또한 그안에 담겨 있을 것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사십몇 년을 살아온 인생의 실상이 아닐까? - P681

대체 어디가 출발점이었는지, 그리고 도달점이라 할 만한 것이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니, 어쩔 줄 몰랐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눈 녹은 물이 졸졸 흘러드는 수면을 쨍하니 맑고 싸늘한 달빛이 비추었다.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물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 자명하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 P681

어쩌면 나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P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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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고야스 씨와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읽으면서 문득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이 소설에 나오는 ‘그 도시‘와 지금 현생의 삶 둘 중에 하나의 장소에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마치 ‘가지 않은 길‘에 나왔던 화자의 고민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몸은 하나인데 장소나 길은 여러 가지가 존재하기에 인간은 늘 선택의 고민에 직면하게 되고, 어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경제학에서 흔히 말하는 기회비용이 있기에, 해보지 못한 것 혹은 살아보지 못한 장소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들이 사람들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조금씩은 있기 마련인듯 하다.
이 소설의 끝이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특히 ‘나‘라는 인물의 선택과 관련된 고민들이 어떤 식으로 풀려나갈지도 꾸준히 관찰하며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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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이야기를 읽다가 고야스 씨는 ‘나‘에게 마치 우문현답 같은 답을 주는데 ‘나‘가 고민하고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해준다.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스포‘의 위험이 있기에 요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결국 최종적인 선택과 판단 그리고 그 삶을 살아내고 이겨내야 하는 것은 그 문제에 직면해있는 당사자의 문제이지 그 당사자에게 조언을 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생각을 확장해서 실제 삶에 적용해볼만한 점을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논할 수 있을 듯 하다.

살다보면 누군가로부터 조언을 듣거나 어떤 피드백을 받으면서 내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마음들이 있는데, 거기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그 선택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살아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이 소설 앞 부분에서도 그랬지만 후반부에 와서도 이런저런 다양한 생각들을 해보게 만드는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작품 스타일인지도 모르겠다. 동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작품하나만 놓고보면 분명히 그렇게 느껴진다. 독자인 나는 p.588, p.589에 밑줄친 ‘나‘와 고야스 씨 간의 대화에서 이러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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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이어서 나온 이야기에는 ‘나‘와 이야기했던 ‘그 소년‘ 이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지는데, 이로 인해 처음으로 ‘그 소년‘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의 대화 가운데 그 아버지가 하는 말이 있는데 핵심은 자식 교육의 고충에 대한 것이었다. 모든 자식이 부모의 가르침대로만 커준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가.. 부모 말 잘듣는 자식도 있지만, 청개구리처럼 부모 말 안듣는 자식도 있기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참 마음고생하는 걸 여기서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생각을 좀 더 확장해서 꼭 자식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사람을 다루는 일이라는게 내 생각대로 딱딱 되는게 아니라는 건 어느정도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예외없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능숙하게 하기위해 인간관계나 리더십 혹은 심리학과 관련된 책들도 많이 있지만, 그런 것들을 설사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인간관계에서 100% 만족이라는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그런 비현실적인 것이다.

잠시 소설 내용에서 곁길로 샜는데 어찌됐건 이 끄적임(?)의 결론은 ‘자식을 비롯해 인간관계라는 건 참 쉽지않다.‘ 정도로 내면 될 듯 하다.

나는 눈을 감고서 머릿속에 재현된 그 이미지를 지우려고 애썼다. 아니면 어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간단히 사라져주지 않았다. - P580

그건 지금 현재의 일이 아니다. 이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상실되었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일이다. 나는 성분이 다른 두 이미지를 멋대로 겹쳐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올바른 일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올바르지 못한 일일까? - P581

어쩌면 사람은 두 번 죽음을 맞는지도 모른다. 지상에서의덧없는 죽음과 진짜 영혼의 죽음. 물론 누구나 다 그렇게 죽는 건 아니다. 고야스 씨는 분명 특수한 경우일 것이다. - P584

"그렇게 띄엄띄엄 이뤄지는 의사소통이 자연스러운 거예요.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 P585

"그애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가서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가 말했다. "제가 과거에 살았던 도시죠.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려면 이쪽 세계의 자신을 지워야 해요. 그림자를 잃은 인간은 결과적으로 이쪽 세계에서의 존재를 상실해야 하니까요." - P585

나는 말했다. "그 도시는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가 거의불가능한 곳입니다. 주위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억센 문지기가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요. 그리고 그 도시 사람들이 풍족한 생활을 한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춥고 긴 겨울 동안 많은 짐승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죠. 그곳은 결코 낙원이 아니에요."
"그래도 당신은 그쪽 세계에 머무르는 것을 택했지요. 높은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당신이 늘 마음으로 원해왔던 생활을 하게 되었고요. 당신의 그림자가 도시에서 나가자고 권해도 홀로 그곳에 남는 것을 선택했어요. 그렇죠? 결과가 어찌되었건." - P586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그게 올바른 결단이었는지 지금도 판단하기 힘듭니다. 그 도시에 머물러야 했는지, 아니면 이쪽으로 돌아와야 했는지. 결과적으로는 제 결단과 관계없이 이쪽으로 튕겨나오고 말았지만.………… 그러니까 가령 소년이 그 도시에 들어간다 한들 과연 그곳 생활에 녹아들 수 있을지 예측이 되지 않아요." - P587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어요. 그애의바람을 이뤄줘도 될지. 그 소년이 아니, 한 인간의 존재가 이쪽 세계에서 지워져버릴 일을 도와줘도 될지."
"들어보세요." 고야스 씨는 강조하듯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말했다. "생각해보세요, 네, 당신은 고심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판단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 P587

