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무슨 수를 써야 할 텐데, 모르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 거야, 아니,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 P194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크누텐이 길을 걸어가는 것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후로 나는 이따금씩 그가 서 있던 길을, 그가 어떻게 돌아섰는지를, 그가 어떻게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는지를 마음속으로 떠올려보았다. 나는 이곳에 앉아 글을 쓴다, 그리고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날 엄습해 왔다. - P197

나는 그냥 이곳에 매일 앉아 있다. 나는 불안감을 계속 떨쳐내기 위해 글을 쓴다. 이 불안감이 더 커진 것인지 아니면 작아진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곳에 앉아 글을 쓴다. - P200

나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고, 그저 글쓰기에만 매달리고 있다. 예전에 나는 도서관에 자주 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한 이후로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난 모르겠다. 난 글을 쓰고 나면, 잠자리에 든다. - P201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기타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 P202

나는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챈다, 난 시선을 돌려 버리고, 그녀를, 그녀의 눈을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자리에 서서 화음만 넣는다. - P204

연주 일은 대개 모두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는데, - P206

그녀가 무대 앞에, 여자 친구 곁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그러자 나 역시 그녀를 쳐다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다가, 떨어진다, 모든 것은 아주 한순간에 일어났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 P207

우리는 연주한다. 나는 화음을 치고, 크누텐은 노래를 한다. 그녀가 크누텐을 쳐다본다, 그가 그녀를 쳐다본다. 여자 친구와 함께 무대앞에 서 있는 그녀, 이제 나는 비로소 그녀가 더 이상 나를 보지 않고 크루텐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크누텐도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 P207

어머니는 그냥 안으로 들어와서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이글쓰기를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야 해, 마트에라도 가든지, 연주 일이라도 몇 가지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오늘 크누텐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한다. 그 사람 말로는 크누텐의 아내가 죽었다는구나. 늘 끝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면서. 다른 방도는 보이지가 않았다고, 그 사람이 그러더구나. 그 여자가 죽은 건 조금 전이라는데. 익사한 채로 발견됐대. 그건 끔찍했다고, 그렇지만 끝이 좋진 않았을 거랬지. 아이들한테 안된 일이라고, 아마도 자살이었을 거라고, 그러더구나. - P210

어머니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내려올 것을 부탁했다. 네가 여기 앉아 글을 쓰고만 있을 수는 없잖니, 라고 그녀가 말했다. 어머니는 그냥 안으로 들어왔다.
넌 내려와야 한단다, 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모르겠다. 이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그리 나이가 드시진 않았다. 이제 이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내 글쓰기를 끝낸다. - P210

포세는 입센 이후 최고의 노르웨이 작가로 일컬어진다. 그는 평범한 일상을 투명하게 응시하며 삶의 본질을 꿰뚫어 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이중적 언어로 읽힐 수 있는 시적 언어를 통해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생략하고 철저하게 압축되어 삶의 본질에 다가가고 있다. - P211

그는 평범한 삶의 모습 속에서도 볼 수 있는 갈등과 마음의 번민, 죄와 실망 등 상당히 원초적인 문제들을 짚어 낸다. - P211

그는 단순히 방언의 사용이 아니라 그 언어가 지닌 소리, 리듬 그리고 흐름을 통해서 반복과 사이와 끊어짐의 미학을 완성한다. - P212

반복적인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테마나 의미의 동일성, 분절 의미의 집중, 전이와 같은 외형적인 것. 그리고 인물들 간에 서로 매달리며 서로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싶은 심층적이고 내면적인 모습이다. 철저하게 압축된 문장의 조각들과 그것들의 지속적인 반복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포세의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반복과 긴장 그리고 이완은 어느 순간 삶의 진정을 깨닫게 만든다. - P212

표면적으로 일어난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불안감과 괴로움을 더는 주체할 수가 없다. - P213

『보트하우스』는 폐쇄적이며 발작이 심한 한 인물에 관하여 내포적이고 심리적으로 다면적인 모습을 다루는 이야기다. - P213

아도르노가 예술을 고통의 언어로 정의하듯 포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일어났거나 머리에 떠올렸던 일을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고통이 바로 그것이다. - P214

