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면 육신의 노화가 진행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의식이나 기억은 젊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나 변치 않는다는 p.691에 밑줄친 문장이 뇌리에 박혔다.

육신과 정신은 별개로 존재한다는게 무슨 말인지 조금 더 와닿게 느껴졌다. 육신의 노화가 이미 진행되었거나 진행중인 사람들도 의식이나 기억은 충분히 젊었을 때의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소설 속 ‘나‘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독자인 나 자신의 육신과 정신은 어디쯤에 와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의식과 기억은 나이를 먹지 않고 그대로 현존하는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다시금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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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길고 길었던 2부가 끝나고 마지막 3부로 넘어간다. 2부에서는 현실 세계를 메인으로 한 상태에서 ‘그 도시‘의 존재에 대해 논했다면, 마지막 3부에서는 다시 ‘그 도시‘로 ‘나‘가 온 듯하다. 1부에서 봤던 ‘그 도시‘들 속에 다시 들어가서 ‘나‘가 얘기를 하고 있다.

3부 초반부에 어떤 것의 ‘의미‘에 대해 ‘나‘가 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p.702에 밑줄친 ‘시간‘과 관련한 문장은 독자인 나에게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그녀도 내게 호감을 갖고있다. 그 사실은 틀림없다. 우리는 산에 둘러싸인 이 작은 마을에서 (아마도) 서로를 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다ㅡ딱딱한 실질을 갖춘 무언가에 그렇다. 이를테면 높은 벽돌 벽 같은 것에.
그런 상대가 내 앞에 나타나기를 나는 지금껏 기다렸던 걸까? 그것이 내게 주어진 새로운 나무상자일까? - P682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내가 그녀를 원하는 마음은 열일곱 살때 그 소녀를 원했던 마음과 같지 않다. 그때처럼 압도적인,
초점을 한데 모아 무언가를 불태울 것처럼 강렬한 감정이 몸 안에 돌아오는 일은 아마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가령 돌아온다 해도 지금의 나는 이미 그 열량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커피숍 주인에게 내가 품은 마음은 좀더 넓은 범위에 이르는 것이며, 보다 온당하고 부드러운 옷을 두르고, 나름의 지혜와 경험으로 억제된 것이었다. 그리고 보다 긴 시간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었다. - P683

또하나 중요한 사실ㅡ내가 원하는 건 그녀의 모든 것이 아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작은 나무상자에 다 담기지 않을 테다. 나는 이제 열일곱 살 소년이 아니다. 그 무렵의 나는 온 세상의 모든 시간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내가 손에 쥔 시간은, 그것을 쓸 수 있는 사용처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그녀가 걸친 방어벽 안쪽에 있을 평온한 따뜻함이었다. 그리고 그 특수한 소재로 만들어진 돔형의 컵 안쪽에서 맥박 치고 있을 심장의 분명한 고동이다.
그것은, 지금 와서 굳이 내가 원하기에는 너무 소소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막대한 것일까? - P683

저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태워주지 않는지 페르미나 다사가 신기하게 여기고 있자, 선장이 저건 물에빠져 죽은 여자의 망령이며, 지나가는 배를 건너편 해안의위험한 소용돌이 쪽으로 꾀어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P684

가르시아 마르케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필요로 하지않았던 콜롬비아의 소설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 P684

그날 밤, 나는 그 불확실한 벽을 넘었던 것 같다. 아니면 통과했다고 해야 할까 물컹한 젤리 상태의 물질을 반쯤 헤엄치다시피 해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벽 너머에 있었다. 혹은 벽의 이쪽에. - P685

꿈 같은 게 아니다. 그곳의 정경은 어디까지나 논리적이고계속적이며 정합적이었다. 세부 하나하나를 눈으로 똑똑히 보고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세계에 선 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몇 번이고 그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했다(꿈속에서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건 꿈이아니다. 굳이 정의하자면, 현실의 가장자리 끝에 존재하는 관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P686

강은 눈에 익었다. 어릴 때 곧잘 와서 놀던 강이다.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그저 물의 감촉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사십대 중반에 접어든 현재의 나다. 나는 혼자 그 강물 속을 걷고 있었다. - P686

나는 상류를 향해 물결을 거스르며 걷고 있었다. 그렇게 걷는 것에 특별한 목적은 없고, 어느 특정한 장소로 향하는 것도 아닌 듯했다. 그저 맨발로 물속을 걷고 싶어서, 그리운 주위풍경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걷는 것이다. 말하자면 걷는 행위자체가 그때 나의 목적이었다. - P687

그러나 계속 걷는 사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다. 강상류로 거슬러올라갈수록, 아주 조금씩이지만 내 모습이 바뀌어간다는 사실을. 의식의 변화나 인식 혹은 시점의 전환 같은 감각적, 추상적 변화가 아니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있고,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변화다. 물리적인, 아마도 육체적인 변화다.
나의 육체가 변화하고 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착각이 아니다. 오해도 아니다. 확실한 변화의 율동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 - P687

