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읽은 내용에 연이어서 내용이 이어진다. ‘그 소년‘이 어느날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자, ‘나‘는 ‘그 소년‘의 아버지와 만난 뒤 얼마지나지 않아 ‘그 소년‘의 형들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그 소년‘과는 결이 완전히 달라서 사회적으로 아주 잘나가는, 소위말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동생의 실종 소식에 ‘나‘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게 된다. 오늘 내용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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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이어서 갑자기 ‘나‘는 꿈을 꾸는데, 거기서 신기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스포‘의 위험때문에 자세히 얘기할 순 없지만, 독자인 나는 어떤 특정 부분에 이른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왔던 독자들이라면 비슷한 포인트에서 전율을 느끼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아마 아실 테지만 저희 동생은, M**은 이른바 평범한 아이는 아닙니다." 의대생 동생이 입을 열었다. "통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능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어요. 보통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능력입니다. 어쩌면 그만큼 신의 영역에 가까이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어디선가 신의 금기를 건드릴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일지도요."
나는 말했다. "M**이 보통 사람에 비해 스피리추얼한 영역에 보다 가까이 있다는 말인가요?"
"네, 어쩌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 P642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애 쪽에서 저희에게 말을 붙인 적이라곤 없어요. 늘 자기만의 세계에 꽁꽁 틀어박혀있습니다. 바다 밑바닥의 굴조개처럼. 하지만 선생님에게는 M**이 먼저 나서서 말을 걸었다고요." - P644

"그 지도를 갖고 계신가요?"
"아뇨, 지금 제게는 없습니다. M**이 가져가서요." 거짓말이다. 지도는 우리집 책상서랍에 들어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들에게 지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 P645

나는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의 개요를 두 사람에게 간략히 알려주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동생의 행방을 찾고 있다. 내가 거절할 순 없다. - P646

"그애는 무엇하나가 눈에 들어오면 일반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집중력을 발휘합니다." - P647

"그래도 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M**이 그 도시에 마음이 끌린 건 아마 그곳에서는 두 분이 말씀하시는 사회적 적응력 같은 게 불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애가 그 도시에서 해야 할 일이라면 도서관을 오가며 특수한 책을 읽는 것뿐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마을에서 이 도서관에서 매일 하던 일과 기본적으로 같지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아요. 그리고 그 도시에서는 그 책을 읽는 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 P649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도서관 정원을 천천히 가로질러가던 야윈 암고양이를 문득 떠올렸다. 이어서 그어미와 다섯 마리 새끼고양이를 질릴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바라보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지만. - P650

정확히 말해 그 도시는 열일곱 살의 나와 열여섯 살의 소녀가 함께 힘을 모아 세운 것이다. 나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꺼낼 순 없다. - P650

"제가 생각하기에 도시를 둘러싼 벽이란 아마 선생님이라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의식일 겁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빙산과 같아, 수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건 극히 일부입니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가라앉아 감춰져 있습니다." - P651

"나는 물었다. "의학도라고 들었는데, 어느 쪽 전문이신가요?"
"일단은 외과의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뇌신경외과를 전문으로 삼으려 하고요. 하지만 정신의학에도 관심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뇌신경외과와 겹치는 분야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내가 말했다. "그쪽으로 진로를 잡은 것에 동생M**의 영향도 있었을까요?"
"네, 그렇죠.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겁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요." - P651

"예를 들어 M**은 그 도시로 갈 수 있는 통로 같은 걸 발견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애는 고열에 시달렸으니까요. 그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 통로를 찾아서 집을 나간 겁니다. 잠겨 있는 집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밖으로 나갔죠. 잠옷 한장만 입고. 하지만 물론 그런 통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몹시 추운 밤이었으니…………"
동생이 얘기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길로 가까운 산속에 들어갔다가 추위로 의식을 잃었는지도 모르죠. 그게 저희가생각해낸, 가장 있을 법한 가설입니다." - P652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간 도쿄를 떠나 이곳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현실적인 희생을 치렀을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에 쫓겨 바쁜 법이다. - P653

