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감고서 머릿속에 재현된 그 이미지를 지우려고 애썼다. 아니면 어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간단히 사라져주지 않았다. - P580
그건 지금 현재의 일이 아니다. 이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상실되었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일이다. 나는 성분이 다른 두 이미지를 멋대로 겹쳐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올바른 일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올바르지 못한 일일까? - P581
어쩌면 사람은 두 번 죽음을 맞는지도 모른다. 지상에서의덧없는 죽음과 진짜 영혼의 죽음. 물론 누구나 다 그렇게 죽는 건 아니다. 고야스 씨는 분명 특수한 경우일 것이다. - P584
"그렇게 띄엄띄엄 이뤄지는 의사소통이 자연스러운 거예요.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 P585
"그애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가서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가 말했다. "제가 과거에 살았던 도시죠.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려면 이쪽 세계의 자신을 지워야 해요. 그림자를 잃은 인간은 결과적으로 이쪽 세계에서의 존재를 상실해야 하니까요." - P585
나는 말했다. "그 도시는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가 거의불가능한 곳입니다. 주위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억센 문지기가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요. 그리고 그 도시 사람들이 풍족한 생활을 한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춥고 긴 겨울 동안 많은 짐승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죠. 그곳은 결코 낙원이 아니에요." "그래도 당신은 그쪽 세계에 머무르는 것을 택했지요. 높은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당신이 늘 마음으로 원해왔던 생활을 하게 되었고요. 당신의 그림자가 도시에서 나가자고 권해도 홀로 그곳에 남는 것을 선택했어요. 그렇죠? 결과가 어찌되었건." - P586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그게 올바른 결단이었는지 지금도 판단하기 힘듭니다. 그 도시에 머물러야 했는지, 아니면 이쪽으로 돌아와야 했는지. 결과적으로는 제 결단과 관계없이 이쪽으로 튕겨나오고 말았지만.………… 그러니까 가령 소년이 그 도시에 들어간다 한들 과연 그곳 생활에 녹아들 수 있을지 예측이 되지 않아요." - P587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어요. 그애의바람을 이뤄줘도 될지. 그 소년이 아니, 한 인간의 존재가 이쪽 세계에서 지워져버릴 일을 도와줘도 될지." "들어보세요." 고야스 씨는 강조하듯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말했다. "생각해보세요, 네, 당신은 고심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판단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 P587
"하지만 그애는 제가 그 도시로 안내해주기를 원합니다. 그곳으로 가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그러지 못하죠. 그 도시에 간 적이 있어도, 가는 법을 알진 못하니까." "맞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고심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고야스 씨는 조용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 P588
"당신은 자신이 꾸는 꿈을 스스로 고를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럼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 사람이 꿀 꿈을 골라줄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랍니다." - P588
나는 말했다. "요컨대 고야스 씨 말씀은, 벽에 둘러싸인 그도시는 제가 꾼 꿈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한 표현은 어디까지나 비유의 영역입니다.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틀림없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정해진 루트가 있는 건 아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곳에 다다르는 길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릅니다. 그러므로 설령 당신이 마음먹는다 한들 아이 손을 잡고 목적지까지 안내해주는 건 불가능해요. 그애는 자기 힘으로 자신의 루트를 찾아내야 하는 겁니다." - P588
"그렇다면 고심하고 말 것도 없이, 나는 소년이 그 도시로 가는 데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런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고야스 씨는 말했다. "그는 그 도시로 가는길을 스스로 찾아낼겁니다. 그 과정에서 아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테지만, 그게 어떤 도움인지도 자기 힘으로 찾아낼 것이고요. 당신이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 P589
"들어보세요, 당신은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 소년의 의식 속에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를 세워주었으니까요. 그 도시는 이제 소년 안에 생생히 뿌리내리고 있어요. 이 세계보다 훨씬 생생하게 말입니다." - P589
"네, 그의 안에 세워진 도시는 당신이 실제로 살았던 도시와 여러 면에서 조금씩 다를지도 모릅니다. 기본적인 구조는 같지만 세세한 부분은 그를 위한 도시로 새로 만들어졌을 테죠. 그러기 위한 도시니까요." - P590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내가 살던 무렵부터 도시를 둘러싼 벽은 이미 시시각각 형상을 바꿔가고 있었다. 마치 장기의 내벽처럼. - P590
"그러니 어쨌거나, 네, 그가 어느 쪽 세계를 택하느냐를 두고 당신이 고민할 필요는 없답니다. 그애는 스스로 판단해서 앞으로의 삶을 선택할 겁니다. 그래봬도 심지가 굳은 아이니까요.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에서 확고하고 힘있게 살아나갈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세계에서, 당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 P590
