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 현실과 꿈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p.726에 밑줄친 문장 중에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라는 문구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문구가 ‘나‘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힌트가 되거나 도움이 될 만한 구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독서의 초반부에서 ‘나‘는 꿈과 현실을 오가며 독백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결국 자신의 선택에 따라 ‘나‘의 의식을 꿈에 갖다 놓을 수도 있고, 현실에 갖다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된다고 말하면 좀 어불성설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나‘와 ‘그 소년‘이 일체화 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현실에 있고 ‘그 소년‘은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도시‘에 있지만 두 존재가 일체화 됨으로써 현실과 꿈도 일체화된다는 말이다.

말이 주저리주저리 길어졌는데, 여기까지 이 소설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읽어오신 분이라면 독자인 내가 언급한 것들에 공감대가 어느정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추가적으로 이 소설 내용과는 약간 별개로 꿈이 현실이 된다는 말만 놓고 본다면, 어떤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학생이나 사업가 혹은 기타 여러 직업적 자본적 성취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꿈같은 현실을 살고 현실을 꿈처럼 산다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어떤 자기충족적 예언(?) 과도 얼추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
.
.
이어서 나오는 뒷 이야기에서 ‘나‘와 ‘그 소년‘은 ‘그 도시‘의 ‘꿈 읽는 자‘로 일체화 되어 살아가게 되는데, 서로가 부족한 부분들을 상호보완적으로 도와가면서 맡은 일들을 해나간다. 소위 말하는 공동체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실제 인간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돕는 관계가 진정한 상호보완관계인 셈이다. 갈등과 대립이 아닌 화합과 협동.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인가. 이런 사회가 점점 더 많아지길 바라는 바이다.
.
.
.
계속 읽다가 p.741에 갑자기 ‘그 소년‘이《빠빠라기》라는 책을 언급하는데, ‘그 소년‘의 말에 근거하여 추정해보니,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이 소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모티브를 이 《빠빠라기》에서 일정 부분 참조한듯한 느낌을 받았다. 알라딘 검색창에도 검색하면 나오는 책이던데, 시간이 허락하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
.
연이어 읽다가 p.753에 밑줄친 ‘그 소년‘의 말 중에 ‘공감이라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기억을 저 앞의 1부로 더듬어 보자면, ‘그 도시‘의 사람들은 ‘공감‘ 이라는 감정적인 부분들이 거의 메말라서 없다시피 한,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영혼이 없는 듯한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소설 막판에 ‘공감능력‘을 배운다는 얘기가 나온 걸로 봐서는 뭔가 전보다 한층 더 좋은 쪽으로 진화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성만 있고 감성이 전혀 없는 삭막한 도시가 이제 ‘나‘의 후계자인 ‘그 소년‘으로 인해 이성과 감성이 조금씩 조화를 이루어가는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1부에서 따로 분리되어버렸던 ‘나‘와 ‘나의 그림자‘가 마지막에 와서는 다시 합쳐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육신과 영혼이 합쳐지는 것과 유사하게 이성과 감성이 하나로 합쳐져서 조화를 이루는 뭐 그런 것이지 않나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추가로 좀 더 생각해보면 실제로 사람이라는 것을 이루는 구성요소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육신과 영혼이 합쳐진 것을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합쳐져서 인간의 어떤 생각과 감정, 의식 등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만약에 인간이 육신만 있고 영혼이 없다든가 혹은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게 과연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인간이 이성만 있고 감정이 아예 없다든가 혹은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것도 진정한 인간이라고 말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둘 중에 한쪽에만 치우친 경우에 그것은 귀신이거나 로봇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좀 힘들 것 같다. 물론 저 두가지의 밸런스가 어느 한쪽으로만 몰려있어서 철면피처럼 보이는, 인간답지 않은 사람도 간혹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제 이 소설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가는데, 정말 많은 걸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보게 해줘서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너와 ‘일체화‘할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합니다. 제게 당신의 왼쪽 귓불을 깨물게 해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내 오른쪽 귓불을 깨문 것도 너였니?
"네, 제가 깨물었습니다. 저쪽 세계에서 당신의 오른쪽 귓불을 깨묾으로써 저는 이 도시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쪽 세계에서 왼쪽을 깨물면 당신과 일체화할 수 있습니다." - P721

