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의 종말 - 우리 안의 거대한 편향 사고를 바꿀 대담한 시도
제시카 노델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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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 만연해 있는 ‘편향‘이라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각종 대안들을 제시한다. 또한 인종주의, 젠더이슈 등을 비롯한 기타 여러가지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줌으로서 독자들에게 ‘편향‘의 심각성을 알리고, 혹시 독자인 나 자신의 ‘편향‘은 없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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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책 전체의 결론 부분인데, 지난번 포스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했던 것과 이어져서 ‘편향의 종말‘을 위해서는 개별적인 노력은 기본이고, 사회적인 시스템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내적 변형없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행동은 원래의 잘못을 가능케 한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사유를 재창출할 위험이 있다. 그 가능성을 피하려면 해롭고 무비판적인 사고 패턴을 삭제하고, 서로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훈련하고, 이 변화를 지원해주는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이 더 크고 체계적인 수리repair의 기초를 강화해준다.

이 책에서 탐구한 접근법은 출발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편향적 반응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할수 있다. 그런 반응은 너무나 습관적이어서 알아보기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일단 간파되고 나면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방해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 챙김 인식을 훈련해 이런 반응을 더 명료하게 관찰하고 내적인 지형을 더 잘 제어하도록 도움을 주어, 편향이 우리의 반응을 지배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의미 있고 협동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더 복합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체계적인 결정과정을 제도와 조직에 도입해 일상의 실천에서 편향의 역할을 줄일 수 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또 그 외 다른 장소에서 얻는 기회로 가는 진입로를 창의적으로 개조해 낙인이 찍히거나 주변화한 사람들이 들어오기 쉽게 입구를 넓힐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조직이 모든 구성원을 귀중하게 대하고, 역사적으로 무시되어온 사람들의 공헌을 본질적 자산으로 인정해주도록 보장할수 있다.

또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규범을 퍼뜨려 편향을 무너뜨리는 일을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 일상의 실천이자 광범위한 운동으로 만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 있는 것이 세포수준의 변화와 심장의 변화다.

훈련을 통해 나는 더 기민해지고, 그 잔해를 더 잘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여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에서 배우는 것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내가 쓴 기사에 인종주의적 가부장제 사고방식이 있다고 비판했을 때, 나 자신의 사유 속에서 예전에 보지 못한 어떤 점이 내 눈앞에 드러났다.

"우리는 도전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도움이 되고싶어 한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며, 자신의 선함을 복구하고, 집중하고 강조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 한다." 그러다가 나는 생소하지만 진정한 겸손함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자신이 올바른 존재여야 한다는 집착을 버리자 타인에게 해로운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나를 이끈 편향과 두려움, 착오, 서투름을 솔직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회적 정체성을 대하는 내 정신 건강을 직시할 때마다 되풀이해 일어났다.

감정은 사람들을 움직여 비이성적이고 반생산적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노력했다가 실패하면ㅡ가령 의도치 않게 해를 끼칠 때처럼ㅡ수치심이 고조되거나 민망함과 후회에 불이 붙어, 그 사람이 그런 노력을 통째로 철회하게 될 수도 있다.

말리 가설ㅡ인종주의에 대한 한 사람의 지각은 과거에 대한 지식과 발을 맞추어 증가한다고 주장하는 가설

편향의 행위는 신뢰와 진정한 관계의 기초를 잠식하고,
소외와 격리를 키운다.

또 ‘지배의 평범한 악덕‘이라 묘사되는 것도 있다. 철학자 사만사 바이스 SamanthaVice는 ‘무관심이나 냉담함, 비겁함이나 부정직, 상상력과 공감의 실패, 아니면 그저 단순한 게으름‘이 그런 악덕이라고 열거했다.

특권자의 마음에서는 망상이 한창 벌어지는 중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안전과 안락과 기회와 보살핌을 누가 누릴 자격이 있고 없는지에 대한 습관적이고 무비판적인 왜곡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도덕적 상처moral injury‘ 라 불리게 된 것도 있다. 철학자 낸시 셔면은 그것을 한 사람의 인간관을 압도하는 도덕적 범죄를 저지른데서 기인하는 내적갈등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이 ‘좋은 인간에 걸맞은‘ 표준에 미달했다는 인식이다.

한 사람, 한 가족이 도덕적 상처를 지고 살아간다면, 한 국가, 그 국민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대면하지 않고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행동을 취할 수 없다.

한 국가나 가족에 대한, 혹은 자신의 사고 습관에 대한 진실과 마주하는데도 동일한 기술이 필요하다. 현실을 기꺼이 마주하려는 태도, 자신이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계속 바라보겠다는 맹세, 모든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불편함을 감당하고 뚫고 나아갈수 있는 감정적 기량, 그리고 행동할 용기가 그것이다.

나 자신의 편향을 검토하고 마주하면서 세계와 나의 관계는 변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회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든 그런 공통점이 별로 없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든 친교는 더 깊어지고 더 풍부해졌다. 어려운 대화를 더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감이 더 커지면서 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수리할 수 있었고,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 속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들어가기가 더 쉬워졌다.

누군가가 사회적 차이를 건너 다가와 친교든 신뢰든 맺으려 하면 나는 달려갔다. 그 교류 어딘가에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가치와 의미를 보는 데 있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타인으로부터 독립한 개별적 존재 의미를 반영한다

사실 우리는 서로 속에서, 또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우리의 인간성은 인간성을 타인에게 부여하는 능력에 의존한다.

