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책 전체의 결론 부분인데, 지난번 포스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했던 것과 이어져서 ‘편향의 종말‘을 위해서는 개별적인 노력은 기본이고, 사회적인 시스템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내적 변형없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행동은 원래의 잘못을 가능케 한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사유를 재창출할 위험이 있다. 그 가능성을 피하려면 해롭고 무비판적인 사고 패턴을 삭제하고, 서로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훈련하고, 이 변화를 지원해주는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이 더 크고 체계적인 수리repair의 기초를 강화해준다.

이 책에서 탐구한 접근법은 출발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편향적 반응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할수 있다. 그런 반응은 너무나 습관적이어서 알아보기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일단 간파되고 나면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방해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 챙김 인식을 훈련해 이런 반응을 더 명료하게 관찰하고 내적인 지형을 더 잘 제어하도록 도움을 주어, 편향이 우리의 반응을 지배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의미 있고 협동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더 복합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체계적인 결정과정을 제도와 조직에 도입해 일상의 실천에서 편향의 역할을 줄일 수 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또 그 외 다른 장소에서 얻는 기회로 가는 진입로를 창의적으로 개조해 낙인이 찍히거나 주변화한 사람들이 들어오기 쉽게 입구를 넓힐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조직이 모든 구성원을 귀중하게 대하고, 역사적으로 무시되어온 사람들의 공헌을 본질적 자산으로 인정해주도록 보장할수 있다.

또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규범을 퍼뜨려 편향을 무너뜨리는 일을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 일상의 실천이자 광범위한 운동으로 만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 있는 것이 세포수준의 변화와 심장의 변화다.

훈련을 통해 나는 더 기민해지고, 그 잔해를 더 잘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여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에서 배우는 것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내가 쓴 기사에 인종주의적 가부장제 사고방식이 있다고 비판했을 때, 나 자신의 사유 속에서 예전에 보지 못한 어떤 점이 내 눈앞에 드러났다.

"우리는 도전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도움이 되고싶어 한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며, 자신의 선함을 복구하고, 집중하고 강조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 한다." 그러다가 나는 생소하지만 진정한 겸손함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자신이 올바른 존재여야 한다는 집착을 버리자 타인에게 해로운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나를 이끈 편향과 두려움, 착오, 서투름을 솔직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회적 정체성을 대하는 내 정신 건강을 직시할 때마다 되풀이해 일어났다.

감정은 사람들을 움직여 비이성적이고 반생산적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노력했다가 실패하면ㅡ가령 의도치 않게 해를 끼칠 때처럼ㅡ수치심이 고조되거나 민망함과 후회에 불이 붙어, 그 사람이 그런 노력을 통째로 철회하게 될 수도 있다.

말리 가설ㅡ인종주의에 대한 한 사람의 지각은 과거에 대한 지식과 발을 맞추어 증가한다고 주장하는 가설

편향의 행위는 신뢰와 진정한 관계의 기초를 잠식하고,
소외와 격리를 키운다.

또 ‘지배의 평범한 악덕‘이라 묘사되는 것도 있다. 철학자 사만사 바이스 SamanthaVice는 ‘무관심이나 냉담함, 비겁함이나 부정직, 상상력과 공감의 실패, 아니면 그저 단순한 게으름‘이 그런 악덕이라고 열거했다.

특권자의 마음에서는 망상이 한창 벌어지는 중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안전과 안락과 기회와 보살핌을 누가 누릴 자격이 있고 없는지에 대한 습관적이고 무비판적인 왜곡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도덕적 상처moral injury‘ 라 불리게 된 것도 있다. 철학자 낸시 셔면은 그것을 한 사람의 인간관을 압도하는 도덕적 범죄를 저지른데서 기인하는 내적갈등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이 ‘좋은 인간에 걸맞은‘ 표준에 미달했다는 인식이다.

한 사람, 한 가족이 도덕적 상처를 지고 살아간다면, 한 국가, 그 국민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대면하지 않고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행동을 취할 수 없다.

한 국가나 가족에 대한, 혹은 자신의 사고 습관에 대한 진실과 마주하는데도 동일한 기술이 필요하다. 현실을 기꺼이 마주하려는 태도, 자신이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계속 바라보겠다는 맹세, 모든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불편함을 감당하고 뚫고 나아갈수 있는 감정적 기량, 그리고 행동할 용기가 그것이다.

나 자신의 편향을 검토하고 마주하면서 세계와 나의 관계는 변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회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든 그런 공통점이 별로 없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든 친교는 더 깊어지고 더 풍부해졌다. 어려운 대화를 더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감이 더 커지면서 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수리할 수 있었고,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 속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들어가기가 더 쉬워졌다.

누군가가 사회적 차이를 건너 다가와 친교든 신뢰든 맺으려 하면 나는 달려갔다. 그 교류 어딘가에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가치와 의미를 보는 데 있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타인으로부터 독립한 개별적 존재 의미를 반영한다

사실 우리는 서로 속에서, 또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우리의 인간성은 인간성을 타인에게 부여하는 능력에 의존한다.

그리스 여성들은 옅은 피부색을 이상으로 여겼다. 실내에 머물 수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의 엘리트층 남성들은 외부에서 훈련하기 때문에 더 짙은 피부색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하층은 계급에서 피부색의 의미는 바뀐다. 대장장이인 남성은 실내에서 일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여성들은 야외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피부색이 바뀌는 것은 낮은 계급이라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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