"당신은 그애를 위해 이미 충분히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준 겁니다. 그건 그를 위해서도 잘된 일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뭐랄까요, 그건 계승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이 도서관에서 제 뒤를 계승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 P590
그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게 분명하다고 나는 깨달았다. 최종적으로 이 세계를 떠난 것이다. 무엇보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아마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어느 인간의 죽음보다도. - P591
떠나버린 영혼은 조용히 놔두는 게 좋다. 그 이름도 되도록 꺼내지 않는 편이 좋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 P594
만약 소년이 가출 비슷한 걸 한다면 틀림없이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고 나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하도 입고 다녀서 허름해진 그 파카에는 그의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어떤 기능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제 발로 걸어서 집을 나간 게 아님을 시사한다. 요컨대 그는 밤사이 잠옷 바람으로 혹은 옷차림이 의미가 없는 형태로ㅡ어딘가로 이동한 것이다. 어쩌면 옮겨졌거나 어딘가로………이를테면 그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 P598
"제가 M**에게 들려준 건 일종의 우화였습니다. 저는 어떤 도시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말하자면 가상의 도시죠. 세부까지 매우 면밀하고 리얼하게 만들어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여러 가설 위에 성립된 도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직접 그애에게 들려준 건 아닙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말한 걸 아이가 건너들은 셈이죠. 어쨌거나 아이는 그 도시에 강한 흥미를 느낀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그 자리에서 내가 가까스로 말할 수 있는 ‘진실‘이었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다. - P606
소년의 아버지는 말했다. "M**에게는 그런 재능도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작은 조각들을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조립해 정확한 전체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죠. 이를테면 무척 복잡한 천 피스짜리 직소퍼즐도 순식간에 뚝딱 맞춰버립니다. 그애가 아직 어렸을 때, 거침없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광경을 저는 몇 번이나 목격했습니다. 성장할수록 아이도 차츰 조심성이 생겨서, 그런 특별한 힘을 최대한 남의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했던 모양입니다만." - P607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한.‘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 아버지는 대체로 ‘상식‘에 포괄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러니 아들이 그 ‘가상의 세계‘를 실제로 찾아갔으리란 발상은 거의 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리라. - P608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 아버지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우리는 같은 처지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엘로 서브마린 소년이 강한 흥미를 느낀 대상은 나라는 인간이 아니라 내가 예전에 머물렀던 도시였다. 나는 그에게 그저 통로처럼 지나쳐간 존재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를 앞에 두고도 그의 눈에 비친 건 그저 그 도시의 광경뿐이었을까? - P610
"아마 누군가와 마주앉아 얘기하는 시간이 필요하셨을 거예요. 혼자서만 불안해하면 아무래도 힘드니까요" - P611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에다 씨가 나와 같은 불안을 품고 있는 듯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소년이 두 번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녀의 말투에서 그런 울림이 느껴졌다. - P611
그가 어디로 갔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건 아마 나뿐이었을 것이다. 소년은 혼자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가는 법을 찾아냈고(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 자기 내부에 있는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 다른 세계로 이동한 것이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근거를 제시할 수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이미 그 도시로 옮겨가고 말았다. 틀림없이. 그 완벽하기까지 한 실종의 양상을 생각하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 P613
그는 진심으로, 진지하게 ‘도시‘로 가고 싶어했으며, 짐작건대 타고난 그 경이로운 집중력이 그 일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렇다. 바꿔 말하자면 그는 ‘도시‘에 다다를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예전에는 나도 갖고 있었던 그 자격을. - P613
소년은 입구인 문에서 그 우람한 문지기를 만나고, 그림자를 떼어내고, 눈에 상처를 낼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도시는 ‘꿈 읽는 이‘를 필요로 했고, 그는 어렵잖게 내 후계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아니,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도시에서 나보다 훨씬 유능하고 유익한 ‘꿈 읽는 이‘가 될 것이다. - P614