그리스 여성들은 옅은 피부색을 이상으로 여겼다. 실내에 머물 수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의 엘리트층 남성들은 외부에서 훈련하기 때문에 더 짙은 피부색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하층은 계급에서 피부색의 의미는 바뀐다. 대장장이인 남성은 실내에서 일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여성들은 야외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피부색이 바뀌는 것은 낮은 계급이라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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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현실과 꿈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p.726에 밑줄친 문장 중에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라는 문구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문구가 ‘나‘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힌트가 되거나 도움이 될 만한 구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독서의 초반부에서 ‘나‘는 꿈과 현실을 오가며 독백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결국 자신의 선택에 따라 ‘나‘의 의식을 꿈에 갖다 놓을 수도 있고, 현실에 갖다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된다고 말하면 좀 어불성설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나‘와 ‘그 소년‘이 일체화 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현실에 있고 ‘그 소년‘은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도시‘에 있지만 두 존재가 일체화 됨으로써 현실과 꿈도 일체화된다는 말이다.

말이 주저리주저리 길어졌는데, 여기까지 이 소설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읽어오신 분이라면 독자인 내가 언급한 것들에 공감대가 어느정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추가적으로 이 소설 내용과는 약간 별개로 꿈이 현실이 된다는 말만 놓고 본다면, 어떤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학생이나 사업가 혹은 기타 여러 직업적 자본적 성취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꿈같은 현실을 살고 현실을 꿈처럼 산다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어떤 자기충족적 예언(?) 과도 얼추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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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나오는 뒷 이야기에서 ‘나‘와 ‘그 소년‘은 ‘그 도시‘의 ‘꿈 읽는 자‘로 일체화 되어 살아가게 되는데, 서로가 부족한 부분들을 상호보완적으로 도와가면서 맡은 일들을 해나간다. 소위 말하는 공동체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실제 인간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돕는 관계가 진정한 상호보완관계인 셈이다. 갈등과 대립이 아닌 화합과 협동.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인가. 이런 사회가 점점 더 많아지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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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다가 p.741에 갑자기 ‘그 소년‘이《빠빠라기》라는 책을 언급하는데, ‘그 소년‘의 말에 근거하여 추정해보니,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이 소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모티브를 이 《빠빠라기》에서 일정 부분 참조한듯한 느낌을 받았다. 알라딘 검색창에도 검색하면 나오는 책이던데, 시간이 허락하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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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읽다가 p.753에 밑줄친 ‘그 소년‘의 말 중에 ‘공감이라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기억을 저 앞의 1부로 더듬어 보자면, ‘그 도시‘의 사람들은 ‘공감‘ 이라는 감정적인 부분들이 거의 메말라서 없다시피 한,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영혼이 없는 듯한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소설 막판에 ‘공감능력‘을 배운다는 얘기가 나온 걸로 봐서는 뭔가 전보다 한층 더 좋은 쪽으로 진화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성만 있고 감성이 전혀 없는 삭막한 도시가 이제 ‘나‘의 후계자인 ‘그 소년‘으로 인해 이성과 감성이 조금씩 조화를 이루어가는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1부에서 따로 분리되어버렸던 ‘나‘와 ‘나의 그림자‘가 마지막에 와서는 다시 합쳐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육신과 영혼이 합쳐지는 것과 유사하게 이성과 감성이 하나로 합쳐져서 조화를 이루는 뭐 그런 것이지 않나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추가로 좀 더 생각해보면 실제로 사람이라는 것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육신과 영혼이 합쳐진 것을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합쳐져서 인간의 어떤 생각과 감정, 의식 등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만약에 인간이 육신만 있고 영혼이 없다든가 혹은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게 과연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인간이 이성만 있고 감정이 아예 없다든가 혹은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것도 진정한 인간이라고 말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둘 중에 한쪽에만 치우친 경우에 그것은 귀신이거나 로봇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좀 힘들 것 같다. 물론 저 두가지의 밸런스가 어느 한쪽으로만 몰려있어서 철면피처럼 보이는, 인간답지 않은 사람도 간혹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제 이 소설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가는데, 정말 많은 걸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보게 해줘서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너와 ‘일체화‘할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합니다. 제게 당신의 왼쪽 귓불을 깨물게 해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내 오른쪽 귓불을 깨문 것도 너였니?
"네, 제가 깨물었습니다. 저쪽 세계에서 당신의 오른쪽 귓불을 깨묾으로써 저는 이 도시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쪽 세계에서 왼쪽을 깨물면 당신과 일체화할 수 있습니다." - P721

아직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이 소년이 나고, 내가 이 소년인가?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낯선 소년이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내용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언정 의심 없이 받아들여도 되겠다는 기분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 P722

"네. 부디 제말을 믿어주세요. 저와 하나가 됨으로써 당신은 보다 자연스러운, 보다 본래에 가까운 당신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결코 후회할 일 없을 거예요. 그리고 떠날 시기가왔다 싶으면 당신은 이곳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 P722

좋아, 상관없어, 나는 비몽사몽간에 중얼거렸다. 그렇게 깨물고 싶다면 깨물렴.
소년은 지체 없이 내 왼쪽 귓불을 깨물었다. 잇자국이 남을정도로 세게.
그리고 나는 그대로 깊은 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P723

그는 내 인증을 받아 나의 왼쪽 귀를 세게 깨물고, 그 행위에 의해 (아마) 나와 일체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나는 내 몸과의식에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 P725

그 소년은 정말로 나와 일체화하는 데 성공했을까?
내가 그저 생생한 꿈을 꾸었던 게 아닐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에게 왼쪽 귀를 깨물렸을 때의 격심한 통증을 나는 똑똑히 기억했고 (아픈 것도 아랑곳않고 바로 곯아떨어지고 말았지만), 그와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한 마디도 빠짐없이 재현할 수 있다. 꿈일 리가 없다. 그토록 명료한 꿈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 P725