글을 쓰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소망을 가지고 가능한 한 만족스럽게 자신의 텍스트를 계획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포세는 말한다. - P214

"저는 어떤 것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습니다. 내가 쓰는 것과 나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용구는 ‘시란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 다음 시를 읽으면서 의미를 찾게 되고, 최고의 시에서는 어쩌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알고 있었거나 경험했던 것을 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 P214

포세가 자신의 시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가 자주 언급하는 인용이 호라티우스의 시학이다. (중략) 텍스트는 어떤 것에 대한 은유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215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포세의 작품에서는 반복 기법이 주로 내적 독백에서 나타나며, 기억과 회상 그리고 강박관념들로 이루어진다. - P215

마치 컨트리가수처럼, 그가 글을 쓰는 것은 악기를 다루는 듯하고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음악처럼 반복, 재시작, 휴지가 있는데, 어쩌면 그는 바람, 폭풍, 파도, 비처럼, 다시말해 자연처럼 생각하는 듯싶다. 이러한 단어의 흐름 속으로 의미, 표현 그리고 여러 가지의 테마가 드러난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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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보면 화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생각들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불안감, 두려움 등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또한 여기 일일이 밑줄 긋진 않았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혹은 화자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그런 일들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을 보면서 우리 개개인의 의식의 흐름도 자세히 보면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실제 현생을 살아가면서도 가끔은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을 법한 일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순간들도 종종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상들이 과할 경우 심하게는 정신병적인 증세로 안좋은 쪽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면 마냥 나쁘다고 생각할 것까지는 아닐듯 싶다.
이후의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진행될지...

나는 이곳에 앉아서 글을 쓴다. 읽는 이를 위해 쓰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홀로 있다. - P97

나는 이곳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가 불안감을 덜어 준다. 글쓰기가 좋다, 이것은 날 행복하게 만든다. - P98

지난 여름 나는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그때였는데, 그 어떤 것도 이전과는 같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크누텐과 나는 늘 함께였다. 이제 크누텐은 결혼했고, 두 딸이 있다. - P98

오직 비와 어둠만이 둘을 감싸고, 나머지 우리들은 각자의 고요한 고독함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 고독함 주위에는 고요한 연대감이 자리해 있다, 그렇다, 그곳에 있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 연대감이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에게 개인이고자 함 없이, 우리는 다만 그곳에 있는 것이다, - P103

그것은 언제나 치고 있는 파도였고, 점점 더 자라고 있는 살갗이었다. - P105

나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지만, 불안은 계속 커지기만 할 뿐이다. 글을 쓸 때는 침착해지지만, 그러고 난 직후엔 불안감이 다시 찾아온다,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나는 안다. - P106

라인렌더(reinlendar) : 4분의 2 박자의 커플 댄스. - P108

약간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런 다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 P120

그런데 우리는 내 집으로, 내 어머니한테는 갈 수가 없다. 그녀는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 P125

나는 길에 남아 우두커니 선 채 보트하우스에 대해 말하지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걸 이야기해야 했던 걸까, 이야기하기엔 그저 우스꽝스러운 것일 뿐인데. 보트하우스 안에 들어가면 안 돼. 크누텐의 아내가, 들어가선 안 돼. - P128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할 텐데, 불안감이 극심하다,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한다, - P130

내가 일어서자, 파도소리가 들린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내가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들린다, 갑자기 그것이 들린다. 나는 파도 소리를, 피오르를 듣는다, 그러자 내 몸속에서 불안감이 매우 분명해진다. - P131

어둠이 나를 감싼다, 나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그러다 내 몸속에 치는 파도의 움직임을 깨닫는다, - P132

나는 꼼짝 않고 서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다, 뭐라도 해야한다, - P133

파도는 내 삶 전체를 관통해 계속 또 계속 치고 있었다. - P134

나는 방 안쪽에 숨었다. 외출을 기피하는 이 괴벽은 토르셸과 내가 마을 축제에서 연주했던 밤 이후에 찾아왔다. 그날 저녁 이후로 나는 밖을 다니지 않는다. - P135