"하지만 그애는 제가 그 도시로 안내해주기를 원합니다. 그곳으로 가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그러지 못하죠. 그 도시에 간 적이 있어도,
가는 법을 알진 못하니까."
"맞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고심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고야스 씨는 조용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 P588

"당신은 자신이 꾸는 꿈을 스스로 고를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럼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 사람이 꿀 꿈을 골라줄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랍니다." - P588

나는 말했다. "요컨대 고야스 씨 말씀은, 벽에 둘러싸인 그도시는 제가 꾼 꿈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한 표현은 어디까지나 비유의 영역입니다.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틀림없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정해진 루트가 있는 건 아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곳에 다다르는 길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릅니다. 그러므로 설령 당신이 마음먹는다 한들 아이 손을 잡고 목적지까지 안내해주는 건 불가능해요. 그애는 자기 힘으로 자신의 루트를 찾아내야 하는 겁니다." - P588

"그렇다면 고심하고 말 것도 없이, 나는 소년이 그 도시로 가는 데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런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고야스 씨는 말했다. "그는 그 도시로 가는길을 스스로 찾아낼겁니다. 그 과정에서 아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테지만, 그게 어떤 도움인지도 자기 힘으로 찾아낼 것이고요. 당신이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 P589

"들어보세요, 당신은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 소년의 의식 속에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를 세워주었으니까요. 그 도시는 이제 소년 안에 생생히 뿌리내리고 있어요. 이 세계보다 훨씬 생생하게 말입니다." - P589

"네, 그의 안에 세워진 도시는 당신이 실제로 살았던 도시와 여러 면에서 조금씩 다를지도 모릅니다. 기본적인 구조는 같지만 세세한 부분은 그를 위한 도시로 새로 만들어졌을 테죠. 그러기 위한 도시니까요." - P590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내가 살던 무렵부터 도시를 둘러싼 벽은 이미 시시각각 형상을 바꿔가고 있었다. 마치 장기의 내벽처럼. - P590

"그러니 어쨌거나, 네, 그가 어느 쪽 세계를 택하느냐를 두고 당신이 고민할 필요는 없답니다. 그애는 스스로 판단해서 앞으로의 삶을 선택할 겁니다. 그래봬도 심지가 굳은 아이니까요.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에서 확고하고 힘있게 살아나갈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세계에서, 당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 P590

"당신은 그애를 위해 이미 충분히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준 겁니다. 그건 그를 위해서도 잘된 일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뭐랄까요, 그건 계승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이 도서관에서 제 뒤를 계승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 P590

그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게 분명하다고 나는 깨달았다. 최종적으로 이 세계를 떠난 것이다. 무엇보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아마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어느 인간의 죽음보다도. - P591

떠나버린 영혼은 조용히 놔두는 게 좋다. 그 이름도 되도록 꺼내지 않는 편이 좋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 P594

만약 소년이 가출 비슷한 걸 한다면 틀림없이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고 나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하도 입고 다녀서 허름해진 그 파카에는 그의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어떤 기능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제 발로 걸어서 집을 나간 게 아님을 시사한다. 요컨대 그는 밤사이 잠옷 바람으로 혹은 옷차림이 의미가 없는 형태로ㅡ어딘가로 이동한 것이다. 어쩌면 옮겨졌거나 어딘가로………이를테면 그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 P598

"제가 M**에게 들려준 건 일종의 우화였습니다. 저는 어떤 도시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말하자면 가상의 도시죠. 세부까지 매우 면밀하고 리얼하게 만들어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여러 가설 위에 성립된 도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직접 그애에게 들려준 건 아닙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말한 걸 아이가 건너들은 셈이죠. 어쨌거나 아이는 그 도시에 강한 흥미를 느낀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그 자리에서 내가 가까스로 말할 수 있는 ‘진실‘이었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다. - P606

소년의 아버지는 말했다. "M**에게는 그런 재능도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작은 조각들을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조립해 정확한 전체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죠. 이를테면 무척 복잡한 천 피스짜리 직소퍼즐도 순식간에 뚝딱 맞춰버립니다. 그애가 아직 어렸을 때, 거침없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광경을 저는 몇 번이나 목격했습니다. 성장할수록 아이도 차츰 조심성이 생겨서, 그런 특별한 힘을 최대한 남의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했던 모양입니다만." - P607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한.‘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 아버지는 대체로 ‘상식‘에 포괄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러니 아들이 그 ‘가상의 세계‘를 실제로 찾아갔으리란 발상은 거의 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리라. - P608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 아버지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우리는 같은 처지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엘로 서브마린 소년이 강한 흥미를 느낀 대상은 나라는 인간이 아니라 내가 예전에 머물렀던 도시였다. 나는 그에게 그저 통로처럼 지나쳐간 존재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를 앞에 두고도 그의 눈에 비친 건 그저 그 도시의 광경뿐이었을까? - P610

"아마 누군가와 마주앉아 얘기하는 시간이 필요하셨을 거예요. 혼자서만 불안해하면 아무래도 힘드니까요" - P611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에다 씨가 나와 같은 불안을 품고 있는 듯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소년이 두 번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녀의 말투에서 그런 울림이 느껴졌다. - P611

그가 어디로 갔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건 아마 나뿐이었을 것이다. 소년은 혼자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가는 법을 찾아냈고(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 자기 내부에 있는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 다른 세계로 이동한 것이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근거를 제시할 수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이미 그 도시로 옮겨가고 말았다. 틀림없이. 그 완벽하기까지 한 실종의 양상을 생각하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 P613