그러나, 라고 나는 생각한다, 짐작건대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 P726

만약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내가 정말로 ‘일체화‘했다면, 나라는 인간에게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에 무슨 변화가 보일 것이다. 어쨌거나 별개의 인격이 내 안에 새로 들어온 셈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성심껏 주의깊게 살펴보아도 내 안에 이렇다 할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위화감 같은 것도 없다. 나는 평소와 똑같은 나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나 자신이다. - P726

그렇다. 그리하여 깊고 어두운 밤의 잠 속에서 나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하나로 섞여들었다. 물과 물이 섞이는 것처럼.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원래 모습으로 ‘환원된‘ 것이다. - P727

일체화에 의한 변화를 몸으로 느끼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 할까? 나는 그 변화가 나타나기를 그저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아니면 ‘일체화‘란 그 결과로 성립한 새로운 주체(즉 현재의 나)에게 전혀 내적 변모를 감지시키지 않는 것일까? 요컨대 나라는 새로운 주체에게 새로운 나 자신은 구석구석까지 당연한 존재인 셈이니까. - P727

나는 그이고 그는 나라고 소년은 단언했다. 우리가 하나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로써 나는 보다 본래의 나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나는 보다 본래의 나에 가까워졌을까? 이것이 이렇게 지금 존재하는 내가 본래의 나일까? 그러나 내가 본래의 나인지 아닌지를 대체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금세 뒤섞이려 드는 주체와 객체를 어떻게 준별해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없었다. - P727

아마 우리는 완전히 일체화한 것이리라. 혹은 ‘하나로 환원된‘ 것이리라. 즉 나는 나 자신을 향해 질문한 셈이다. 그렇다면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혹시돌아오는 것이 있어도 그저 메아리일 뿐이다. - P728

하지만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어젯밤 집에 찾아온 일을 그녀에게 알려줄 순 없다. 그가 내 왼쪽 귀를 깨물었고, 그로써 우리가 일체화했다는 것도 소년은 이 도시에 들어오도록 허가를 받지 않았다. 어쩌면 나와 일체화함으로써 이제는 그 불법체재‘ 상태가 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그는 여전히 ‘이물질‘이고, 만약 존재가 발각되면 억센 문지기의 손에 의해 엄격히 배제될 것이다. 그러면 그와 하나가 된 나도 함께 배제당할지 모른다ㅡ아니, 배제당할 게 틀림없다. 그러니 지난밤에 일어난 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순 없다. - P729

나는 이 소녀를 상대로 한 가지 비밀을 품게 되었다. 그것도큰 의미가 담긴 비밀을. 그전까지는 그녀에게 숨겨야 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사실이 나를 적잖이 불안하게 했다. - P729

오늘은 어디까지나 어제의 되풀이고, 내일은 오늘의 되풀이일 것이다.
그 생각이 나를 얼마간 안도하게 했다. - P730

그들이 편안하고 느긋한 상태임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안심하고서 내 손에 몸을 맡기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세월ㅡ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ㅡ껍질 속에 갇혀 있었던 이야기를.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나는 오래된 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를 내 귀로 직접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이 얘기할 때 생겨나는 특징적이고 미묘한 떨림을 손바닥에 감지할 뿐이었다. 그들은 분명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P731

그들의 꿈을 읽는 건 아마 그 소년일 것이다. 라고 나는 추측했다. 내가 그 꿈들을 각성시켜 자기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그 목소리를 듣는 건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다.
즉 우리는 ‘꿈 읽는 이‘의 작업을 분업하는 셈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나와 소년은 이미 일체화해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분업‘이라는 건 올바른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내 몸의 몇 가지 부분을 각각에 적합한 방법으로 나눠 쓰고 있을 뿐이리라. - P731

솔직히 말해 나는 원래도 오래된 꿈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작고 말투가 빨라서 알아듣기 힘들었고, 이야기 순서도 중구난방이라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들의 말을 흘려듣다시피 했다. - P732

‘꿈 읽는 이‘로서 나의 직무는 그들의 마음을 열어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이지, 그 내용을 정확히 독해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별다른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아쉬워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만약 소년이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소년은 아마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알아듣고서 자기 안에 착실히 쌓아나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손바닥으로 오래된 꿈을 부드럽게 덥히고, 그들이 껍질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할 뿐이다. - P732

"꿈 읽기 작업에 충분히 숙달됐나봐요." 소녀는 말하고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이에요. 이 도시를 위해서나 당신을 위해서나, 그리고 나를 위해서나."
"다행이야." 나는 말했다. 다행이야, 하고 내 안의 옐로 서브마린 소년도 속삭였다. 적어도 어렴풋이 그런 속삭임을 들은 기분이었다. 마치 동굴 안쪽의 메아리처럼. - P732

소녀가 환히 웃는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 P733

그녀가 공동주택 출입문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뒤 나는 강변길을 혼자 걸으며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향해, 즉 나의 안쪽을 향해 물었다. 이봐, 거기 있는 거니?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 P733

"여기가 어디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안쪽에 있는 방입니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말했다. "의식의 깊은 밑바닥. 그다지 근사한 장소는 아니지만 지금 저와 당신이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에요." - P734

"네.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간단히 분리할 수 없어요. 이곳이 둘로 나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어쨌든 여기 오면 너를 만날 수 있는 거군."
"네, 이 특별한 장소에 찾아오면 우리는 이렇게 마주보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초가 다 탈 때까지요." - P735

"결과적으로 너와 나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있다.
그런 말인가?"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당신은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가 가지지 못한 부분,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된 꿈을 손으로 덥혀 껍질 밖으로 이끌고, 너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해독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른바 공동체로 그 작업에 임하게 된다."
"네, 저는 그 작업을 가능하게 하려고 이 도시에 왔어요. 우리는 하나가 됨으로써 그것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 P736