"비유적인지, 상징적인지, 암시적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M**이 어떤 통로를 발견해서 그 도시로 가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수면 아래 깊은 곳, 무의식의 어두운 영역으로요." - P653

설령 그곳에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아마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이쪽 세계로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으리라. 물론 형들에게그런 말을 할 순 없다. - P654

"비유적인지, 상징적인지, 암시적인지 잘 모르겠지만"이라고 의대생 동생은 말했다.
아니, 그건 비유도 상징도 암시도 아닌, 흔들림 없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나는 현실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그 현실의 도시 거리를 걷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을, 그리고 그 도시를. - P654

안쪽 벽에 딱 하나 작은 나무문이 있었다. 창고 아니면 옷장같다. 나는 그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가능하면 열고 싶지 않았지만 역시 열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를 찾아 여기까지 먼길을 왔으니, 닫힌 문을 열어보지 않고 물러날 순 없다. - P657

안에 있는 건 인형 하나뿐이었다. 주위가 어두운 탓에 그게 나무로 조각한 인형이란 걸 알아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상당히 큰 인형이다. 키가 1미터는 넘어 보인다. 팔다리 관절이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는지, 피곤한 사람이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듯한 자세로 안쪽 벽에 세워져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 인형이 요트파카 같은 걸 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초록색 파카에는 옐로 서브마린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 P658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인형의 얼굴을 살폈다. 칠이 많이바래긴 했어도 분명 M**이었다. 나무에 물감으로 그린 M**의 얼굴은 상당히 희화화되어 있다. 마치 익살스러운 복화술인형 같다. 웃으려다 만 것처럼 어딘가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찾던 것이 이 인형이라는 걸.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다름 아닌 이 인형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고, 깊은 숲을 헤치고, 거무칙칙한 짐승들의 눈을 피해.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숨을 참고 똑바로 나무 인형을 바라보았다. - P658

그렇다. 이것은 M **의 허물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M**은 이 깊은 산속에 육체를 버렸고, 버려진 육체는 낡고 빛바랜 나무 인형이 되었다. 그리고 육체라는 감옥의 구속을 벗어난 그의 영혼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이행했다. 그것이 내가 확인하고 싶은 사실이었다. - P658

그러나 뒤에 남겨진 이 나무 인형을, 소년의 허물을 과연 내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마을로 가져가서 그의 형들에게 보여줘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내버려둬야 할까. 그도 아니면 어딘가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줘야 할까. 나는 판단할 수 없었다. 이대로 두는 게 제일 옳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중에 소년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P659

그때 문득 알아차렸다. 인형의 입가가 보일락 말락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주위가 어두워서 처음에는 시각적 착각이려니 했다.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본 것이라고.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다. 잘 보니 인형의 입이 작고 희미하게. 그러나 틀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할말이 있는 것처럼, 보아하니 입 부분만 위아래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것 같았다. 복화술사가 조종하는 인형과 마찬가지로. - P659

인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보려고 최대한 집중해서 귀기울였지만, 내 귀에 들리는 건 낡고 망가진 풀무처럼 픽픽거리는 바람소리뿐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조금씩 말의 형태를 띠는 듯 느껴졌다.
조금 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P659

조금 더..……… 라고 그것은 거듭 말했다. 이번에는 약간 큰소리로.
나는 그 입가 가까이 귀를 갖다댔다.
그 순간, 인형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고개를 뻗어 순식간에 내 귀를 깨물었다. 귓불이 찢어진 줄 알았을 만큼 세게, 깊게, 힘껏. 고통이 실로 격렬했다.
나는 크게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주위는 컴컴했다. 조금 지나자 그게 꿈이었음을 알았다. 혹은 꿈에 근접한 무언가라는 것을 나는 내 집,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길고 생생한 꿈(같은 것)을 꾼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세게 깨물린 오른쪽 귓불에 선명하게 통증이 남아 있었다. 착각 같은 것이 아니다. 내 귓불은 실제로 욱신거리며 아팠다. - P661

