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는 사람들에게 무슨 생각을 할지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대중 합의의 신호다.‘
그리고 결국 대중 합의는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바꿀 수 있다. 특정한 행동이 정상이고 대중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그런 행동을 더 많이 하게 된다.
표준은 워낙 강력한 힘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의 행동이 억제되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나쁜 행동을 멈추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나쁜 행동을 한다고 말하면 실제로는 그런 행동이 늘어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있다‘는 발언에 ‘많은 사람이 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강력하고 표준적normative 이지만 해로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편견은 사회적입니다. 자신이 여론과 한편임을 믿고나면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자동적 편견의 표현까지 타인의 신조에 대한 인지에 영향을 받았다.
인지된 표준을 조작함으로써 전혀 다른 맥락에서도 각자가 속한 집단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구성원의 생각을 개조할수 있다.
다른 집단의 재현을 바꿈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 재현media representation의 맥락에서 이런 도구를 작동시키는 것은 누가 ‘우리‘이고 ‘우리 아닌자‘ 인가를 보는 눈이 누구의 것인지에 달려있다는 사실때문에 복잡해진다.
〈세서미 스트리트〉의 샬럿콜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배울 때 다른 집단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배우고 있다. 내가 그 다른 사람에 대해 배울 때 다른 집단의 누군가는 그들 자신에 대해 배우고 있다."
덧붙이자면, 우리 집단에 누가 소속되고 소속되지 않는가 하는 판단 역시 문화의 산물이다. 누가 이런 범주의 안과 밖에 맞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문화다.
편향 중 대다수가 인간을 범주에 따라 배치하려는 우리의 성향에서 나온 산물이라면, 그 범주가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들을 덜 엄격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동영상을 본 교사들은 자신들이 남자아이가 시끄럽게 굴고, 뛰고, 거칠게 행동하는 것을 더 많이 참아주었음을 알았다.
한편 여자아이에게는 조용히 하라고 하고, 착하게 행동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말했다.
여자아이의 충동성에 대해서는 인내심이 적었고, 자제력을 더 많이 가지기를 기대했지만, 남자아이에게는 같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교사들은 결국 새로 만든 ‘hen‘이라는 단어를 썼다. hen은 1960년대에 도입되어 2015년에 스웨덴어 사전에 등록된 단어로, 성별 중립적 대명사다.
심지어 여자아이에게 "정말 예쁜 옷이구나." 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해한 칭찬도 어떤 가정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 발언은 예쁘다는 것이 여자아이들의 목표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쁜 것이 중요하다는 뜻을 전달한다. 이것은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칭찬하고 보상하는 일을 많이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고정관념과의 싸움이 그저 자동차와 인형을 치워버리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작업해야 하고 끊임없이 본인의 성향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딱지를 붙이지 않으려는 시도는 젠더 외의 것으로도 확장된다.
(스웨덴어에는 ‘아픈 아이를 돌보기위해 집에 남는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 vabba가 있을 정도다).
스웨덴은 아동에 대한 체벌을 범죄로 간주한 세계 최초의 나라다. 법은 ‘아이들은 각자의 인격과 개별성에 대한 존중 아래 대우받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라잘린의 학교에서 내가 놀란 점은 젠더에 대한 그들의 접근법이 아이들은 중요시 되어야 할 인간이며, 자신들의 삶에 대해 주체성을 가져야하는 인간이라는 광범위한 아동 철학과 부합하게 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미니어처가 아니다. 아이는 어른들의 좀 우스꽝스러운 버전이 아니다. 아이들은 온전하게 존중받아야하는 인간이다.
한 교사는 어떤 아이가 터무니없거나 의도치 않게 자신을 웃게 만드는 재미있는 말을 할 때 웃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그 아이가 진지하게 하는 말을 듣고 웃으면 아이는 상처를 입는다. "이것은 세뇌시키는 태도이기도 해요. 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지요."
사실 아이들을 열등하고 가치 없는 존재로 다루는 것, 그들을 위축시키고 존엄성을 공격하는 대상으로 삼는것 역시 편견의 한 형태다.
아동 차별주의 childism
어른이 아이에 비해 우월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사고방식. 쉽게 드러나지 않는 미세한 차별이 그 핵심 원리다.