"그건, 즉 우리의 그 공동 작업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언제까지?" 라고 소년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건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이 도시의 시계에는 바늘이 없으니까요."
"이곳에서는 시간이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이곳의 시간은 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 P737

"시간이 없으면, 축적이란 개념도 없는 건가?"
"네, 시간이 없는 곳에는 축적도 없습니다. 축적처럼 보이는현상은 현재가 던져주는 잠깐의 환영일 뿐이에요. 책장을 한장씩 넘기는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책장이 넘어가는데 쪽 번호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뒷장과 앞장이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주위 풍경이 바뀌어도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 P737

"늘 현재밖에 없다?"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는 사이, 촛불이 크게 한 번 흔들리며 이윽고 꺼졌다. 방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시간도 사라졌다. - P738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시간이 머물러 있어도 계절은 순환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현재가 비춰내는 잠깐의 환영일지라도, 책장을 아무리 넘겨도 쪽 번호가 바뀌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하루하루는 흘러가는 것이다. - P739

"《빠빠라기》라는 책을 읽어보셨어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그런 말을 꺼냈다. 깊은 지하의 작은방에서 나와 그는 촛불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내가 말했다. "예전에 읽었어. 꽤 오래전이라 자세히 기억은안 나지만, 사모아 어느 섬의 촌장이 20세기 초 유럽을 여행한 경험을 고향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촌장이 이야기하는 형식을 빌려 독일인 저자가 쓴 순수한 픽션임이 밝혀졌죠. 이른바 위서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 책을 읽었던 많은 이들은 실제 수기라고 생각했죠. 무리한 일도 아닙니다. 유머와 예지가 넘치는 근대문명에 대한 훌륭한 비평이니까요." - P741

"진짜든 가짜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또다른것이니까요. 그나저나 이 책에는 야자나무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촌장이 사는 섬에서는 사람들 생활에 야자나무가 큰 의미를 갖기 때문에 뭐든 툭하면 야자나무에 빗대어 얘기하게든요.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비유니까요." - P741

"그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촌장이 말합니다. ‘누구라도 발을 써서 야자나무에 오르지만, 그나무보다 높이 올라간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아마 도시에 높은 건물을 지으며 한없이 위로 뻗어가려는 유럽인들을 야유하는 발언일 겁니다. ‘누구라도 발을 써서 야자나무에 오르지만, 그 나무보다 높이 올라간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아주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죠. 누가 들어도 알 법한 비유입니다. 함의도 풍부합니다. 촌장의 이야기를 듣던 청중은ㅡ물론 정말로 청중이 있었다면 말이지만ㅡ맞아. 맞아하며 고개를 끄덕였겠죠. 아무리 나무 오르기에 능한 사람도 야자나무 그 자체보다 높이 오르기는 절대 불가능하니까요." - P742

"그런데 촌장의 말을 반박하는 셈이지만, 이런 식으로 한번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즉 그 야자나무보다 더 높이 오른 인간이 아주 없진 않다고. 이를테면 바로 여기 있는 저와 당신이 그런 예가 아닐까요." - P742

"즉 우리는 나무를 벗어나 허공에 있다는 말일까? 붙잡을 것이 없는 장소에."
소년은 작지만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는말하자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입니다.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낙하하진 않았어요. 낙하가 시작되려면 시간의 흐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그 자리에 정지해 있으면, 우리도 계속 허공에 뜬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이 도시에도 시간은 존재합니다. 다만 의미가 없을 뿐이죠. 결과적으로는 같은 얘기지만."
"즉 우리는 이 도시에 머무르는 한 언제까지나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 P743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로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시작하면 우리는 그 높이에서 떨어지게 돼. 그 결과는 치명적일지도 모르고." - P743

"아마 낙하를 막을 방법은 찾을 수 없겠죠." 소년은 말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피할 방법이 없진 않아요."
"이를테면 어떤 거지?"
"믿는 겁니다."
"무엇을 믿는데?"
"누군가가 땅에서 당신을 받아주리란 것을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겁니다. 보류하지 않고,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 P744

그 위화감을 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굳이 말하자면,
마음이 의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멋대로 나아가려 한다는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봄날 들판에 나온 어린 토끼처럼, 내 마음이 내 의지에 반해 설명할 길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무제한의 약동을 갈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방약무인하고 본능적인 움직임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 토끼가 나의 내부에 난데없이 등장했는지,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왜 내 의지와 내 마음이 그토록 상반되게 움직이려 하는지도.
그러는 한편,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평온하고 잔잔한 나날을보냈다. - P746

그럼에도 내 안에서 봄날의 들판을 뛰노는 토끼는 활발한 움직임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지칠 줄 모르는 그 생명력은 휴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듯했다. 이따금 독서에 집중하는 나를 난폭하게 방해하고, 내 신경을 힘찬 뒷발로 거세게 걷어찼다. 그리고 밤마다 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나의 내부에서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예사롭지 않은 일‘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손놓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 P747

"아무래도 그때가 가까워온 모양이군요." 한동안 이어진 깊은 침묵을 깨고 소년이 내게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소년은 양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펼쳤다. 천장에서 올바른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러고는 말했다. "당신이 이곳을 떠날 때입니다."
"내가 이곳을 떠난다고?"
"네, 당신도 마음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예요"라고 옐로 서브마린 요트파카를 입은 작은 체구의 소년이 말했다. - P748

"네, 그래요. 당신의 마음은 이 도시를 떠나기를 원합니다.
아니, 이곳을 떠나는 걸 필요로 합니다. 얼마 전부터 저는 어렴풋이 알아차렸어요. 그리고 그 마음의 동정을 주의해서 지켜보았고요."
나는 소년의 말을 나름대로 곱씹었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 움직임의 의미를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런 말일까?"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네. 마음과 의식은 다른곳에 있으니까요." - P749