아직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이 소년이 나고, 내가 이 소년인가?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낯선 소년이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내용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언정 의심 없이 받아들여도 되겠다는 기분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 P722

"네. 부디 제말을 믿어주세요. 저와 하나가 됨으로써 당신은 보다 자연스러운, 보다 본래에 가까운 당신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결코 후회할 일 없을 거예요. 그리고 떠날 시기가왔다 싶으면 당신은 이곳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 P722

좋아, 상관없어, 나는 비몽사몽간에 중얼거렸다. 그렇게 깨물고 싶다면 깨물렴.
소년은 지체 없이 내 왼쪽 귓불을 깨물었다. 잇자국이 남을정도로 세게.
그리고 나는 그대로 깊은 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P723

그는 내 인증을 받아 나의 왼쪽 귀를 세게 깨물고, 그 행위에 의해 (아마) 나와 일체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나는 내 몸과의식에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 P725

그 소년은 정말로 나와 일체화하는 데 성공했을까?
내가 그저 생생한 꿈을 꾸었던 게 아닐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에게 왼쪽 귀를 깨물렸을 때의 격심한 통증을 나는 똑똑히 기억했고 (아픈 것도 아랑곳않고 바로 곯아떨어지고 말았지만), 그와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한 마디도 빠짐없이 재현할 수 있다. 꿈일 리가 없다. 그토록 명료한 꿈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 P725

그러나, 라고 나는 생각한다, 짐작건대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 P726

만약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내가 정말로 ‘일체화‘했다면, 나라는 인간에게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에 무슨 변화가 보일 것이다. 어쨌거나 별개의 인격이 내 안에 새로 들어온 셈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성심껏 주의깊게 살펴보아도 내 안에 이렇다 할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위화감 같은 것도 없다. 나는 평소와 똑같은 나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나 자신이다. - P726

그렇다. 그리하여 깊고 어두운 밤의 잠 속에서 나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하나로 섞여들었다. 물과 물이 섞이는 것처럼.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원래 모습으로 ‘환원된‘ 것이다. - P727

일체화에 의한 변화를 몸으로 느끼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 할까? 나는 그 변화가 나타나기를 그저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아니면 ‘일체화‘란 그 결과로 성립한 새로운 주체(즉 현재의 나)에게 전혀 내적 변모를 감지시키지 않는 것일까? 요컨대 나라는 새로운 주체에게 새로운 나 자신은 구석구석까지 당연한 존재인 셈이니까. - P727

나는 그이고 그는 나라고 소년은 단언했다. 우리가 하나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로써 나는 보다 본래의 나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나는 보다 본래의 나에 가까워졌을까? 이것이 이렇게 지금 존재하는 내가 본래의 나일까? 그러나 내가 본래의 나인지 아닌지를 대체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금세 뒤섞이려 드는 주체와 객체를 어떻게 준별해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없었다. - P727

아마 우리는 완전히 일체화한 것이리라. 혹은 ‘하나로 환원된‘ 것이리라. 즉 나는 나 자신을 향해 질문한 셈이다. 그렇다면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혹시돌아오는 것이 있어도 그저 메아리일 뿐이다. - P728

하지만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어젯밤 집에 찾아온 일을 그녀에게 알려줄 순 없다. 그가 내 왼쪽 귀를 깨물었고, 그로써 우리가 일체화했다는 것도 소년은 이 도시에 들어오도록 허가를 받지 않았다. 어쩌면 나와 일체화함으로써 이제는 그 불법체재‘ 상태가 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그는 여전히 ‘이물질‘이고, 만약 존재가 발각되면 억센 문지기의 손에 의해 엄격히 배제될 것이다. 그러면 그와 하나가 된 나도 함께 배제당할지 모른다ㅡ아니, 배제당할 게 틀림없다. 그러니 지난밤에 일어난 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순 없다. - P729