그런데 아무리 주의깊게 살펴도 깨물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미끈한 귓불이 보일 따름이다. 남은 것은 깨물렸을 때의 통증뿐이었다. 그러나 그 통증은 틀림없는 진짜다. 그 목각 인형이ㅡ혹은 인형의 형상을 한 누군가가ㅡ내 귓불을 깨물었다. 재빠르게, 세게, 깊게. 그건 내 꿈속에서 벌어진 일일까, 아니면 ‘의식의 어두운 수면 아래‘에서 벌어진 일일까···· - P661

그러나 귓불에 격심한 아픔을 느끼는 한편, 속으로는 적잖이 안도했다. 나는 그 외딴 숲속 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오두막에서 마침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남기고 간 ‘육체‘를, 혹은 그 허물을, 그건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실종(혹은 가미카쿠시)이라는 수수께끼 사건을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 P662

가게 안 작은 스피커에서 제리 멀리건의 솔로가 흘러나왔다. 아주 오래전에 자주 들었던 연주다. 나는 뜨거운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기억의 밑바닥을 더듬어 곡명을 생각해냈다. <워킹 슈즈>, 아마 맞을 것이다. 피아노리스 쿼텟의 연주, 트럼펫은 쳇 베이커다. - P663

"혹시 괜찮으면, 손가락으로 만져봐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기꺼이." 그녀는 말했다. 그러고는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오른쪽 귓불을 집듯이 부드럽게 몇 번 문질러주었다.
"귓불이 크고 부드럽네." 그녀가 감탄한 투로 말했다. "부러운걸. 내 귓불은 무척 작고 딱딱하거든. 복이 없어 보이지."
"고마워." 나는 말했다. "만져준 덕분에 많이 편해졌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손끝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자 내 귀의 아픔은ㅡ그 희미한 꿈의 자취는ㅡ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P665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왜 내 귓불을 그렇게 세게 깨물어야했을까?‘
나는 그 한 가지를 집중해서 생각했다. 그 의문이 아침부터쉴새없이 내 마음을 흔들고, 날카로운 바늘로 신경을 찔러댔다. - P665

그 소년은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 확실한 흔적을 내 의식과 육체에 또렷이 아로새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각인을 남기듯이, 잊기 힘들 만큼의 물리적 통증을 수반해서. 그 정도로 엄청난 통증이었다. - P665

이 세계.
그러나 그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이, 전체의 축척이 여느 때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천장이 너무넓고 바닥은 너무 좁다. 그 결과 벽이 압력을 받아 휘어졌다.
잘 보면 방 전체가 마치 장기의 내벽처럼 미끄덩거리며 꿈틀대고 있다. 창틀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고, 창유리가 물결치듯 출렁거린다.
처음에는 큰 지진이 난 줄 알았다. 그러나 지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건 나의 내부에서 우러나온 진동이다. 내 마음의 떨림이 바깥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을 뿐이다. - P666

하지만 전부 나의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예민해졌는지도 모른다. 간밤의 생생한 꿈 (같은 것) 때문에, 신경이 비정상적인 상태가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꿈의 안과 밖 경계선이 불명확해진 게 분명하다. - P667

나는 오른쪽 귓불을 손끝으로 살며시 만져봤다. 부드럽고 따뜻한 귓불에 통증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통증이 남은건 내 의식의 안쪽뿐이다. 그리고 그 통증은, 그 또렷한 잔존기억은 이제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그건 뚜렷한 열을 품은 각인과도 같다.
한 세계와 또다른 세계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각인. 나는 아마도 그것을 내 존재의 일부로 간직한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 P667

머릿속에서 요리 순서를 하나하나 자세히 떠올리는 사이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실제적인 일에 머리를 쓰면 다른 문제는 잠시 잊을 수 있다. 제리 멀리건 쿼텟이 연주하는 곡의 제목을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 P669

"뭐 읽어?" 나는 더플코트를 벗어 행거에 걸면서 물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좋아해?"
"응, 좋아하는 편이야. 작품을 거의 다 읽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이 책을 특히 좋아해." - P671

"내가 좋아하는 건 이 부분이야." 그녀는 가름끈을 끼워둔 책장을 펼치고 읽어주었다.