"내가 이 도시를 떠난다?" 내가 물었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당신 그림자를 벽 바깥으로 내보냈어요. 그렇죠? 이번에는 저를 뒤에 남기고 당신이 이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저와 헤어지고, 벽 바깥에 있는 당신 그림자와 다시 하나가 되는 겁니다." - P749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자신의 그림자와 다시 하나가 되다니."
"네, 가능합니다.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그렇게 원한다면." - P749

나는 잠시 말을 잃고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는 바깥세계에서 내 그림자를 만난 적이 있니?"
"몇 번이나." 소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소년의 발언은 나를 놀라움과 곤혹스러움에 빠뜨렸다. 그가바깥세계에서 내 그림자를 몇 번이나 만났다?
"맞아요, 당신의 그림자는 저쪽 세계에서 건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그 그림자와 하나가되기를 원한다." - P750

"그렇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새로운 움직임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해요. 하지만 당신의 의식은 아직 그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간단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서."
마치 봄날의 들판을 뛰노는 어린 토끼처럼, 하고 나는 생각했다. - P750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각자의 역할을 맞바꾸고 말았는지도 몰라. 요컨대 지금은 그가 나의 본체로서 활발히 기능하고, 나는 마치 그의 그림자 같은 이른바 종속적인 존재가 된 거지. 왠지 그런 생각이 드는걸. 어떨까, 본체와 그림자는 서로 교체될 수 있는 존재일까?" - P751

"글쎄요, 그 문제는 저도 뭐라고 말하지 못하겠어요. 누가 뭐래도 당신 자신의 문제니까. 하지만 저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어느 쪽이건 상관없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나 자신의 본체건, 그림자건 어느 쪽이 됐건 지금 이렇게 여기 있는 내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가 곧 나인 거죠.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야 할 거예요." - P751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할 겁니다. 역할을 교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 - P752

"걱정할 것 없어요.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면 됩니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많은 일이 잘풀릴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소중한 분신이 당신의 복귀를 틀림없이 든든하게 지지해줄 겁니다." - P752

"언젠가 당신이 여기서 나갈 것을 각오하고 조금씩 대비해왔습니다. 껍질 속의 오래된 꿈들도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주고요. 저는 공감이란 걸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제게는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아주 느리게나마 진보하고 있어요. 저는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P753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꿈 읽는 이‘가 나에서 너로 바뀌면,
도시가 순순히 받아들여줄까? 사실 너는 이 도시에 머무를 자격을 부여받지 않았잖아."
"아뇨,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가 이 도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도시도 저를 필요로 하게 됐습니다. ‘꿈 읽는 이‘의 존재가 없다면 이 도시는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저를 추방할 일은 없습니다. 도시는 그리고 그 벽은 제게 맞춰 미묘하게 형태를 바꿔나갈 테죠." - P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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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완전학습 바이블을 읽고..

이 책은 학습법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 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3년 전에 읽었던 책이라 써놓았던 리뷰를 통해 대략적인 내용들만 기억이 나지만, 이 책이 다른 책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학원과 같은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교육을 바탕으로 학습자인 학생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노하우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근래 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보면 공교육이 어떻고 사교육이 어떻고 하면서 가타부타 말들이 많았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교육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교육에 있어서 배운 내용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은 그 어느것보다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예전 독서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저자는 공교육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충실히 소화하고 깊이 있게 공부하면 굳이 사교육을 따로 받지 않더라도, 학업 성취도를 충분히 높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 이론과 더불어 실제 적용 사례들을 보여줌으로서 독자들의 신뢰를 얻고자 한다. 실제로 나도 읽으면서 저자의 말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한 것임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이 책은 초중고 학생들이나 그들의 학부모님들을 주 독자층으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 성인 학습자가 읽어봐도 도움이 될만큼 유익한 내용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공부정서나 학습의 단계에 대한 얘기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습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적용해봄직한 내용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 3년 전 오늘의 리뷰를 다시금 돌아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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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면 육신의 노화가 진행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의식이나 기억은 젊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나 변치 않는다는 p.691에 밑줄친 문장이 뇌리에 박혔다.

육신과 정신은 별개로 존재한다는게 무슨 말인지 조금 더 와닿게 느껴졌다. 육신의 노화가 이미 진행되었거나 진행중인 사람들도 의식이나 기억은 충분히 젊었을 때의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소설 속 ‘나‘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독자인 나 자신의 육신과 정신은 어디쯤에 와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의식과 기억은 나이를 먹지 않고 그대로 현존하는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다시금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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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길고 길었던 2부가 끝나고 마지막 3부로 넘어간다. 2부에서는 현실 세계를 메인으로 한 상태에서 ‘그 도시‘의 존재에 대해 논했다면, 마지막 3부에서는 다시 ‘그 도시‘로 ‘나‘가 온 듯하다. 1부에서 봤던 ‘그 도시‘들 속에 다시 들어가서 ‘나‘가 얘기를 하고 있다.