그냥 걸어야 해, - P137

나는 모르겠다. - P138

지난여름 나는 크누텐과 마주쳤다. 오랜만에, 적어도 10년 만에 크루텐을 다시 만난 것이다. 나는 걸어서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화창한 여름날의, 조금 늦은 오후였다, - P140

크루텐을 만난 지도 오래되었군, 분명 10년은 되었을 텐데, 다시 그를 마주 대하기가 어렵겠는걸,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크누텐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알고 있었지, 저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어, 내가 알던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리란 것도, 나는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 P141

크누텐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건 평화로운 시간이야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그런데 아내가 저 친구를 저렇게 바라보고 있군, 저 친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어, 하고 생각한다, 아내는 늘 저렇게 쳐다보는군, 하고 그는 생각한다, 난 다만 평화롭게 쉬고 싶을 뿐이야, 그게 전부라고, 그런데 아내가 저렇게 저 친구를 들여다보고 있어, 저 친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고 그는 생각한다, - P142

그리고 크누텐은 이렇게 생각한다, 더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다 너무 옛날 일인걸. - P142

지금에 와서는 너무도 사소해 보이는 그 일들이 그때 당시에는 훨씬, 훨씬 더 큰, 거창하고 비밀스러운 일로 보였어. - P144

그러자 그의 아내가 당신 그 오만 가지 일에 호들갑 떨면서 걱정하고, 옛 친구들 만날까 흠칫거리는 짓 좀 그만둬, 그럴 거면 왜 휴가 때 여길 오자고 한 거야, 참 나, 다른 걸 할 수도 있었잖아, 안 그래, 라고 그녀가 말한다. 그러자 크누텐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걷기만 한다, - P146

그 보트하우스처럼 지금은 모든 게 너무나 달라, 그곳은 정말로 큰, 거의 내 모든 삶이었던 곳인데, 그런데 지금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듯이,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냥 사라지지, 모든 것은 달라져, 한때 그랬던 것은 예전과는 꽤나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버려, 사소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 그런 식인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냥 그런 거야, 하고 생각한다. - P147

그는 피오르를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걸어 보트하우스를 지나친다, 그리고 그는 오늘 나를 만난 일을 생각한다, 여러 해 동안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지, 못 본 지 적어도 10년은 되었을 거야, 우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고, 밴드에선연주도 함께했어, 그리고 오늘 그 친구와 다시 마주쳤지, 이상하게도 그 친구랑은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어, 난 그 친구를 다시 만나는 걸, 다른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걸 두려워해 왔지, 너무나 오래전이어서, 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아내는, 크누텐은 그의 아내를 떠올린다, - P151

그는 오늘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을 알아챘다. 그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다. - P152

크누텐은 길가에 서서, 작은 섬을 내다본다, 그러다가 내가 몸을 돌려, 크루텐을 쳐다보더니, 몸을 돌린다, 저 친구가 날왔다는 걸 내가 알아차려선 안 되기 때문이지, 그런 거지, 하고 크루텐은 생각한다. - P153

그렇지만 저 친구는 날 봤어, 저 친구는 고개를 들었고, 다시 내렸지, 저 친구는 분명 날 봤어, 그리고 이제 저들은 뭍으로 갔지, 저들은 작은 섬에 머물 셈이겠지, 늘 이런 식이야, 난 오늘 아내가 저 친구를 보는 눈빛을 알아차렸어, 늘 이런 식이었지. - P155

크누텐은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린다,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에 앉아서 머무르기로 마음먹는다, 그냥 여기 앉아 있자, 하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를 듣는다, - P156

아내는 이 짓을 그만둬야 해, 계속 이릴 순 없어, 그녀가 그 친구를 쳐다보는 눈빛, 그건 일어나선 안 될 일이야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 P158