그는 진심으로, 진지하게 ‘도시‘로 가고 싶어했으며, 짐작건대 타고난 그 경이로운 집중력이 그 일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렇다. 바꿔 말하자면 그는 ‘도시‘에 다다를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예전에는 나도 갖고 있었던 그 자격을. - P613

소년은 입구인 문에서 그 우람한 문지기를 만나고, 그림자를 떼어내고, 눈에 상처를 낼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도시는 ‘꿈 읽는 이‘를 필요로 했고, 그는 어렵잖게 내 후계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아니,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도시에서 나보다 훨씬 유능하고 유익한 ‘꿈 읽는 이‘가 될 것이다. - P614

그는 사물의 구조를 순식간에 세부까지 파악하는 특수한 능력을 지녔고, 지칠 줄도 질릴 줄도 모르는 강렬한 집중력을 겸비했다. 그리고 지금껏 머릿속에 주입한 방대한 정보 덕분에 스스로가 이미 하나의 도서관ㅡ이른바 지식의 거대한 저수지ㅡ이 되어 있을 것이다. - P614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 그냥 말이 잘 안나왔어"
"아마 혼자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럴걸. 한동안 아무하고도 얘기를 안 하면 말이 잘 안 나올 때가 있어,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 P615

"그래서 그들과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제외하고."
"실은 그 두 사람이 ‘수요일의 소년‘ 형들이었어."
"수요일의 소년?"
"왜, 당신이 가게에 있을 때 갑자기 들어와서 내가 태어난 요일을 가르쳐줬던 특이한 남자애." - P617

가미카쿠시

‘신이 숨기다‘라는 의미. 주로 어린아이들이 이유 없이 행방불명되는 일을 일컫는다. - P617

"생일의 요일을 알려주는 건 그애에겐 말하자면 첫 만남의인사 같은 거야. 자기 나름의 친밀감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꽤 유니크한 인사라고 해야겠네."
"그렇긴 하지." - P619

"관찰력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이런 장사를 하다보니 그쪽으로 조금씩 감이 생겨.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여러 이야기를 하거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하고 그내용은 보통 잊어버리지만 인상은 남지." - P619

"동생이 사라진 걸 알고 곧바로 도쿄에서 돌아와서, 어쩔 줄몰라하는 부모님을 도와 수소문하고 있대. 첫째는 당분간 휴가를 냈고, 둘째는 학교 수업을 빠지고서. 아직 단서 비슷한건 전혀 얻지 못한 모양이지만, 무척 열심히 진지하게 찾아다나는 것 같았어. 둘이 힘을 모아서. 뭐랄까, 마치 무언가를 매우는 것처럼."
‘마치 무언가를 메우는 것처럼.‘ 아마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나도 내심 어렴풋이 느낀 바니까. - P620

그렇게 커피는 내 피가 되고 머핀은 내 살이 되었다. 무엇보다 귀중한 영양원이다. - P622

그리고 FM 라디오로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셔츠 몇 장과 시트를 다림질했다. 시트를 다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라디오 해설자는 당시 러시아에서 보로딘이 음악가보다 화학자로 더 널리 알려지고 존경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 그 현악사중주에 화학자다운 부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매끄러운 선율과 부드러운 하모니・・・어쩌면 그런 것을 화학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 P624

클래식 음악에 대한 나의 상당히 부족한 지식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보로딘은 이른바 ‘러시아 5인조‘의 한 사람이었다.
나머지는 누구였더라?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ㆍㆍㆍㆍㆍ 그다음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냉장고를 정리하면서 어떻게든 그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는다고 이렇다 할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 P625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역까지 걸었다. 복잡한 화학 실험을 하며 머릿속으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는 보로딘의 모습을, 별 이유도 없이 떠올리면서. - P625

"혼자 살다보면 그렇게 소소한 의식이 필요하지. 하루의 끝을 잘 보내기 위해서." - P628

"무슨 얘긴지는 몰라도," 나는 말했다. "말할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생기면 용기 내서 말해두는 게 좋다고 봐. 지금까지 내 소소한 경험에 비춰보면,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그걸 한번 놓쳐버리면 이야기가 쓸데없이 번거로워지는 경우가 많더라고." - P630

"그렇게 말해주면 꽤 기쁜 것 같아."
"나야말로 기쁘다고 해줘서 꽤 기쁜 것 같아. 다만 왠지 하지만...... 이라고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P632

"그래도 서두르진 마. 내 마음과 몸은 조금 떨어져 있거든. 아주 조금 다른 곳에 있어. 그러니까 좀더 기다려주면 좋겠어. 준비가 될 때까지. 이해해? 여러모로 시간이 걸려." - P635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ㅡ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ㅡ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쨌거나 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니까. - P636

"생각나야 할 게 생각나지 않으면 신경쓰여. 당신은 그럴 때없어?"
"나는 생각하기 싫은 일을 잊지 못하는 편이 더 신경쓰이는것 같아."
"사람마다 제각각이군." 나는 말했다. - P636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잠시 후 그녀가 그 침묵을 깼다.
"내 안에 뭐가 꽉 막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여러 가지가 잘풀리지 않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뒤에 혼자 남겨지진 않았어."
그녀는 내가 한 말을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앞으로도 나를 만나준다는 뜻이야?"
"물론." - P636

카운터 위에 놓인 내 손에 그녀가 손을 포갰다. 매끄러운 다섯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조용히 얽혔다. 종류가 다른 시간이 그곳에서 하나로 포개져 뒤섞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슬픔 비슷한, 그러나 슬픔과는 성분이 다른 감정이 무성한 식물처럼 촉수를 뻗어왔다. 나는 그 감촉을 그립게 생각했다. 내 마음에는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도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 - P637

발라키레프, 하고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시험 문제의답을 옆자리에서 몰래 가르쳐주는 친절한 친구처럼. 그렇다. 발라키레프. 이로써 네명이다. 5인조 중 네 명. 이제 한명 남았다. - P637

그녀는 양손으로 감싸듯 얼굴을 가리고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 떨어졌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머물렀다. 눈물이 멈출 때까지. - P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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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연구 사례들을 다양하게 접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공감되는 부분들도 있고,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도 있어서 지루할 틈 없이 읽힌다.