3부 초반부에 어떤 것의 ‘의미‘에 대해 ‘나‘가 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p.702에 밑줄친 ‘시간‘과 관련한 문장은 독자인 나에게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그녀도 내게 호감을 갖고있다. 그 사실은 틀림없다. 우리는 산에 둘러싸인 이 작은 마을에서 (아마도) 서로를 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다ㅡ딱딱한 실질을 갖춘 무언가에 그렇다. 이를테면 높은 벽돌 벽 같은 것에.
그런 상대가 내 앞에 나타나기를 나는 지금껏 기다렸던 걸까? 그것이 내게 주어진 새로운 나무상자일까? - P682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내가 그녀를 원하는 마음은 열일곱 살때 그 소녀를 원했던 마음과 같지 않다. 그때처럼 압도적인,
초점을 한데 모아 무언가를 불태울 것처럼 강렬한 감정이 몸 안에 돌아오는 일은 아마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가령 돌아온다 해도 지금의 나는 이미 그 열량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커피숍 주인에게 내가 품은 마음은 좀더 넓은 범위에 이르는 것이며, 보다 온당하고 부드러운 옷을 두르고, 나름의 지혜와 경험으로 억제된 것이었다. 그리고 보다 긴 시간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었다. - P683

또하나 중요한 사실ㅡ내가 원하는 건 그녀의 모든 것이 아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작은 나무상자에 다 담기지 않을 테다. 나는 이제 열일곱 살 소년이 아니다. 그 무렵의 나는 온 세상의 모든 시간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내가 손에 쥔 시간은, 그것을 쓸 수 있는 사용처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그녀가 걸친 방어벽 안쪽에 있을 평온한 따뜻함이었다. 그리고 그 특수한 소재로 만들어진 돔형의 컵 안쪽에서 맥박 치고 있을 심장의 분명한 고동이다.
그것은, 지금 와서 굳이 내가 원하기에는 너무 소소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막대한 것일까? - P683

저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태워주지 않는지 페르미나 다사가 신기하게 여기고 있자, 선장이 저건 물에빠져 죽은 여자의 망령이며, 지나가는 배를 건너편 해안의위험한 소용돌이 쪽으로 꾀어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P684

가르시아 마르케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필요로 하지않았던 콜롬비아의 소설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 P684

그날 밤, 나는 그 불확실한 벽을 넘었던 것 같다. 아니면 통과했다고 해야 할까 물컹한 젤리 상태의 물질을 반쯤 헤엄치다시피 해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벽 너머에 있었다. 혹은 벽의 이쪽에. - P685

꿈 같은 게 아니다. 그곳의 정경은 어디까지나 논리적이고계속적이며 정합적이었다. 세부 하나하나를 눈으로 똑똑히 보고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세계에 선 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몇 번이고 그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했다(꿈속에서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건 꿈이아니다. 굳이 정의하자면, 현실의 가장자리 끝에 존재하는 관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P686

강은 눈에 익었다. 어릴 때 곧잘 와서 놀던 강이다.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그저 물의 감촉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사십대 중반에 접어든 현재의 나다. 나는 혼자 그 강물 속을 걷고 있었다. - P686

나는 상류를 향해 물결을 거스르며 걷고 있었다. 그렇게 걷는 것에 특별한 목적은 없고, 어느 특정한 장소로 향하는 것도 아닌 듯했다. 그저 맨발로 물속을 걷고 싶어서, 그리운 주위풍경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걷는 것이다. 말하자면 걷는 행위자체가 그때 나의 목적이었다. - P687

그러나 계속 걷는 사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다. 강상류로 거슬러올라갈수록, 아주 조금씩이지만 내 모습이 바뀌어간다는 사실을. 의식의 변화나 인식 혹은 시점의 전환 같은 감각적, 추상적 변화가 아니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있고,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변화다. 물리적인, 아마도 육체적인 변화다.
나의 육체가 변화하고 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착각이 아니다. 오해도 아니다. 확실한 변화의 율동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 - P687

어떤 종류의 변화인지 처음에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굴에 손을 가져가보고 그 자리에 명백한 변화가 일어났다는사실을 알아차렸다. 피부가 전에 없이 매끈하고, 턱 아래 살이 사라졌으며, 윤곽이 전체적으로 날렵해진 것 같았다. 팔다리를 내려다보니 피부가 건강한 탄력을 되찾은 게 느껴졌다. 주름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몇 군데 남아 있던 흉터도 거의 사라지고 없다. - P688

틀림없다. 이전에 비해ㅡ말이 이전이지 불과 몇 시간 전이지만ㅡ피부가 확연하게 젊어졌다. 그리고 몸도 마치 누름돌을 들어낸 것처럼 가벼워졌다. 견갑골 안쪽에 오랫동안 버티고 있던 뻐근한 느낌이 말끔히 사라지고 어깨가 유연하고 경쾌하게 움직였다. 폐로 들이마시는 공기조차 한결 신선하고활기차게 느껴졌다. 귀에 와닿는 갖가지 자연의 소리도 보다 생생하고 또렷했다. - P688

거울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내 얼굴의변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젊은 날의 얼굴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십대 후반쯤이다. 지금보다 머리숱이 풍성하고, 턱선이 날렵하며, 뺨도 조금 홀쭉하다. 건강하고, 그늘이 없고,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다소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아마 실제로도 어리석었으리라). 하지만 물론 거울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 P688

나는 주위 풍경을 둘러보고, 구름 없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발밑의 맑은 물결을 살펴보았다. 무엇 하나 기이하거나 이질적인 요소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한여름 오후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 강은 지극히 당연한 듯 보이면서 무언가 특수한 의미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강에 나도 모르게 발을 들이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 P689

상류로 좀더 올라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내가 더 젊어진다.
면 가설이 옳았음이 증명될 것이다.
그런데 그뒤에는 어떻게 될까? 적당한 곳에서 멈추고 뒤돌아가면, 즉 강을 내려가면 다시 원래 나이로 돌아올까? 아니면 뒤돌아가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 강일까? 거기까진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지금은 상류로 나아가보는 수밖에 없다. 호기심이내 발길을 재촉했다. - P689

그러나 시간을 역행함으로써 변화해가는 건 아무래도 나의육체뿐인 듯했다. 내가 가진 의식과 기억은 틀림없이 현재의 나의 것이었다. 나는 사십대 중반에 축적된 마음과 기억을 유지한 채, 몸만 십대 청년으로, 혹은 소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 P691

앞쪽에 모래톱이 보였다. 아름다운 모래톱이다. 하얀 모래로 이뤄졌고 여름풀이 무성하다.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열일곱 살로 돌아와 있었다. - P692