무도회에서의 그 여자아이의 일은, 그건 그저 약간의 장난이었을 뿐이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런데도 그 후에 난 정말 이상해졌고, 무척이나 몸을 사리게 됐어, 연습도 더는 하기 싫어졌지, 그렇지만 그건 너무나 옛날 일이야, 하고 생각한다. - P159

그녀가 다가와 그의 곁에 앉는다. 크누텐이 산책하니까 좋았어, 라고 묻자, 그녀가 응, 그랬어, 라고 말하고는 당신 이제 진정된 거야, 이성을 다시 찾았느냔 말이야, 당신이 이런 식으로 굴면 나는 참을 수가 없어, 라고 말한다. - P160

크누텐은, 목소리가 들리는군, 그녀는 그 친구를 데리러 갔던 거야, 그 친구의 집에 그 친구를 데리러, 그를 여기 데려오기 위해, 목소리가 들리는군, 아내의 목소리, 그 친구의 목소리, 목소리만 들려, 아내는 그 친구를 데리러 갔던 거야, 하고 생각한다, 그 친구네 집에 가다가, 아마도 아내는 길에서 그 친구를 만나고서, 이리로 데리고 온 걸 테지, 하고 그는 생각한다, - P162

말을 꺼내야 해, 평범한 방식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 - P165

크누텐은 자기 잔을 들어 올려 창에 비친 자신에게 건배를 한다, - P174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묻고, 내가 하는 일을 말해 주고, 그런데 어째서 난 늘 어색해해야만 하는 걸까, 아내는 민속춤마당에서 연주를 하는 그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데, 어째서 난 늘 어색해해야만 하느냔 말이야, 그럴 순 없어, 견딜 수가 없다고,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술병을 꺼내어 한 모금 들이켠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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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레이테에 사는 스베이넨의 농장 아래를 지나간다. 우리가 가고 있는 보트하우스를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이가 그 사람이다. - P51

눈을 어둠에 적응시켜야 하기에 우리는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다. - P52

우리는 레이테에 사는 스베이넨이 우리에게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길 전체를 차지한 듯이 우리에게 똑바로 걸어온다, 저 사람이 배를 서리한 녀석들을 거의 죽여 놨대, 그리고 참견쟁이인 걸로 말하면 미주알고주알 알아야 직성이 풀린대, 이제 그가 우리한테 마이크 스탠드에 관해 물어볼 거야, 라고 크누텐이 말한다. - P54

후릿그물 : 강이나 바다에 넓게 둘러치고 여러 사람이 두 끝을 끌어당겨 물고기를 잡는 큰 그물 - P60

목적은 피오르에 나가 있는 것인가 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 P72

나는 크누텐과 같은 방에 앉아 있는 것이 두렵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무슨 말을 할지 알았던 적도 없다, - P75

그녀의 뒤에서 걸어가는 것은 어쨌든 내가 말을 하지 않을 것임을 그녀가 아는 까닭이다, - P75

말할 것이 없으니 나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말할 것이 있어 본 적도 없다, - P75

늘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대개는 염두에 둔 적이 없어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얘기할 거리가 없다, - P76

어머닌 모든 걸 예전 그대로 두는 걸 좋아하셔,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으실 거야, 라고 말한다. - P81

일찍이 그가 알던 사람들, 더 이상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 그 스스로 지워 버렸던 사람들, 어린 날의 추억을 떠올릴 때나 더 좋을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그것이 정확히 내가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 것이다. 나는 꺼낼말이 없다. 그저 앉아 있을 뿐이다. - P82

이러고 살아, 그가 말한다.
그래, 우리가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눈 지도 오래되었지,
내가 말한다. - P83

세월이 빨리 흘렀어.
정말 믿기지 않아.
그렇지만 자넨 가족을 얻었군.
어떤지 보이지. - P84

낚시는 자주 가나? 크누텐이 묻는데, 그의 목소리 안에 무언가가 있다, 무엇인지 모를 무언가가, 그의 목소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들린다, 그 안엔 무언가가 있다, 그럴 때가 있지, 자주는 아니야, - P85

gammaldans(민속춤마당) :  19세기 후반에 유행한 북유럽 민속무용. 두명씩 짝지어 원을 그리며 추는 일종의 사교댄스로, 지금도 북유럽 공립학교에서는 교습을 실시한다. - P87