특별히 실험 중에 남자이이와 여자이이를 무의식 중에 다르게 대우하는 외국의 유치원 교사들의 행태를 관찰하는 실험이 있었는데, 이는 비단 외국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공감이 많이 되었던 실험이었다. 그들의 행동이 옳지 않은 것임을 아는 것과 실제 행동하는 것과의 차이가 현실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편향의 문제점을 자각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에는 분명한 갭이 존재하는데, 그 갭을 메우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은 문제인듯 하다.

그나마 희망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이러한 편향의 존재를 아예 자각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비록 실제 행동에서 일부 부족함이 나타날지라도 편향이 있음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행동할 때 편향이 조금이나마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는 각종 연구 결과들을 통해 증명된 데이터들도 존재하기에 어느정도의 신빙성도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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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은 부분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아동 차별주의(childism) 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아동이 어른들보다 열등하는 생각을 지칭하는데, 저자는 이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얘기를 통해 어른들의 아이들에 대한 편향이 아이에게 스트레스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야기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밑줄 친 부분에 관련된 얘기들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공감이 많이 되었던 부분이었다. 특별히 피어스라는 사람이 말한 부분은 그 중에 핵심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궁금하신 분들은 밑줄 친 부분을 참조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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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부분 막판에 개별적인 노력만으로는 사회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편향을 극복하기 힘들다고 하면서 사회전체적인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얘기가 상당부분 공감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노력이 일단은 선행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함으로써 현실적인 변화의 첫 걸음을 잘 떼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 부분도 개인적으로 공감이 많이 되었고, 뜬 구름 잡는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라 아주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조금씩 시작해서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가자는 저자의 말에 여러모로 공감할 수 있었다.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무슨 생각을 할지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대중 합의의 신호다.‘

그리고 결국 대중 합의는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바꿀 수 있다. 특정한 행동이 정상이고 대중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그런 행동을 더 많이 하게 된다.

표준은 워낙 강력한 힘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의 행동이 억제되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나쁜 행동을 멈추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나쁜 행동을 한다고 말하면 실제로는 그런 행동이 늘어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있다‘는 발언에 ‘많은 사람이 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강력하고 표준적normative 이지만 해로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편견은 사회적입니다. 자신이 여론과 한편임을 믿고나면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자동적 편견의 표현까지 타인의 신조에 대한 인지에 영향을 받았다.

인지된 표준을 조작함으로써 전혀 다른 맥락에서도 각자가 속한 집단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구성원의 생각을 개조할수 있다.

다른 집단의 재현을 바꿈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 재현media representation의 맥락에서 이런 도구를 작동시키는 것은 누가 ‘우리‘이고 ‘우리 아닌자‘ 인가를 보는 눈이 누구의 것인지에 달려있다는 사실때문에 복잡해진다.

〈세서미 스트리트〉의 샬럿콜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배울 때 다른 집단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배우고 있다. 내가 그 다른 사람에 대해 배울 때 다른 집단의 누군가는 그들 자신에 대해 배우고 있다."

덧붙이자면, 우리 집단에 누가 소속되고 소속되지 않는가 하는 판단 역시 문화의 산물이다. 누가 이런 범주의 안과 밖에 맞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문화다.

편향 중 대다수가 인간을 범주에 따라 배치하려는 우리의 성향에서 나온 산물이라면, 그 범주가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들을 덜 엄격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동영상을 본 교사들은 자신들이 남자아이가 시끄럽게 굴고,
뛰고, 거칠게 행동하는 것을 더 많이 참아주었음을 알았다.

한편 여자아이에게는 조용히 하라고 하고, 착하게 행동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말했다.

여자아이의 충동성에 대해서는 인내심이 적었고, 자제력을  더 많이 가지기를 기대했지만, 남자아이에게는 같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교사들은 결국 새로 만든 ‘hen‘이라는 단어를 썼다. hen은 1960년대에 도입되어 2015년에 스웨덴어 사전에 등록된 단어로, 성별 중립적 대명사다.

심지어 여자아이에게 "정말 예쁜 옷이구나." 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해한 칭찬도 어떤 가정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 발언은 예쁘다는 것이 여자아이들의 목표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쁜 것이 중요하다는 뜻을 전달한다. 이것은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칭찬하고 보상하는 일을 많이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고정관념과의 싸움이 그저 자동차와 인형을 치워버리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작업해야 하고 끊임없이 본인의 성향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딱지를 붙이지 않으려는 시도는 젠더 외의 것으로도 확장된다.

(스웨덴어에는 ‘아픈 아이를 돌보기위해 집에 남는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 vabba가 있을 정도다).