그렇다,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그 지점에서 발을 멈추고,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의 세계에 머물렀다. 강물에 둘러싸인흰 모래톱과 초록빛 여름풀 사이에 여기서 더 나아갈 일은 없다. 나에게나 그녀에게나, 이 이상 시간을 거슬러오를 필요는 없다.
나의 기억과 나의 현실이 그곳에서 포개져 하나로 이어지고뒤섞인다.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본다. - P693

너에게 뭐라고 말을 걸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벌에쏘여 혀가 붓고 마비된 것처럼. 현실의 끄트머리에 있는 이 세계에서 나의 몸과 마음은 아직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다. - P694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여기 이렇게, 언제까지라도 머무를수 있다. 여기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시곗바늘이 멈추어, 혹은 바늘 자체가 소실되어 시간은 이 지점에 정확히 정지한다. 이윽고 나의 혀가 정상적인 움직임을 되찾고, 올바른 말을 하나 또하나 찾아낼 것이다. - P694

나는 눈을 감는다. 그 중간적인 어둠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뜬다. 자칫 무언가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조용하고 주의깊게 그리고 새삼 주위를 둘러보고, 그 세계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 P694

나는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너의 손에 닿는다. 그리고 그 손을 잡는다. 너도 내손을 잡는다. 우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나의 젊은 심장이 가슴속에서 메마른 소리를 낸다. 나의 기억이 선명한 예각을 지닌 쐐기가 되고, 나무망치가 그것을 올바른 틈새에 정확히 박아넣는다. - P694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다. 어느새 내 그림자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서쪽으로 저무는 여름 해가 지표면에 만물의 그림자를 길고 또렷하게 늘어뜨리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내 그림자가 사라진 걸까? 어디로 가버렸을까?
다만 신기하게도 그 사실이 그리 불안하게 다가오지 않았고, 나는 두려워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내 그림자는 스스로의 의지로 여기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아니면 어떤 사정이 있어 일시적으로 어딘가로 이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내게 돌아올 게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니까. - P695

바람이 물위를 조용히 지나간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내 손가락에 소리 없이 무슨 말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말로는 할 수 없는, 중요한 무언가를.

그런 시간에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름이 없다. 열일곱 살과 열여섯살의 여름 해질녘, 강가 풀밭 위의 선명한 기억ㅡ오직 그것이 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 하나둘 별이 반짝일 테지만, 별에도 이름은 없다. - P695

너는 똑바로 내 얼굴을 바라본다. 지극히 진지한 눈빛으로, 깊고 맑은 샘물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리고 고백하듯이 속삭인다. 손을 맞잡은 채.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나는 흠칫 각성한다. 혹은 틀림없는 현실의 대지로 이끌려온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 또렷이 귓가에 남아 있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 P696

<옐로 서브마린>, 비틀스의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왔던 노란 잠수함. - P700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강변길을 계속 걸었다.
여느 때처럼 흐트러짐 없는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그러나 마음은 평소와 달리 차분하지 못했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의 모습이 이상하게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칙칙한 색채의 도시에서, 어째서 그 소년만 그토록 선명하게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있을까? 그리고 왜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을까? 이도시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숙인 채 불온한 무언가의ㅡ이를테면 머리 위를 높게 날아다니는 시커멓고 거대한 맹금류의ㅡ눈을 피하려는 듯 잰걸음으로 걷는다. 일부러 멈춰 서서 누군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하진 않는다. - P701

벽에 둘러싸인 이 도시에 오기 전, 즉 저쪽 세계에 살 때 나는 그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옐로 서브마린》. 그래서 그림이 눈에 익었다. 음악도 기억한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노란 잠수함 안에서 살고 있다........ 그 말에는 의미가 있고, 동시에 의미가 없다. - P702

소년은 어디선가ㅡ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ㅡ누가 입던 헌옷을 우연히 손에 넣었나보다. 하지만 옷에 프린트된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마 모를 것이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이 도시에서는 누구도 비틀스의 음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아니, 비틀스뿐 아니라 그 어떤 음악도 그리고 ‘잠수함‘이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를 테니까. - P702

이윽고 시계탑 앞을 지났다. 지나면서 습관적으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계에는 여느 때처럼 바늘이 없었다. 그건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시계가 아니다. 시간에 의미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한 시계다. 시간은 멈춰 있진 않지만 의미를 상실했다. - P702

이 도시에 그것 말고 다른 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침이오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해가 진다. 그 이상으로 자잘하게 시간을 분할하는 걸 대체 누가 필요로 할까? 하루와 다음 하루의 차이를ㅡ 만약 차이라는 게 있다면 누가 알고 싶어할까?
나 또한 그렇듯 시간을 잴 필요가 없는 주민 중 한 사람이다. 해질녘이 가까워오면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온 뒤, 여느때와 똑같은 길을 여느 때와 똑같이 걸어 일터인 도서관으로향한다. 걸음수도 매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 안쪽 서고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다. 손끝과 눈이 피로해져 더는 읽기 힘들어질 때까지. - P703

그곳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다. 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순환한다. 빙글빙글 돌아간다. 같은 곳을? 아니, 그건 알 수 없다. 시간은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씩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솔직히 말해 ‘빙글빙글 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머지는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 P703

내가 ‘꿈 읽는 이‘인 이상, 소녀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몇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 열여섯 살, 그녀의 시간은 거기에 정지해 있다. - P703