나는 이 소녀를 상대로 한 가지 비밀을 품게 되었다. 그것도큰 의미가 담긴 비밀을. 그전까지는 그녀에게 숨겨야 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사실이 나를 적잖이 불안하게 했다. - P729

오늘은 어디까지나 어제의 되풀이고, 내일은 오늘의 되풀이일 것이다.
그 생각이 나를 얼마간 안도하게 했다. - P730

그들이 편안하고 느긋한 상태임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안심하고서 내 손에 몸을 맡기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세월ㅡ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ㅡ껍질 속에 갇혀 있었던 이야기를.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 나는 오래된 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를 내 귀로 직접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이 얘기할 때 생겨나는 특징적이고 미묘한 떨림을 손바닥에 감지할 뿐이었다. 그들은 분명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P731

그들의 꿈을 읽는 건 아마 그 소년일 것이다. 라고 나는 추측했다. 내가 그 꿈들을 각성시켜 자기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그 목소리를 듣는 건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다.
즉 우리는 ‘꿈 읽는 이‘의 작업을 분업하는 셈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나와 소년은 이미 일체화해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분업‘이라는 건 올바른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내 몸의 몇 가지 부분을 각각에 적합한 방법으로 나눠 쓰고 있을 뿐이리라. - P731

솔직히 말해 나는 원래도 오래된 꿈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작고 말투가 빨라서 알아듣기 힘들었고, 이야기 순서도 중구난방이라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들의 말을 흘려듣다시피 했다. - P732

‘꿈 읽는 이‘로서 나의 직무는 그들의 마음을 열어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이지, 그 내용을 정확히 독해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별다른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아쉬워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만약 소년이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소년은 아마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히 알아듣고서 자기 안에 착실히 쌓아나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손바닥으로 오래된 꿈을 부드럽게 덥히고, 그들이 껍질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할 뿐이다. - P732

"꿈 읽기 작업에 충분히 숙달됐나봐요." 소녀는 말하고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이에요. 이 도시를 위해서나 당신을 위해서나, 그리고 나를 위해서나."
"다행이야." 나는 말했다. 다행이야, 하고 내 안의 옐로 서브마린 소년도 속삭였다. 적어도 어렴풋이 그런 속삭임을 들은 기분이었다. 마치 동굴 안쪽의 메아리처럼. - P732

소녀가 환히 웃는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 P733

그녀가 공동주택 출입문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뒤 나는 강변길을 혼자 걸으며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향해, 즉 나의 안쪽을 향해 물었다. 이봐, 거기 있는 거니?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 P733

"여기가 어디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안쪽에 있는 방입니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말했다. "의식의 깊은 밑바닥. 그다지 근사한 장소는 아니지만 지금 저와 당신이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에요." - P734

"네.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간단히 분리할 수 없어요. 이곳이 둘로 나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어쨌든 여기 오면 너를 만날 수 있는 거군."
"네, 이 특별한 장소에 찾아오면 우리는 이렇게 마주보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초가 다 탈 때까지요." - P735

"결과적으로 너와 나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있다.
그런 말인가?"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당신은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가 가지지 못한 부분,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된 꿈을 손으로 덥혀 껍질 밖으로 이끌고, 너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해독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른바 공동체로 그 작업에 임하게 된다."
"네, 저는 그 작업을 가능하게 하려고 이 도시에 왔어요. 우리는 하나가 됨으로써 그것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 P736

"그건, 즉 우리의 그 공동 작업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언제까지?" 라고 소년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건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이 도시의 시계에는 바늘이 없으니까요."
"이곳에서는 시간이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이곳의 시간은 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 P737

"시간이 없으면, 축적이란 개념도 없는 건가?"
"네, 시간이 없는 곳에는 축적도 없습니다. 축적처럼 보이는현상은 현재가 던져주는 잠깐의 환영일 뿐이에요. 책장을 한장씩 넘기는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책장이 넘어가는데 쪽 번호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뒷장과 앞장이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주위 풍경이 바뀌어도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 P737