스웨덴은 아동에 대한 체벌을 범죄로 간주한 세계 최초의 나라다. 법은 ‘아이들은 각자의 인격과 개별성에 대한 존중 아래 대우받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라잘린의 학교에서 내가 놀란 점은 젠더에 대한 그들의 접근법이 아이들은 중요시 되어야 할 인간이며, 자신들의 삶에 대해 주체성을 가져야하는 인간이라는 광범위한 아동 철학과 부합하게 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미니어처가 아니다. 아이는 어른들의 좀 우스꽝스러운 버전이 아니다. 아이들은 온전하게 존중받아야하는 인간이다.

한 교사는 어떤 아이가 터무니없거나 의도치 않게 자신을 웃게 만드는 재미있는 말을 할 때 웃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그 아이가 진지하게 하는 말을 듣고 웃으면 아이는 상처를 입는다.
"이것은 세뇌시키는 태도이기도 해요. 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지요."

사실 아이들을 열등하고 가치 없는 존재로 다루는 것, 그들을 위축시키고 존엄성을 공격하는 대상으로 삼는것 역시 편견의 한 형태다.

아동 차별주의 childism

어른이 아이에 비해 우월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사고방식. 쉽게 드러나지 않는 미세한 차별이 그 핵심 원리다.

물론 아이들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어른의 인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필요가 일종의 소유로 변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부모들이 자녀를 자산이나 자신의 연장으로 보고, 모든 경멸적인 행동이 아이에게 그들이 열등하다는 뜻을 전달한다.

피어스는 어른이 아이에게 뭔가를 가져오라고 시키는 상황을 모든 억압이 지닌 네 측면을 모두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한다. 억압자가 피억압자의 공간과 운동성, 시간, 에너지를 통제하는 것이다. 아이가 이런 일에서 양보할 때마다 아이의 스트레스는 커진다.

사실은 어른에 의한 아동의 지배는 아마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지배의 최초 형태일 것이다.

아이들이 의도치 않게 우스운 말을 할 때 내가 얼마나 자주 웃음을 터뜨렸던가. 그 아이는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지하게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경멸하는 듯한 말투를 써서 그들이 덜 귀중한  존재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무시하는 듯한 동작으로 나는 그들을 덜 귀중한 존재로 대우했다.

나는 어른들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언제나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나 자신의 필요가 짐작과 투사를 만들어내던 때 말이다.

당신은 화가 난 게 틀림없어요. 당신은 이런 식으로 느끼면 안 됩니다.
당신은 이렇게 느껴야 해요. 당신은 그래야 합니다. 당신은 그래요.

라잘린과 그 학교의 교사들은 자유가 하나가 아니라 두가지임을 이해한다. 무엇을 할 자유가 있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도 있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할ㅡ성장할, 탐구할, 선택할ㅡ자유를 주려면 그들에게 타인들이 기대치의 그물망을 조이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도 주어야 한다. 더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편향으로부터의 자유다. 이 가능성을 창출할 기회는 모든 교류, 깃털처럼 가벼운 모든 순간에 놓여있다.

어른들이 이 순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에만 아이는 환원 불가능하고 복잡한 자아로서 세상에 등장할 수 있다.

실제든 상상된 것이든, 획기적인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타인과의 모든 만남에서 같은 일이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난다. 어린아이를 포함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물려받은 관념과 신화, 통계 수치와 고정관념에 의존해 해석하면 더 단순하고 더 편리하다.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고 여건이다.

내가 타인을 위해 이 편리함을 희생할 수 있을까? 희생하게 될까? 우리가 서로에게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 실천하게 될까?

그 아이의 역사는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을 범주로 구분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세상 역시 그아이에게 이제 막 의미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치 반짝이는 사슬 한 줄처럼, 아직 그 아이와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나중에는 이익과 불이익을 가져다주고 그녀를 앞으로 나가게 밀어주고, 뒤로 끌어당기게 될 의미들의 사슬말이다.

그러나 그 마당에는 어떤 순간이 있었다.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알기 전에 함께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단어를 소리내서 말하던 순간이. 머리 위에 솟은 마당의 벽은 광대한 액자처럼 드넓은 하늘을 담아냈다.

우리는 무의식적이고 의도적이지 않고 예상치 못했던 편향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 대답이 긍정임을 믿는다.

이런 종류의 변형ㅡ몇 백년, 심지어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거짓과 검토되지 않은 관념과 반사 반응을 포기하는 것ㅡ을 이루려면 크나큰 노력, 그리고 노력 이전에 변화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또 마음을 열고 변화하려는 열정이 지식이 추가될 때 더 강건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싹이 햇빛과 비를 맞은 다음에 더 튼튼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사유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은 빨리 이루어지지도 않고 일정하게 진행되지도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시도하더라도 그렇다. 또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개별적 편향을 줄인다고 해서 불균형과 사회 활동의 불공정성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역사적 배제, 불평등한 기회, 착취적 경제정책, 부패한 기초 위에 세운 다른 불공평한 구조의 유산이다. 시스템 상의 큰 변화 ㅡ공적인 안전과 감옥의 재발명에서 광범위한 경제적 수선에 이르는ㅡ만이 그런 거대하고 장기적인 불의를 교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내재적이고 개인적인 변화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법률과 제도는 인간의 심장, 동기, 의식에서 출현한다.

정책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며, 해석하고 집행하고 그것들과 함께 사는 것은 인간이다.

구조나 법률을 해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의 대체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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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마지막 부분에 이어서 오늘 읽은 초반부에서는 ‘나‘가 도서관 직원에게 ‘그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그 소년‘의 가정형편이 어떻고 부모님이나 형제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같은 것들이다.