그는 사물의 구조를 순식간에 세부까지 파악하는 특수한 능력을 지녔고, 지칠 줄도 질릴 줄도 모르는 강렬한 집중력을 겸비했다. 그리고 지금껏 머릿속에 주입한 방대한 정보 덕분에 스스로가 이미 하나의 도서관ㅡ이른바 지식의 거대한 저수지ㅡ이 되어 있을 것이다. - P614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 그냥 말이 잘 안나왔어" "아마 혼자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럴걸. 한동안 아무하고도 얘기를 안 하면 말이 잘 안 나올 때가 있어,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 P615
"그래서 그들과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제외하고." "실은 그 두 사람이 ‘수요일의 소년‘ 형들이었어." "수요일의 소년?" "왜, 당신이 가게에 있을 때 갑자기 들어와서 내가 태어난 요일을 가르쳐줬던 특이한 남자애." - P617
가미카쿠시
‘신이 숨기다‘라는 의미. 주로 어린아이들이 이유 없이 행방불명되는 일을 일컫는다. - P617
"생일의 요일을 알려주는 건 그애에겐 말하자면 첫 만남의인사 같은 거야. 자기 나름의 친밀감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꽤 유니크한 인사라고 해야겠네." "그렇긴 하지." - P619
"관찰력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이런 장사를 하다보니 그쪽으로 조금씩 감이 생겨.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여러 이야기를 하거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하고 그내용은 보통 잊어버리지만 인상은 남지." - P619
"동생이 사라진 걸 알고 곧바로 도쿄에서 돌아와서, 어쩔 줄몰라하는 부모님을 도와 수소문하고 있대. 첫째는 당분간 휴가를 냈고, 둘째는 학교 수업을 빠지고서. 아직 단서 비슷한건 전혀 얻지 못한 모양이지만, 무척 열심히 진지하게 찾아다나는 것 같았어. 둘이 힘을 모아서. 뭐랄까, 마치 무언가를 매우는 것처럼." ‘마치 무언가를 메우는 것처럼.‘ 아마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나도 내심 어렴풋이 느낀 바니까. - P620
그렇게 커피는 내 피가 되고 머핀은 내 살이 되었다. 무엇보다 귀중한 영양원이다. - P622
그리고 FM 라디오로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셔츠 몇 장과 시트를 다림질했다. 시트를 다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라디오 해설자는 당시 러시아에서 보로딘이 음악가보다 화학자로 더 널리 알려지고 존경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 그 현악사중주에 화학자다운 부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매끄러운 선율과 부드러운 하모니・・・어쩌면 그런 것을 화학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 P624
클래식 음악에 대한 나의 상당히 부족한 지식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보로딘은 이른바 ‘러시아 5인조‘의 한 사람이었다. 나머지는 누구였더라?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ㆍㆍㆍㆍㆍ 그다음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냉장고를 정리하면서 어떻게든 그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는다고 이렇다 할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 P625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역까지 걸었다. 복잡한 화학 실험을 하며 머릿속으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는 보로딘의 모습을, 별 이유도 없이 떠올리면서. - P625
"혼자 살다보면 그렇게 소소한 의식이 필요하지. 하루의 끝을 잘 보내기 위해서." - P628
"무슨 얘긴지는 몰라도," 나는 말했다. "말할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생기면 용기 내서 말해두는 게 좋다고 봐. 지금까지 내 소소한 경험에 비춰보면,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그걸 한번 놓쳐버리면 이야기가 쓸데없이 번거로워지는 경우가 많더라고." - P630
"그렇게 말해주면 꽤 기쁜 것 같아." "나야말로 기쁘다고 해줘서 꽤 기쁜 것 같아. 다만 왠지 하지만...... 이라고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 P632
"그래도 서두르진 마. 내 마음과 몸은 조금 떨어져 있거든. 아주 조금 다른 곳에 있어. 그러니까 좀더 기다려주면 좋겠어. 준비가 될 때까지. 이해해? 여러모로 시간이 걸려." - P635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ㅡ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ㅡ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쨌거나 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니까. - P636
"생각나야 할 게 생각나지 않으면 신경쓰여. 당신은 그럴 때없어?" "나는 생각하기 싫은 일을 잊지 못하는 편이 더 신경쓰이는것 같아." "사람마다 제각각이군." 나는 말했다. - P636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잠시 후 그녀가 그 침묵을 깼다. "내 안에 뭐가 꽉 막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여러 가지가 잘풀리지 않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뒤에 혼자 남겨지진 않았어." 그녀는 내가 한 말을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앞으로도 나를 만나준다는 뜻이야?" "물론." - P636
카운터 위에 놓인 내 손에 그녀가 손을 포갰다. 매끄러운 다섯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조용히 얽혔다. 종류가 다른 시간이 그곳에서 하나로 포개져 뒤섞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슬픔 비슷한, 그러나 슬픔과는 성분이 다른 감정이 무성한 식물처럼 촉수를 뻗어왔다. 나는 그 감촉을 그립게 생각했다. 내 마음에는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도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 - P637
발라키레프, 하고 누군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시험 문제의답을 옆자리에서 몰래 가르쳐주는 친절한 친구처럼. 그렇다. 발라키레프. 이로써 네명이다. 5인조 중 네 명. 이제 한명 남았다. - P637
그녀는 양손으로 감싸듯 얼굴을 가리고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 떨어졌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머물렀다. 눈물이 멈출 때까지. - P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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