"늘 현재밖에 없다?"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는 사이, 촛불이 크게 한 번 흔들리며 이윽고 꺼졌다. 방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시간도 사라졌다. - P738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시간이 머물러 있어도 계절은 순환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현재가 비춰내는 잠깐의 환영일지라도, 책장을 아무리 넘겨도 쪽 번호가 바뀌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하루하루는 흘러가는 것이다. - P739

"《빠빠라기》라는 책을 읽어보셨어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그런 말을 꺼냈다. 깊은 지하의 작은방에서 나와 그는 촛불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내가 말했다. "예전에 읽었어. 꽤 오래전이라 자세히 기억은안 나지만, 사모아 어느 섬의 촌장이 20세기 초 유럽을 여행한 경험을 고향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촌장이 이야기하는 형식을 빌려 독일인 저자가 쓴 순수한 픽션임이 밝혀졌죠. 이른바 위서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 책을 읽었던 많은 이들은 실제 수기라고 생각했죠. 무리한 일도 아닙니다. 유머와 예지가 넘치는 근대문명에 대한 훌륭한 비평이니까요." - P741

"진짜든 가짜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또다른것이니까요. 그나저나 이 책에는 야자나무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촌장이 사는 섬에서는 사람들 생활에 야자나무가 큰 의미를 갖기 때문에 뭐든 툭하면 야자나무에 빗대어 얘기하게든요.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비유니까요." - P741

"그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촌장이 말합니다. ‘누구라도 발을 써서 야자나무에 오르지만, 그나무보다 높이 올라간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아마 도시에 높은 건물을 지으며 한없이 위로 뻗어가려는 유럽인들을 야유하는 발언일 겁니다. ‘누구라도 발을 써서 야자나무에 오르지만, 그 나무보다 높이 올라간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아주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죠. 누가 들어도 알 법한 비유입니다. 함의도 풍부합니다. 촌장의 이야기를 듣던 청중은ㅡ물론 정말로 청중이 있었다면 말이지만ㅡ맞아. 맞아하며 고개를 끄덕였겠죠. 아무리 나무 오르기에 능한 사람도 야자나무 그 자체보다 높이 오르기는 절대 불가능하니까요." - P742

"그런데 촌장의 말을 반박하는 셈이지만, 이런 식으로 한번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즉 그 야자나무보다 더 높이 오른 인간이 아주 없진 않다고. 이를테면 바로 여기 있는 저와 당신이 그런 예가 아닐까요." - P742

"즉 우리는 나무를 벗어나 허공에 있다는 말일까? 붙잡을 것이 없는 장소에."
소년은 작지만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는말하자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입니다.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낙하하진 않았어요. 낙하가 시작되려면 시간의 흐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그 자리에 정지해 있으면, 우리도 계속 허공에 뜬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이 도시에도 시간은 존재합니다. 다만 의미가 없을 뿐이죠. 결과적으로는 같은 얘기지만."
"즉 우리는 이 도시에 머무르는 한 언제까지나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 P743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로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시작하면 우리는 그 높이에서 떨어지게 돼. 그 결과는 치명적일지도 모르고." - P743

"아마 낙하를 막을 방법은 찾을 수 없겠죠." 소년은 말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피할 방법이 없진 않아요."
"이를테면 어떤 거지?"
"믿는 겁니다."
"무엇을 믿는데?"
"누군가가 땅에서 당신을 받아주리란 것을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겁니다. 보류하지 않고,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 P744

그 위화감을 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굳이 말하자면,
마음이 의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멋대로 나아가려 한다는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봄날 들판에 나온 어린 토끼처럼, 내 마음이 내 의지에 반해 설명할 길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무제한의 약동을 갈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방약무인하고 본능적인 움직임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 토끼가 나의 내부에 난데없이 등장했는지,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왜 내 의지와 내 마음이 그토록 상반되게 움직이려 하는지도.
그러는 한편,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평온하고 잔잔한 나날을보냈다. - P746