‘나‘는 얘기를 듣고 난 뒤 ‘그 소년‘의 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에 어떤 확고한 기준 같은 것이 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될 듯 하다. 여기서 일일이 말하기엔 말이 너무 길어지기도 할 뿐더러 자칫 ‘스포‘가 될 수도 있기에 이정도로만 한다. 다만 독자인 내가 여기 밑줄 그은 것만 읽어봐도 대략적인 유추는 가능할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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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나‘가 고야스 씨의 무덤에 다녀오는 일을 마치고 습관적으로 들르는 카페가 있다. 앞에서도 이 카페와 관련된 간단한 이야기들이 잠깐잠깐씩 나왔었는데 그 때는 이야기의 포커스가 위에서 말한 ‘소년‘에게 가 있었다면, 이제는 카페를 운영하는 ‘한 여자‘ 에게로 포커스가 옮겨지는 듯 하다. 갑자기 ‘나‘와 이 ‘여자‘의 관계가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한 층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뒷 내용을 아직 몰라서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독자인 나의 촉(?)으로 봤을 땐 뭔가 이야기 상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물일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이다.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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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연결고리(?)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소년은 이 현실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둔 기구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리고 주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그러니 매어둔 고리를 풀고 이 세계를 영원히 떠나버리는 일에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 P535

나는 무심결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 지상 어딘가에단단히 이어져 있을까? 그곳에 뿌리내리고 있을까? 나는 블루베리 머핀을 생각했다. 역 앞 커피숍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폴 데즈먼드의 알토색소폰 음색을 생각했다. 꼬리를 세우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야위고 고독한 암고양이를 생각했다. 그것들은 내 정신을 이 세계에 조금이라도 붙들어매주고 있을까? 아니면 너무도 하찮아서 논할 가치도 없는 존재들인 걸까? - P535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 도시로 갈 생각이니?"
소년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이어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그 손가락을 허공으로 향했다.
나는 그 제스처를 나의 언어로 치환했다. "내가 너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그 뜻이야?"
‘제러미 힐러리 붑 박사‘가 프린트된 파카를 입은 소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 P536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나도 내 의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그 도시에 갈 수 있는 건 아냐. 하물며 너를 그곳까지 안내하는 건 도저히 자신이 없어. 나는 에떤 우연으로, 어쩌다가 그곳에 다다랐을 뿐이야." - P536

내가 그 문을 통과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다. 이미 그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으니까. 소년을 배웅하고, 문이 다시 닫히는 걸 지켜본 뒤, 나는 혼자 이쪽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 P537

소에다 씨에게 소년이 지금 읽는 책의 제목을 물으면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소년이 빠져 있는 책은 『아이슬란드 사가saga』『비트겐슈타인, 언어를 말하다』 『이즈미 교카 전집』 『가정의학백과』 등이었다.
하나같이 꽤 두꺼운 책이다. 보아하니 내용을 따지기보다 무건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얇은 책은 성에 차지 않는 것이리라. 식욕이 왕성한 사람이 식당에서 가장 두툼한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P538

우리는ㅡ소년과 나는ㅡ이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각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 P538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로 가기그곳의 주민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이쪽 세계에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이쪽 세계에 그를 붙잡아둘 만한 힘을 지닌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분명하다. 그러나 소년의 힘만으로는 그 도시에 갈 수 없다. 나의 ‘안내‘를 필요로 한다. 그 도시로 통하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은ㅡ혹은 한 번이라도 그 길을 밟아본 사람은ㅡ나 하나 뿐이니까. - P539

하지만 나 역시 그 도시로 향하는 길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진 못한다. 예전에 간 적이 있을 뿐이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무의식중에 그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같은 식으로 다시 가보라고 한들 방법을 모른다.
그리고 또하나, 내가 판단하기 힘든 것이 있다. 소년을 저쪽세계로 데려가는 일이 과연 올바른 행위인가 하는 문제다. 그건 도덕적으로 용인되는 일인가? 만약 소년이 그 도시에 들어가 ‘꿈 읽는 이‘로 정착한다면, 그 결과 아마 이 현실세계에서는 그의 존재가 소멸할 것이다. - P539

나는 그림자가 죽지 않았기에, 그리고 그림자를 벽 바깥으로 도망시켰기에 이쪽 세계로 복귀할 수 있었고(좀더 정확히 말하면 돌려보내졌고), 결과적으로 이 세계에서 존재가 지워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 P539

그러나 만약 소년이 자신의 그림자와 떨어지고 그 그림자가목숨을 잃는다면, 소년의 존재는 이쪽 세계에서 영원히 결정적으로 상실된다. - P539

아무리 소년 스스로가 진지하게 원한다 해도 또한 그것이 소년의 인생에서 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인다 해도, 그건 인간으로서 도의에 반하는 행위가 아닐까? - P540

"M**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저는 물론 알 길이 없어요. 감정을 겉으로 거의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맞아요. 집이 결코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아버지, 지나치게 간섭하는 어머니. 어느 쪽도 그애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도 없는 듯하죠." - P543

소에다 씨의 얘기를 듣고 소년의 가정 사정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되어서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졌다.
그 소년에게는 집을 떠나기를, 이 세계에서 나가기를 간절히 원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리면 어머니는 틀림없이 비탄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소년을 위해서는 어머니와 떨어지는 편이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새끼고양이들이 어느 시점에 어미에게서 떨어져 자립하는 것처럼, 새끼를 잃은 어미고양이는 한동안 주위를 필사적으로 찾아다니지만 이윽고 단념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다음 사이클로 들어간다. 동물들에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계절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 P544