"귀, 어떻게 된 거예요?" 소녀가 갑자기 내게 묻는다. "오른쪽 귓불."
나는 내 오른쪽 귓불로 손을 가져간다. 그 순간 뚜렷한 통증을 느낀다. 그 통증에 얼굴을 살짝 찌푸린다.
"거기가 검붉어졌어요. 꼭 뭔가에 세게 물린 것처럼."
"그런 기억은 없는데." 나는 말한다.
정말로 그런 기억은 없다. 그녀가 말할 때까진 통증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귓불이 심장박동에 맞춰 확실히 욱신거렸다. 그녀에게 지적을 받고서야 불현듯 깨물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것처럼. - P705

나는 다시 책상을 보고 의식을 집중해 오래된 꿈을 읽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놓인 유채기름 램프의 불꽃이 크게 한 번흔들렸다. 그러나 우리 그림자가 벽에 비치는 일은 없다.
이 도시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림자를 달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 P707

밤사이 오른쪽 귓불이 심장박동에 맞춰 계속 욱신거렸다.
그 희한한 소년의 모습을 강 건너로 본 것과 귓불에 통증이 생긴 것이 거의 동시였던 탓에, 두 사건 사이에 무슨 관련성이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도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이례적인 일이다. 그 두 가지 일이 이상하게도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 P710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걸까?
나는 무언가가 시작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가 끝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변화는ㅡ그게 어떤 종류건ㅡ더이상 멈출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 - P711

다음날 같은 시각에ㅡ아마 같은 시각일 테지만 시계가 없는 이 도시에서는 정확하지 않다ㅡ나는 다리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그날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부재는 내 마음에 한층 깊은 혼란을 가져왔다.
왜 오늘은 그가 저곳에 없을까?
그건 상반되는 감성이었다. 나는 그의 존재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부재에 당황한다. 왜일까? 어쨌거나 소년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고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머릿속을 완전히 공백으로 만들 순 없었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작은 소년이 기억의 잔상 속에서 언제까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P711

어떻게든 원래의 생활을 되찾아야 한다. 마땅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귀의 상처를 낫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모습을 뇌리에서 쫓아내야 한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 - P715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램프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머릿속을 텅 비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귀는 여전히 쉼없이 욱신거렸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모습은 시야를 떠나지 않았다. 그 불가해한 두 가지 사건은 떼어낼 수 없는 한쌍의 존재가 되어 내 안에 눌러앉아버린 듯했다. - P715

"당신이 태어난 날은 수요일입니다"라고 그 누군가가 말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다. 약간 새된 울림이 있다. 변성기를 거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난 날은 수요일?
"당신은 수요일에 태어났습니다." 누군가는 말했다. - P717

수요일에 태어났다는 게 나한테 뭔가 의미가 있는 일일까?
"아뇨, 그건 단순한 사실에 불과합니다. 수요일은 그저 한 주의 하루입니다." 젊은 남자는 말했다. 변경의 여지가 없는 수학 정리를 해설하듯 간결하게, 감정을 담지 않고. - P718

"저를 무서워하지 마세요." 소년이 말했다. "당신에게 해를가하진 않습니다."
나는 작게 끄덕였다. 턱을 아주 조금 움직여서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한밤중에 이렇게 갑자기 머리맡에 나타나 놀라셨겠지만,
이 방법 말고는 당신과 단둘이 대화할 기회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 P718

"부탁이 있습니다." 소년은 말했다. "저는 그러려고 여기 왔습니다. 벽을 통과해서."
문지기의 허가 없이, 라는 말일까?
"네, 그렇습니다." 소년은 내 생각을 읽고서 대답했다. 이 소년은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다. - P718

"문지기 모르게, 눈에 상처도 내지 않고, 이 도시에 들어왔습니다. 이 도시에 머무르는 걸 정식으로 인정받진 않았어요. 그래서 눈에 띄지 않도록 이런 시간에 찾아온 거고요."
네게는 그림자가 있느냐고 나는 물었다. 그림자를 가진 인간이 이 도시에 들어오기란 불가능하다.
"아뇨, 제게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제 허물을 저쪽 세계에 남겨두고 왔어요. 아마 그것이 제 그림자라 불리는 것일 테죠. 아니면 반대로 제가 그림자인지도 모릅니다. 저쪽이 본체일수도 있어요. 어쨌거나 저는 그 허물을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깊은 숲속에 숨겨놓고 왔습니다. 이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서." - P719

"네, 저는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저는 ‘꿈 읽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된 꿈을 읽는 것, 그게 제 유일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도시의 주민이 아니기에 정식으로 그 일자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하나가 되면 저는 당신 자격으로 매일 이곳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어요." - P719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당신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건. 왜냐하면 저는 원래 당신이고, 당신은 원래 저니까요." - P720

"네, 맞습니다. 부디 믿어주세요. 우리는 원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별개의 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라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당신의 일부로서 ‘꿈 읽는 이‘가 되어 앞으로도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어요." - P720

소년은 말했다.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껏 그랬듯 그 도서관 안쪽에서 오래된 꿈을 계속 읽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이고, 당신은 저니까요. 제 힘이 당신 자신의힘이 됩니다. 물과 물이 섞이는 것처럼. 저와 하나가 된다고해서 결코 당신의 인격이나 일상에 변화가 생기진 않아요. 당신의 자유가 속박당할 일도 없습니다." - P720

왜 너는 그렇게 오래된 꿈을 읽고 싶어하지?
"왜냐하면 오래된 꿈을 읽는 것이 저의 천직이니까요. 저는 ‘꿈 읽는 이‘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다만 제가 속한 세계에서는 ‘꿈 읽는 이‘가 되는 방법을 도저히 찾아낼수 없었어요. 그러나 마침내 이렇게 당신을 만났습니다. 부디 제 말을 믿고 저와 하나가 되어주세요. 그리고 제가 이 도시에 계속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저는 ‘꿈 읽는 이‘ 로서 당신을 도울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언제까지나 매일밤 도서관을 오가며 그 소녀를 계속 만날 수 있습니다." - P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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