크누텐이 도와줄까, 라고 묻자 그녀가 아냐, 새삼스럽게 무슨, 당신은 대개 도와주는 일엔 관심이 없었잖아, 나도 도움받는 일엔 관심 없어. 내가 빼낼 수 있어, 라고 그녀가 말한다, 그러자 누텐이 좋아, 그럼 나야 좋지 뭐, 당신이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면야, 나야 좋지. - P89

나는 이 집에 와서는 안 됐다, 어째서 그녀가 오자고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단지 크누텐을 들볶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그녀는 크누텐이 나를 비롯해 어린 시절 친구들을 다시 만날 생각에 겁을 내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그녀가 내게 이곳에 오자고 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그녀가 날 오라고 청한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 P91

내가 그녀의 눈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 때, 그것은 내가 다른 무엇을 보는 것을 그녀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 P92

그렇게 된 것이 틀림없다. - P92

나는 일어나, 자리를 떠, 집으로 가고 싶다, 모든 것이 다 옛일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고, 끝나서 사라졌으면 싶다, 서둘러야 한다, 일어나 발아 움직여라, 집에 가야해, - P93

크누텐이 몸을 돌리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그는 이 여자가 이래, 내 아내가 이런다고, 취하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정신이 아주 말짱해, 그런데 내 바로 눈앞에서, 바닥 한가운데에 떡하니 서서 이제 막 만난 남자를 끌어안고 키스하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한다. 그가 비웃음을 짓는다. 크누텐이 의자에 앉아 비웃고 있다. - P94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더 이상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아무도 날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나는 숨고 싶었고, 사라지고 싶었다. 나는 두려웠다. 난 재빨리 집으로 걸어갔고, 내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불안했고, 두려웠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무언가 피할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나는 집으로 걸어갔고, 벌써부터 토르셸과 함께 연주할 토요일 밤이 걱정스러지기 시작했다. - P95

불안감이 날 걱정스럽게 만들었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심지어 위스키를 얼마쯤 마셨는데도 잠이 들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면서, 불을 켰다껐다 했다, 책을 읽으려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뒤척이며 그냥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 불안감이 처음으로 날 엄습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 P96

나는 이곳에 앉아 글을 쓴다. 내가 글을 쓰는 까닭은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서다. 글쓰는 것이 도움이 된다.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 온다. - P96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고, 더 이상 기타도 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내게 이 글쓰기를 집어치워야 한다고 말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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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100자평] 공중그네 (리커버 특별판)

만약 마음이 힘들거나 지쳐있다면 이 소설 속 주인공이 가졌던 특유의 낙천적인 태도를 가져보는 것도 좋은 선택지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년전에 읽었던 책인데 이때 딱히 자세히 기록해놓은 건 없었지만, 100자평에 끄적였던 핵심 메시지를 통해 스트레스는 잠시 내려놓고 삶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조금이나마 새롭게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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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2023-11-07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이라는 걸 잠시 내려놓았다 들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이 허당을 어찌 하오리까ㅜㅜ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1-07 15:06   좋아요 1 | URL
뭐 그렇게 생각하실수도 있는거죠ㅎㅎ 그래도 삶 자체는 아무리 힘들어도 들고가시는게..ㅎㅎ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보다 긍정적으로 갖고 가는게 정신적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생각에 공유해보았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2023-11-07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옥희를 위해 조금이라도 나은 남자가 되고자 노력했는데 정작 옥희는 무슨 정비공 따위와 사랑에 빠져 있다니, 정호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혼란스럽다 못해 허탈한 웃음을 흘렸고, 옥희는 그 웃음을 그들 사이의 긴장감이 다 풀어졌다는 의미로, 다시 좋은 친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내 취향은 가난하고 불쌍한 남자들인가봐." 옥희는 농담을 건넸다.

살아가다 보니 그 무엇도 옛 친구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게 점점 더 절실히 느껴지거든.