또한 소년에게는 친구라고 할 만한 상대가 한 명도 없다. 이 세계에서 어디까지나 고립된 존재다. 사라진다 해도 그 공백은 순식간에 메워질 것이다. 소리도 없이, 눈에 띄는 파문도 일으키지 않고, 매우 조용히. - P545

가령 내가 그 소년의 입장이라면ㅡ소에다 씨가 말했다시피그에 입장에서 감정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지만ㅡ역시 이 마을에 머무르기보다 다른 세계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싶다고생각할 것이다.
이를테면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 P545

아마 고야스 씨의 영혼은 이미 이 세계를 벗어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대화한 지 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 역시 이 지상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 두 사람이 실제로(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건 분명 무미건조한 세계일 것이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호감과 공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 P548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어요. 봐요, 지난번에 그 남자애도 말했잖아요,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수심이 가득하다고."
"그애가 말한 게 아니에요. 제가 그랬죠. 그런 동요 가사가 있다고. 그애는 ‘당신은 수요일에 태어났다‘고만 했고요."
"그랬던가."
그애는 기본적으로 사실만 말해요."
"사실만 말한다." 그녀는 감탄한 듯 되풀이했다. "대단한 걸요." - P551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무언가가 나를 붙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가게로 돌아가, 카운터 안쪽에서 커피를 내리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P552

나는 가게를 나와 집까지 걸었다. 걸으면서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그녀에게 식사를 권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거의 자동적으로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여자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한건 생각해보면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대체 무엇이 나를 그러도록 만들었을까? 혹시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 P553

설령 그렇다 해도 그녀의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지는 알 수 없다. 전부터 막연한 호감은 있었지만 딱히 무언가를 보다ㅡ친밀한 유대 같은 것을ㅡ원하는 유의 호감은 아니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 내게 커피와 머핀을 내주는 인상 좋은 삼십대중반의 여자, 그게 다였다. 체격이 늘씬하고, 혼자서 기민하게 움직인다. 미소에는 자연스러운 따뜻함이 담겨 있다. - P553

그날 그녀의 어딘가에 특별히 마음이 끌려서 식사를 권하게된 것이리라. 그녀와 나눈 짧은 대화 속의 무언가가 내 마음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내가 혼자 지내는 것에  지쳐서, 하룻저녁 기분좋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았을 뿐인지도. 하지만 아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직감이 그렇게 알렸다. - P553

어쨌거나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반쯤무의식적으로,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식사를 권했고, 그녀는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많은 일이 그렇듯 당사자의 의도나 계획과 무관하게, 자연스럽고 멋대로 나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면 지금 내게는 의도나 계획 따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 P554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생전에 육백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작곡가로도 인기를 누렸고 명바이올리니스트로 화려하게 활약했지만, 그후 오랜 세월 전혀 회고되지 않아 잊힌 과거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에 재평가의 기회가 왔고, 특히 협주곡집  <사계>의 악보가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사후 이백 년이 넘어서야 단번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이백 년 넘게 잊힌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백 년은 긴 세월이다. ‘전혀 회고되지 않고 잊힌‘ 이백년. 이백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아니, 이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 P555

하지만 전부 내 멋대로 해본 추측일 뿐이다. 소년의 뇌속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그 자신밖에 모르는 일이다. - P556

그럼에도 나는 눈을 감고서 고독한 소년의 내부에 세워진 지의 기둥 (이라고 해야 할 것)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땅속 저 아래 솟구친 거대한 종유동의 기둥 같은 것이리라. 사람이 아직 발을 들인 적 없는 칠흑의 암흑 속에,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고 당당히 기립해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이백 년은 하찮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 P556

어쩌면 그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들어감으로써 그 ‘지의기둥‘을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지의 적절한 아웃풋 통로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 P556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 자신이 그대로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 - P557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말을 했다. "혹시 싫지 않다면, 우리집에 가지 않겠어요? 간단한 요리는 바로 해줄  수 있는데." - P559

"난 이 년 전쯤에 이혼했어요." 그녀는 노면이 얼마나 열어붙었는지 확인하듯 조심스레 발밑을 살피면서 말했다. "그 과정에서 좀 시달리느라 한동안 기분이 우울했죠. 아무런 의욕도 안 생기고. 그래서 어디든 좋으니 삿포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보자 싶었어요.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좋았고." - P561

"여기 온 뒤로 이렇게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아무한테도."
"깊은 구덩이를 파고, 밑바닥을 향해 죄다 털어놓은 적은?"
"없어요. 당신은?"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있을지도." - P562

서로의 처지가 조금은 비슷하다는 데서 친밀감 가까운 감정이 싹텄는지도 모른다. 도호쿠 지방의 작은 산속 마을에 바람에 실려오듯 다다른 홀몸의 외지인들이다. 원래 알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앞으로 이곳에 뿌리를 내릴지 어떨지. 그것도 확실치 않다. - P562

누군가와 식사 자리를 함께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같이 식사한 게 언제였을까?). 그리고 제법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짝을 맞춘 식기를 테이블에 내놓고, 편한 대화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는 것. 우리는 음식을 조금씩 입으로 가져가고 와인잔을 기울이면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었으므로 그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다. - P564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작게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무튼 언제 어디선가 중요한 무언가가 망가져버린 것처럼, 뭘해도 미묘하게 엇갈렸어요. 대화가 자꾸 어긋나고, 이런저런 취향이나 사고방식의 차이가 점점 드러났고, 그리고 섹스도.... 음, 대충 뭔지 알겠죠?" - P566