페르미나 다사와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점심식사 시간까지브리지에 있었다. 점심시간 조금 전에 칼라마르 촌락을 통과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매일 축제 소동을 벌였던 그 항구도 지금은 거리에 인적이 없고 완전히 쇠락했다. 흰옷을 입은 여자가 손수건을 흔들며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저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태워주지 않는지 페르미나 다사가 신기하게 여기고 있자, 선장이 저건 물에 빠져 죽은 여자의 망령이며, 지나가는 배를 건너편 해안의 위험한 소용돌이 쪽으로 꾀어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가 바로 여자의 옆을 지나갔으므로 페르미나 다시는 햇살을 받은 그 여자의 모습을 아주 자세하고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이 세상 것이 아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낯익은 얼굴처럼 보였다.

"그의 이야기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이 한데 뒤섞여 있어." 그녀는 말했다. "마치 평범한 일상 속의 일들인 것처럼." - P672

"그런 걸 매직 리얼리즘이라고들 하더군." 내가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비평적 기준으로는 매직 리얼리즘일지 모르지만,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에게는 이런 이야기 방식이지극히 평범한 리얼리즘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해.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혼재했고, 그런 풍경을 보이는 대로 썼던 게 아닐까." - P672

"요컨대 그가 사는 세계에서는 리얼과 비리얼이 기본적으로 이웃하며 등가적으로 존재했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것을 꾸밈없이 기록했을 뿐이다?"
"응,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그리고 난 마르케스 소설의 그런 부분을 좋아해." - P672

가르시아 마르케스 소설 이야기는 내게 고야스 씨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라면 고야스 씨를 만나도,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매직 리얼리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것과 관계없이. - P672

"생활의 질을 따지면 물론 조금 불만이 있지만, 배부른 소리 할 처지는 아니니까." - P675

"다만 계속 이런 데서 생활하다보면 자꾸 영화 《안네의 일기》가 생각나. 암스테르담에서 주인공이 살았던 비밀 방. 천장이 낮고 창이 작고…………" - P675

그러나 잠시 후 나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녀린 온몸을 이상할 만큼 긴밀한 무언가가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 P677

"그래, 그럴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스칼렛 오하라의 시대도아니고. 하지만 이런 걸 입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돼. 내가 든든히 보호받는 것 같아서. 방어가 된다고 할까." - P677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사이 나의 의식은 열일곱 살이었던 무렵으로 하릴없이 끌려갔다. 마치 강한 조류에 휩쓸려가는 표류자처럼. 나의 내부에서 주위 정경이 전환한다. - P678

그러나 그것은 한번 딱딱해지면 의지와 달리 좀처럼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무리 목줄을 당겨도 말을 듣지 않는기운찬 대형견처럼. - P679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해."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좋아해. 그래서 가능하면 받아주고 싶어. 정말이야. 하지만 도무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아." - P679

"기다려도 괜찮을까?" 나는 말했다.
"기다린다면.......내가 그런 영역에서 적극적인 기분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뜻이야?"
"적극적이지 않아도 상관없어."
"보다 수용적인 기분이 된다는 얘기인가." - P680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기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몰라. 아니, 적극적이건 수용적이건 두 번 다시 그럴 기분이 들지 않을지도 몰라. 나한테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테니까."
"기다리는 것엔 익숙해."
그녀는 잠시 또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렇게 참을성 있게 기다릴 만한 가치가 나에게 있을까?"
"글쎄" 나는 말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들여서라도 기다리고 싶다는 마음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 입술은 역시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다른 부분과 다르게 단단한 무언가로 방어되어 있지 않았다. - P680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 나무상자 하나에 들어간 더 작은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에 들어간 더 작은 상자. 끝없이 정묘하게 이어지는 세공품, 상자는 점점 작아진다ㅡ그리고 또한 그안에 담겨 있을 것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사십몇 년을 살아온 인생의 실상이 아닐까? - P681

대체 어디가 출발점이었는지, 그리고 도달점이라 할 만한 것이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니, 어쩔 줄 몰랐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눈 녹은 물이 졸졸 흘러드는 수면을 쨍하니 맑고 싸늘한 달빛이 비추었다.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물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 자명하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 P681

어쩌면 나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P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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