"봐, 그 옛날 네가 와서 우리 집 담장 너머로 던졌던 바다 유리야. 나는 이걸 계속 보관하고 있었어."
정호는 그 매끈한 녹색 조약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간직하려 하는 그 모든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들 - 단어, 기억, 몸짓, 감정을 담뿍 담은 소중한 무언가가 되었다가 다시 아무 의미 없는 물건으로 돌아가는 것들 - 이 그의 손바닥에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동시에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 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 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는 시점은 놀랍도록 일러서, 대체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도달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서른에서 마흔 살 사이에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일부 사람들은 출생 환경이나 그 자신의 야망, 그리고 재능에 힘입어 대략 쉰 전후에 비슷한 깨달음을 얻는데, 그 정도 나이에 이르면 이러한 소강도 그렇게 끔찍해 보이지 않는 법이다.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아의 상승과 확장을 조금도 포기하지않아도 되는 사람들 말이다.

김성수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도내 네 개 군에 걸쳐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옥한 논밭을 상속받을 부잣집 장손 신분을 타고났을 뿐아니라, 어느 장관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으면서 바로 이 범주에 속한 남자가 되었다.

"이것 보렴, 코스모스야. 원래는 첫서리가 내릴 즈음 죽는 것들인데 올해는 너를 위해 계속 꽃을 피우고 있었구나."

"내가 늘 얘기했지? 월향이에게 어울리는 꽃은 코스모스라고 말이야. 정말 애틋하고, 또 보기보다 훨씬 강하니까."

자신의 스승을 대놓고 모욕하고 무시하는 모습은 정호에게 차마 참아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명보가 그간 귀가 닳도록 강조했던 모든 조언과 경고의 말들이 한순간에 떠나버렸고, 그의 마음속엔 이제 오직 맹목적인 격분 뿐이었다.

정호로서는 가능한 한 빨리 저택에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몸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정신없이 두근거렸다. 경찰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첫번째 큰 임무를 무참하게 망쳐버렸다는 굴욕감과 실망감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희생할만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정호는 생각했고,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 옥희와 명보의 얼굴이 환하게 떠올랐다.

"환하게 뜬 달을 보는 것 같아・・・・・ 월향 언니 이름처럼 말이야." 옥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옥희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가 옥희를 사랑하는 것처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그러한 자각이 그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그에게 진한 행복감을 주었다.

모든 결혼식은 신부와 신랑의 이상적인 행복과 견주어 하객들의 인간관계에 더 깊은 명암을 부여하기 마련이다. 결혼식은 사랑하는 두 사람을 영원토록 함께 이어주는 예식이다. 하지만 그 이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다투고, 절망하고, 결국은 헤어지기를 결심하는가?

하지만 옥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제 이 남자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야, 우리 할 얘기 다했잖아? 모든 건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어. 안녕." 이렇게 인사를 건넨 뒤, 옥희는 검은 하늘이 하얀 땅과 만나는 지평선을 향해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이는 결코 지능이나 열정의 차이로 결정되는 자질이 아니다.
이 두 가지는 몽상가의 타고난 자질과 가장 자주 혼동되는 것들이다.

다들 새로운 것이라면 뭐든 열광하잖아.

그에게 실패란 마치 올이 나간 스타킹과 같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걸 남들에게 눈치채이는 건 당사자의 잘못이라는 식이었다.

실패를 감추고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양 폐기하려는 노력은 단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인 동시에 예의의 문제였다. 이는 일종의 멋지고 귀족적인 감성이었으나, 단이의 역할을 다정하고 친밀한 친구보다는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한정 짓는 것이기도 했다.

연화만이 옥희의 곤경을 이해해 줄 터였다. 비록 몇 달 동안이나 서로를 보지 못했지만, 옥희는 자신의 오랜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을 막막하고 위험한 바다, 혹은 어느 살벌한 전쟁터로 여겼다면, 연화는 그 모든 것이 일종의 유희나 한 묶음의 신선한 과일 바구니와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그에게 세상은 상대와 겨루는 놀이이거나, 그저 즐겁고 향기로운 것들을 실컷 음미할 기회였다.