물론 아이들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어른의 인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필요가 일종의 소유로 변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부모들이 자녀를 자산이나 자신의 연장으로 보고, 모든 경멸적인 행동이 아이에게 그들이 열등하다는 뜻을 전달한다.
피어스는 어른이 아이에게 뭔가를 가져오라고 시키는 상황을 모든 억압이 지닌 네 측면을 모두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한다. 억압자가 피억압자의 공간과 운동성, 시간, 에너지를 통제하는 것이다. 아이가 이런 일에서 양보할 때마다 아이의 스트레스는 커진다.
사실은 어른에 의한 아동의 지배는 아마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지배의 최초 형태일 것이다.
아이들이 의도치 않게 우스운 말을 할 때 내가 얼마나 자주 웃음을 터뜨렸던가. 그 아이는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지하게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경멸하는 듯한 말투를 써서 그들이 덜 귀중한 존재라고 느끼게 만들었다. 무시하는 듯한 동작으로 나는 그들을 덜 귀중한 존재로 대우했다.
나는 어른들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언제나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나 자신의 필요가 짐작과 투사를 만들어내던 때 말이다.
당신은 화가 난 게 틀림없어요. 당신은 이런 식으로 느끼면 안 됩니다. 당신은 이렇게 느껴야 해요. 당신은 그래야 합니다. 당신은 그래요.
라잘린과 그 학교의 교사들은 자유가 하나가 아니라 두가지임을 이해한다. 무엇을 할 자유가 있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도 있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할ㅡ성장할, 탐구할, 선택할ㅡ자유를 주려면 그들에게 타인들이 기대치의 그물망을 조이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도 주어야 한다. 더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편향으로부터의 자유다. 이 가능성을 창출할 기회는 모든 교류, 깃털처럼 가벼운 모든 순간에 놓여있다.
어른들이 이 순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에만 아이는 환원 불가능하고 복잡한 자아로서 세상에 등장할 수 있다.
실제든 상상된 것이든, 획기적인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타인과의 모든 만남에서 같은 일이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난다. 어린아이를 포함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물려받은 관념과 신화, 통계 수치와 고정관념에 의존해 해석하면 더 단순하고 더 편리하다. 그것이 우리의 습관이고 여건이다.
내가 타인을 위해 이 편리함을 희생할 수 있을까? 희생하게 될까? 우리가 서로에게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 실천하게 될까?
그 아이의 역사는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을 범주로 구분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세상 역시 그아이에게 이제 막 의미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치 반짝이는 사슬 한 줄처럼, 아직 그 아이와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나중에는 이익과 불이익을 가져다주고 그녀를 앞으로 나가게 밀어주고, 뒤로 끌어당기게 될 의미들의 사슬말이다.
그러나 그 마당에는 어떤 순간이 있었다.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알기 전에 함께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단어를 소리내서 말하던 순간이. 머리 위에 솟은 마당의 벽은 광대한 액자처럼 드넓은 하늘을 담아냈다.
우리는 무의식적이고 의도적이지 않고 예상치 못했던 편향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 대답이 긍정임을 믿는다.
이런 종류의 변형ㅡ몇 백년, 심지어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거짓과 검토되지 않은 관념과 반사 반응을 포기하는 것ㅡ을 이루려면 크나큰 노력, 그리고 노력 이전에 변화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또 마음을 열고 변화하려는 열정이 지식이 추가될 때 더 강건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싹이 햇빛과 비를 맞은 다음에 더 튼튼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사유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은 빨리 이루어지지도 않고 일정하게 진행되지도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시도하더라도 그렇다. 또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개별적 편향을 줄인다고 해서 불균형과 사회 활동의 불공정성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역사적 배제, 불평등한 기회, 착취적 경제정책, 부패한 기초 위에 세운 다른 불공평한 구조의 유산이다. 시스템 상의 큰 변화 ㅡ공적인 안전과 감옥의 재발명에서 광범위한 경제적 수선에 이르는ㅡ만이 그런 거대하고 장기적인 불의를 교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내재적이고 개인적인 변화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법률과 제도는 인간의 심장, 동기, 의식에서 출현한다.
정책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며, 해석하고 집행하고 그것들과 함께 사는 것은 인간이다.
구조나 법률을 해체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의 대체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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