어떤 종류의 변화인지 처음에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굴에 손을 가져가보고 그 자리에 명백한 변화가 일어났다는사실을 알아차렸다. 피부가 전에 없이 매끈하고, 턱 아래 살이 사라졌으며, 윤곽이 전체적으로 날렵해진 것 같았다. 팔다리를 내려다보니 피부가 건강한 탄력을 되찾은 게 느껴졌다. 주름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몇 군데 남아 있던 흉터도 거의 사라지고 없다. - P688

틀림없다. 이전에 비해ㅡ말이 이전이지 불과 몇 시간 전이지만ㅡ피부가 확연하게 젊어졌다. 그리고 몸도 마치 누름돌을 들어낸 것처럼 가벼워졌다. 견갑골 안쪽에 오랫동안 버티고 있던 뻐근한 느낌이 말끔히 사라지고 어깨가 유연하고 경쾌하게 움직였다. 폐로 들이마시는 공기조차 한결 신선하고활기차게 느껴졌다. 귀에 와닿는 갖가지 자연의 소리도 보다 생생하고 또렷했다. - P688

거울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내 얼굴의변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젊은 날의 얼굴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십대 후반쯤이다. 지금보다 머리숱이 풍성하고, 턱선이 날렵하며, 뺨도 조금 홀쭉하다. 건강하고, 그늘이 없고,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다소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아마 실제로도 어리석었으리라). 하지만 물론 거울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 P688

나는 주위 풍경을 둘러보고, 구름 없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발밑의 맑은 물결을 살펴보았다. 무엇 하나 기이하거나 이질적인 요소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한여름 오후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 강은 지극히 당연한 듯 보이면서 무언가 특수한 의미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강에 나도 모르게 발을 들이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 P689

상류로 좀더 올라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내가 더 젊어진다.
면 가설이 옳았음이 증명될 것이다.
그런데 그뒤에는 어떻게 될까? 적당한 곳에서 멈추고 뒤돌아가면, 즉 강을 내려가면 다시 원래 나이로 돌아올까? 아니면 뒤돌아가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 강일까? 거기까진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지금은 상류로 나아가보는 수밖에 없다. 호기심이내 발길을 재촉했다. - P689

그러나 시간을 역행함으로써 변화해가는 건 아무래도 나의육체뿐인 듯했다. 내가 가진 의식과 기억은 틀림없이 현재의 나의 것이었다. 나는 사십대 중반에 축적된 마음과 기억을 유지한 채, 몸만 십대 청년으로, 혹은 소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 P691

앞쪽에 모래톱이 보였다. 아름다운 모래톱이다. 하얀 모래로 이뤄졌고 여름풀이 무성하다.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열일곱 살로 돌아와 있었다. - P692

그렇다,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그 지점에서 발을 멈추고,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의 세계에 머물렀다. 강물에 둘러싸인흰 모래톱과 초록빛 여름풀 사이에 여기서 더 나아갈 일은 없다. 나에게나 그녀에게나, 이 이상 시간을 거슬러오를 필요는 없다.
나의 기억과 나의 현실이 그곳에서 포개져 하나로 이어지고뒤섞인다.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본다. - P693

너에게 뭐라고 말을 걸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벌에쏘여 혀가 붓고 마비된 것처럼. 현실의 끄트머리에 있는 이 세계에서 나의 몸과 마음은 아직 하나로 이어지지 않았다. - P694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여기 이렇게, 언제까지라도 머무를수 있다. 여기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시곗바늘이 멈추어, 혹은 바늘 자체가 소실되어 시간은 이 지점에 정확히 정지한다. 이윽고 나의 혀가 정상적인 움직임을 되찾고, 올바른 말을 하나 또하나 찾아낼 것이다. - P694

나는 눈을 감는다. 그 중간적인 어둠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뜬다. 자칫 무언가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조용하고 주의깊게 그리고 새삼 주위를 둘러보고, 그 세계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 P694

나는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너의 손에 닿는다. 그리고 그 손을 잡는다. 너도 내손을 잡는다. 우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나의 젊은 심장이 가슴속에서 메마른 소리를 낸다. 나의 기억이 선명한 예각을 지닌 쐐기가 되고, 나무망치가 그것을 올바른 틈새에 정확히 박아넣는다. - P694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다. 어느새 내 그림자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서쪽으로 저무는 여름 해가 지표면에 만물의 그림자를 길고 또렷하게 늘어뜨리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내 그림자가 사라진 걸까? 어디로 가버렸을까?
다만 신기하게도 그 사실이 그리 불안하게 다가오지 않았고, 나는 두려워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내 그림자는 스스로의 의지로 여기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아니면 어떤 사정이 있어 일시적으로 어딘가로 이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내게 돌아올 게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니까. - P695

바람이 물위를 조용히 지나간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내 손가락에 소리 없이 무슨 말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말로는 할 수 없는, 중요한 무언가를.