그날 무엇보다 옥희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건, 한쪽 입술만 살짝들린 상태로 지어 보이던 연화의 절망적이고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어린 시절 연화는 어머니와 언니의 경멸을 받으면서도 틈만나면 양쪽 입꼬리를 늘이며 밝게 웃곤 했다. 그런 명랑함이 바로 그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이었다는 걸, 옥희는 다 큰 성인이 된 지금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편은 술과 담배만큼이나 흔하게 남용되는 악습이었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 가장 세련된 여성과 남성, 그리고 가장 존경받는 예술가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모여 꿈의 세계를 방문하는 의식을 치른다는 얘기는 비밀도 아니었다.

"누가 다른 이를 강제로 머물게 하거나 떠나라고 할 수 있나요?"

"아니, 옥희 씨. 그게 바로 진정한 사치죠. 화려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 말입니다."

나는 무너지지 않을 거야. 적어도 여기서는 안 돼. 옥희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생각과 표정을 다잡았다.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런 금이 난 곳으로만 내뿜어져 발산되는 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것 같았다.

"내가 죽어야 할 이유가 많을수록, 그렇게 포기하고 싶어지지가 않더라." 정호가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 누구도 내 빈자리를 그리워하지 않더라도, 그래도 사는 게 죽는 것보다는 여전히 나은 거야."

이번에는 옥희가 멈춰 서서 정호를 빤히 노려볼 차례였다.
"네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말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뭐니?"

"너만 신경 써준다면, 나한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와, 그럼 난 절대 죽지 않을지도 몰라!" 정호가 씩 웃어 보였다. 옥희도 그와 함께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용감한 거지."

주변의 모든 곳에서 삶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계속 나아가는 중이었고, 그들의 삶 역시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하는 세상 안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모든 존재가 공기처럼 가볍게 서로에 가 닿으며 투명하게 반짝이는 지문을 남겼다.

인간들은 늘 거짓말을 하고, 서로를 속이며, 자신의 친구와 가족과 나라를 배신했다. 그렇게 배신을 하며 달라붙은 상대를 또 배신하였으며, 자신의 얄팍한 안위를 위해서는 그 어떤 신의도 없었다.

모든 한국인은 일본식으로 성명을 바꾸라는 창씨개명령이 내렸을 때, 나라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 부모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을 헌신짝처럼 버리기 위해 헐레벌떡 줄을 섰다. 자신이 타고난 이름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신념도 명예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고 정호는 생각했다.

평온한 시기보다 혼란스러운 시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며 잠재력을 표출하고 그동안 뭉툭하게만 느껴졌던 삶의 각도를 더 날카롭고 신선하게 인지하는 몇몇 사람들처럼, 영구 역시 명확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애매한 공간에서 더 활발하게 깨어났다.

정호는 무의식적으로 이 모든 풍경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았다. 과거 자신에게 깊은 굴욕을 안긴 누군가에게 모욕을 대갚음하는 이 행복의 순간을 나중에 실컷 곱씹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의 귀에서 맥박이 터질 듯 고동쳤고, 손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혈관에 한꺼번에 피가 돌며 진동하는 것 같았다. 정호가 지금껏 경험해 본 중 이보다 짜릿하고 감미로운 감각은 없었다.

마치 오만함을 슬픔으로 바꿔주는 해독제라도 되는 양, 옥희의 이름은 한철의 낯빛을 일순간에 확 바꾸었다.

정호는 적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기도취의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만족스레 지켜보았다. 이 남자의 약점이 바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옳은 쪽인 것처럼 보이고 싶은 욕구 말이다.

한철은 자신이 언제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부류의 남자였다. 지금 한철의 얼굴을 가득 뒤덮은 비통과 애수의 표정도 결국은 제 자존심을 보호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걸 정호는 잘 알고 있었다.

한철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다름 아닌 그의 자만심을 뒤흔드는 것이었고, 그건 단순한 주먹질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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