"결국엔 그 사람이 회사 동료와 외도 비슷한 걸 했고, 그걸 나한테 들킨 게 이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어요. 뭘 숨기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랬군요." 나는 말했다.
"그래도 그 여자와 그렇게 깊은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얼결에 그랬다고 할까,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할까. 그 사람도 반성하고 진지하게 사과했죠.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뭐, 흔한 얘기예요.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죠." - P566

"제일 힘들었던 건 그 사람과의 이혼 자체보다. 내 마음에 확신을 품을 수 없게 됐다는 거였어요." 그녀는 손에 든 와인잔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앞으로 어떤 남자를 알아도, 그리고 결혼 같은 걸 해도 상대방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예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 P567

"혹시 고등학교 동창회 나가본 적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동창회는 한 번도 나간 적 없는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옛날 일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꼭 그런 건 아니고, 우리 학교, 우리 반이라는 것에 솔직히 큰 소속감을 못 느꼈어요. 같은 반이었던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 P568

"같은 반에 좋아하던 애 없었어요? 멋지다고 생각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었지 싶어요."
"옛날부터 고독을 좋아했나?"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 나는 말했다.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러게. 그럴지도 몰라요." - P568

"추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니까."
"더 추운 밤도 있었어요?" 그녀가 물었다.
"더 추운 곳도 있었어요." - P569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변길을 걸었다. 그녀의 부츠 급이 군데군데 얼어붙은 지면을 밟으며 까드득까드득 딱딱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도서관의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물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밤꾀꼬리가 지저귀고, 냇버들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가 걸친 오래된 레인코트는 바스락바스락 메마른 소리를 냈다.
내 안에서 시간이 뒤섞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끄트머리가 미묘하게 포개지고 있다. 만조 때 하구에 바닷물과 강물이 사방으로 섞여드는 것처럼. - P569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추위를 환영했다. 그게 내 안에 있는 혼란을 조금쯤 잠재워주었다. - P570

"그래도 궁금해요.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당신이 완성됐는지, 그걸 알고 싶은데."
"그렇게 흥미로운 과정은 아니에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서 평범한 일을 하며 혼자 조용히 살았지. 흔하디흔한 인생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도저히 흔하디흔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녀가 말했다. "결혼 생각은 해본 적 있어요?"
"몇 번." 내가 말했다. "나도 평범한 인간이니까. 남들처럼 생각해본 적도 있죠. 그런데 그런 가능성이 생길 때마다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또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는 게 귀찮아졌고."
"사랑하는 게?"
그 말에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은 백지의 입김이라는 형태를 띠고 허공에 떠 있었다. - P570

"또 만나자고 해도 될까요?" 나는 출입문 안쪽에 서서 그녀 에게 물었다. 그 말 역시 거의 무의식중에 자연히 입에서 튀어 나왔다. 마치 숙련된 복화술사가 어딘가에서 내 입을 멋대로 움직여 말을 시키는 것처럼. - P572

"가게는 무슨 요일에 쉬죠?"
"매주 수요일이 휴일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다른 날은 아침 열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열고, 도서관은요?"
"매주 월요일이 휴관일. 다른 날은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예섯시까지 개관하고."
"아무래도 우린 해가 진 뒤에 만나는 수밖에 없겠네요."
"두 마리 부엉이처럼."
"어두운 숲속 깊은 곳, 두 마리 부엉이처럼." 그녀가 말했다.
"정기휴일을 월요일로 바꾸면 어때요. 당신이 주인이니 무슨 요일에 가게를 닫건 당신 자유니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렇네요. 조금 생각해봐야겠어요." - P572

죽은 자의 영혼에 어느정도 능력이 있는지, 살아 있는 나는 짐작할 수 없다. - P576

추운 밤 붉게 빛나는 불에는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 집합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다. - P576

뭐가 어찌됐건 그녀의 모습이 내 마음 한구석(그러나 시선이 틀림없이 닿는 장소)에 머무른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내게 떠올리게 하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모습은 다른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 독자적인 존재로 내 안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 P578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가?
대답은 아마 노일 것이다. 내 생각에, 나는 그 커피숍 여자를 사랑하진 않는다. 자연스러운 호감을 느끼지만 사랑과는 다르다. 사랑을 하기 위한 내 심신의 기능은 상대에게 나 자신을 고스란히 내주고 싶다는 종합적 충동 같은 것은 아주오래전에 다 타버린 듯하다. 언젠가 고야스 씨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 P579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거친 몇 번의쓰라린 경험이 명료하게 알려주었다. 주입시켰다, 고 해야 할까. 그렇다, 나는 몸으로 그 사실을 배웠다………… 적지 않은 수업료를 내고. 가능하다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주고, 그 결과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는 경험은. - P579

과거의 성욕과 현재의 성욕을 정확히 가려낼 수 없었다.
그 두 가지가 내 안에서 맞닿아 하나로 뒤엉켰다. 그것이 나를 적지 않은 혼란에 빠트렸다.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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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100자평] 프란츠 카프카

3년 전이라 모든 작품이 일일이 기억나진 않지만 대표작이었던 ‘변신‘ 만큼은 나름 임팩트있게 느껴져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제 기억에 어렴풋이나마 남아있는 듯 합니다. 이 책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모음집이라 작가의 다양한 작품 라인업이 나와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때는 제가 북플을 하지 않을 때라 밑줄을 친다거나 읽으면서 간략한 후기 같은 것들을 남기지 못한채 지나갔던거 같은데, 예전 100자 평에도 썼듯이 그냥 아무런 배경지식없이 작품만 읽으면 굉장히 난해하지만 책의 뒷면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고 보니 읽었던 작품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나마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이나 그의 작품세계가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할만한 책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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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3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3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