그런 시간에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름이 없다. 열일곱 살과 열여섯살의 여름 해질녘, 강가 풀밭 위의 선명한 기억ㅡ오직 그것이 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 하나둘 별이 반짝일 테지만, 별에도 이름은 없다. - P695

너는 똑바로 내 얼굴을 바라본다. 지극히 진지한 눈빛으로, 깊고 맑은 샘물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리고 고백하듯이 속삭인다. 손을 맞잡은 채.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나는 흠칫 각성한다. 혹은 틀림없는 현실의 대지로 이끌려온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 또렷이 귓가에 남아 있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 P696

<옐로 서브마린>, 비틀스의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왔던 노란 잠수함. - P700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강변길을 계속 걸었다.
여느 때처럼 흐트러짐 없는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그러나 마음은 평소와 달리 차분하지 못했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의 모습이 이상하게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칙칙한 색채의 도시에서, 어째서 그 소년만 그토록 선명하게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있을까? 그리고 왜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을까? 이도시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숙인 채 불온한 무언가의ㅡ이를테면 머리 위를 높게 날아다니는 시커멓고 거대한 맹금류의ㅡ눈을 피하려는 듯 잰걸음으로 걷는다. 일부러 멈춰 서서 누군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하진 않는다. - P701

벽에 둘러싸인 이 도시에 오기 전, 즉 저쪽 세계에 살 때 나는 그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옐로 서브마린》. 그래서 그림이 눈에 익었다. 음악도 기억한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노란 잠수함 안에서 살고 있다........ 그 말에는 의미가 있고, 동시에 의미가 없다. - P702

소년은 어디선가ㅡ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ㅡ누가 입던 헌옷을 우연히 손에 넣었나보다. 하지만 옷에 프린트된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마 모를 것이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이 도시에서는 누구도 비틀스의 음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아니, 비틀스뿐 아니라 그 어떤 음악도 그리고 ‘잠수함‘이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를 테니까. - P702

이윽고 시계탑 앞을 지났다. 지나면서 습관적으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계에는 여느 때처럼 바늘이 없었다. 그건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시계가 아니다. 시간에 의미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한 시계다. 시간은 멈춰 있진 않지만 의미를 상실했다. - P702

이 도시에 그것 말고 다른 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침이오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해가 진다. 그 이상으로 자잘하게 시간을 분할하는 걸 대체 누가 필요로 할까? 하루와 다음 하루의 차이를ㅡ 만약 차이라는 게 있다면 누가 알고 싶어할까?
나 또한 그렇듯 시간을 잴 필요가 없는 주민 중 한 사람이다. 해질녘이 가까워오면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온 뒤, 여느때와 똑같은 길을 여느 때와 똑같이 걸어 일터인 도서관으로향한다. 걸음수도 매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 안쪽 서고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다. 손끝과 눈이 피로해져 더는 읽기 힘들어질 때까지. - P703

그곳에서 시간은 의미가 없다. 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순환한다. 빙글빙글 돌아간다. 같은 곳을? 아니, 그건 알 수 없다. 시간은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씩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솔직히 말해 ‘빙글빙글 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머지는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 P703

내가 ‘꿈 읽는 이‘인 이상, 소녀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몇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 열여섯 살, 그녀의 시간은 거기에 정지해 있다. - P703

"귀, 어떻게 된 거예요?" 소녀가 갑자기 내게 묻는다. "오른쪽 귓불."
나는 내 오른쪽 귓불로 손을 가져간다. 그 순간 뚜렷한 통증을 느낀다. 그 통증에 얼굴을 살짝 찌푸린다.
"거기가 검붉어졌어요. 꼭 뭔가에 세게 물린 것처럼."
"그런 기억은 없는데." 나는 말한다.
정말로 그런 기억은 없다. 그녀가 말할 때까진 통증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귓불이 심장박동에 맞춰 확실히 욱신거렸다. 그녀에게 지적을 받고서야 불현듯 깨물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것처럼. - P705

나는 다시 책상을 보고 의식을 집중해 오래된 꿈을 읽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놓인 유채기름 램프의 불꽃이 크게 한 번흔들렸다. 그러나 우리 그림자가 벽에 비치는 일은 없다.
이 도시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림자를 달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 P707

밤사이 오른쪽 귓불이 심장박동에 맞춰 계속 욱신거렸다.
그 희한한 소년의 모습을 강 건너로 본 것과 귓불에 통증이 생긴 것이 거의 동시였던 탓에, 두 사건 사이에 무슨 관련성이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도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이례적인 일이다. 그 두 가지 일이 이상하게도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 P710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걸까?
나는 무언가가 시작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가 끝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변화는ㅡ그게 어떤 종류건ㅡ더이상 멈출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 - P711