그럼에도 내 안에서 봄날의 들판을 뛰노는 토끼는 활발한 움직임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지칠 줄 모르는 그 생명력은 휴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듯했다. 이따금 독서에 집중하는 나를 난폭하게 방해하고, 내 신경을 힘찬 뒷발로 거세게 걷어찼다. 그리고 밤마다 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나의 내부에서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예사롭지 않은 일‘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손놓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 P747

"아무래도 그때가 가까워온 모양이군요." 한동안 이어진 깊은 침묵을 깨고 소년이 내게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소년은 양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펼쳤다. 천장에서 올바른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러고는 말했다. "당신이 이곳을 떠날 때입니다."
"내가 이곳을 떠난다고?"
"네, 당신도 마음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예요"라고 옐로 서브마린 요트파카를 입은 작은 체구의 소년이 말했다. - P748

"네, 그래요. 당신의 마음은 이 도시를 떠나기를 원합니다.
아니, 이곳을 떠나는 걸 필요로 합니다. 얼마 전부터 저는 어렴풋이 알아차렸어요. 그리고 그 마음의 동정을 주의해서 지켜보았고요."
나는 소년의 말을 나름대로 곱씹었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 움직임의 의미를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런 말일까?"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네. 마음과 의식은 다른곳에 있으니까요." - P749

"내가 이 도시를 떠난다?" 내가 물었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당신 그림자를 벽 바깥으로 내보냈어요. 그렇죠? 이번에는 저를 뒤에 남기고 당신이 이 도시를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저와 헤어지고, 벽 바깥에 있는 당신 그림자와 다시 하나가 되는 겁니다." - P749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자신의 그림자와 다시 하나가 되다니."
"네, 가능합니다.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그렇게 원한다면." - P749

나는 잠시 말을 잃고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는 바깥세계에서 내 그림자를 만난 적이 있니?"
"몇 번이나." 소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소년의 발언은 나를 놀라움과 곤혹스러움에 빠뜨렸다. 그가바깥세계에서 내 그림자를 몇 번이나 만났다?
"맞아요, 당신의 그림자는 저쪽 세계에서 건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그 그림자와 하나가되기를 원한다." - P750

"그렇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새로운 움직임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해요. 하지만 당신의 의식은 아직 그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간단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서."
마치 봄날의 들판을 뛰노는 어린 토끼처럼, 하고 나는 생각했다. - P750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각자의 역할을 맞바꾸고 말았는지도 몰라. 요컨대 지금은 그가 나의 본체로서 활발히 기능하고, 나는 마치 그의 그림자 같은 이른바 종속적인 존재가 된 거지. 왠지 그런 생각이 드는걸. 어떨까, 본체와 그림자는 서로 교체될 수 있는 존재일까?" - P751

"글쎄요, 그 문제는 저도 뭐라고 말하지 못하겠어요. 누가 뭐래도 당신 자신의 문제니까. 하지만 저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어느 쪽이건 상관없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나 자신의 본체건, 그림자건 어느 쪽이 됐건 지금 이렇게 여기 있는 내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가 곧 나인 거죠.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야 할 거예요." - P751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할 겁니다. 역할을 교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 - P752

"걱정할 것 없어요.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면 됩니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많은 일이 잘풀릴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소중한 분신이 당신의 복귀를 틀림없이 든든하게 지지해줄 겁니다." - P752

"언젠가 당신이 여기서 나갈 것을 각오하고 조금씩 대비해왔습니다. 껍질 속의 오래된 꿈들도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주고요. 저는 공감이란 걸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제게는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아주 느리게나마 진보하고 있어요. 저는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P753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꿈 읽는 이‘가 나에서 너로 바뀌면,
도시가 순순히 받아들여줄까? 사실 너는 이 도시에 머무를 자격을 부여받지 않았잖아."
"아뇨,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가 이 도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도시도 저를 필요로 하게 됐습니다. ‘꿈 읽는 이‘의 존재가 없다면 이 도시는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저를 추방할 일은 없습니다. 도시는 그리고 그 벽은 제게 맞춰 미묘하게 형태를 바꿔나갈 테죠." - P7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