다음날 같은 시각에ㅡ아마 같은 시각일 테지만 시계가 없는 이 도시에서는 정확하지 않다ㅡ나는 다리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그날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부재는 내 마음에 한층 깊은 혼란을 가져왔다.
왜 오늘은 그가 저곳에 없을까?
그건 상반되는 감성이었다. 나는 그의 존재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부재에 당황한다. 왜일까? 어쨌거나 소년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고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머릿속을 완전히 공백으로 만들 순 없었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작은 소년이 기억의 잔상 속에서 언제까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P711

어떻게든 원래의 생활을 되찾아야 한다. 마땅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귀의 상처를 낫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모습을 뇌리에서 쫓아내야 한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 - P715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램프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머릿속을 텅 비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귀는 여전히 쉼없이 욱신거렸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모습은 시야를 떠나지 않았다. 그 불가해한 두 가지 사건은 떼어낼 수 없는 한쌍의 존재가 되어 내 안에 눌러앉아버린 듯했다. - P715

"당신이 태어난 날은 수요일입니다"라고 그 누군가가 말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다. 약간 새된 울림이 있다. 변성기를 거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난 날은 수요일?
"당신은 수요일에 태어났습니다." 누군가는 말했다. - P717

수요일에 태어났다는 게 나한테 뭔가 의미가 있는 일일까?
"아뇨, 그건 단순한 사실에 불과합니다. 수요일은 그저 한 주의 하루입니다." 젊은 남자는 말했다. 변경의 여지가 없는 수학 정리를 해설하듯 간결하게, 감정을 담지 않고. - P718

"저를 무서워하지 마세요." 소년이 말했다. "당신에게 해를가하진 않습니다."
나는 작게 끄덕였다. 턱을 아주 조금 움직여서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을 열 수 없었다.
"한밤중에 이렇게 갑자기 머리맡에 나타나 놀라셨겠지만,
이 방법 말고는 당신과 단둘이 대화할 기회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 P718

"부탁이 있습니다." 소년은 말했다. "저는 그러려고 여기 왔습니다. 벽을 통과해서."
문지기의 허가 없이, 라는 말일까?
"네, 그렇습니다." 소년은 내 생각을 읽고서 대답했다. 이 소년은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다. - P718

"문지기 모르게, 눈에 상처도 내지 않고, 이 도시에 들어왔습니다. 이 도시에 머무르는 걸 정식으로 인정받진 않았어요. 그래서 눈에 띄지 않도록 이런 시간에 찾아온 거고요."
네게는 그림자가 있느냐고 나는 물었다. 그림자를 가진 인간이 이 도시에 들어오기란 불가능하다.
"아뇨, 제게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제 허물을 저쪽 세계에 남겨두고 왔어요. 아마 그것이 제 그림자라 불리는 것일 테죠. 아니면 반대로 제가 그림자인지도 모릅니다. 저쪽이 본체일수도 있어요. 어쨌거나 저는 그 허물을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깊은 숲속에 숨겨놓고 왔습니다. 이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서." - P719

"네, 저는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저는 ‘꿈 읽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된 꿈을 읽는 것, 그게 제 유일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도시의 주민이 아니기에 정식으로 그 일자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하나가 되면 저는 당신 자격으로 매일 이곳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어요." - P719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당신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건. 왜냐하면 저는 원래 당신이고, 당신은 원래 저니까요." - P720

"네, 맞습니다. 부디 믿어주세요. 우리는 원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별개의 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라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당신의 일부로서 ‘꿈 읽는 이‘가 되어 앞으로도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어요." - P720

소년은 말했다.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껏 그랬듯 그 도서관 안쪽에서 오래된 꿈을 계속 읽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이고, 당신은 저니까요. 제 힘이 당신 자신의힘이 됩니다. 물과 물이 섞이는 것처럼. 저와 하나가 된다고해서 결코 당신의 인격이나 일상에 변화가 생기진 않아요. 당신의 자유가 속박당할 일도 없습니다." - P720

왜 너는 그렇게 오래된 꿈을 읽고 싶어하지?
"왜냐하면 오래된 꿈을 읽는 것이 저의 천직이니까요. 저는 ‘꿈 읽는 이‘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다만 제가 속한 세계에서는 ‘꿈 읽는 이‘가 되는 방법을 도저히 찾아낼수 없었어요. 그러나 마침내 이렇게 당신을 만났습니다. 부디 제 말을 믿고 저와 하나가 되어주세요. 그리고 제가 이 도시에 계속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저는 ‘꿈 읽는 이‘ 로서 당신을 도울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언제까지나 매일밤 도서관을 오가며 그 소녀를 계속 만날 수 있습니다." - P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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