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옥희를 위해 조금이라도 나은 남자가 되고자 노력했는데 정작 옥희는 무슨 정비공 따위와 사랑에 빠져 있다니, 정호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혼란스럽다 못해 허탈한 웃음을 흘렸고, 옥희는 그 웃음을 그들 사이의 긴장감이 다 풀어졌다는 의미로, 다시 좋은 친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내 취향은 가난하고 불쌍한 남자들인가봐." 옥희는 농담을 건넸다.
살아가다 보니 그 무엇도 옛 친구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게 점점 더 절실히 느껴지거든.
"봐, 그 옛날 네가 와서 우리 집 담장 너머로 던졌던 바다 유리야. 나는 이걸 계속 보관하고 있었어." 정호는 그 매끈한 녹색 조약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간직하려 하는 그 모든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들 - 단어, 기억, 몸짓, 감정을 담뿍 담은 소중한 무언가가 되었다가 다시 아무 의미 없는 물건으로 돌아가는 것들 - 이 그의 손바닥에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동시에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 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 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는 시점은 놀랍도록 일러서, 대체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도달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서른에서 마흔 살 사이에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일부 사람들은 출생 환경이나 그 자신의 야망, 그리고 재능에 힘입어 대략 쉰 전후에 비슷한 깨달음을 얻는데, 그 정도 나이에 이르면 이러한 소강도 그렇게 끔찍해 보이지 않는 법이다.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아의 상승과 확장을 조금도 포기하지않아도 되는 사람들 말이다.
김성수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도내 네 개 군에 걸쳐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옥한 논밭을 상속받을 부잣집 장손 신분을 타고났을 뿐아니라, 어느 장관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으면서 바로 이 범주에 속한 남자가 되었다.
"이것 보렴, 코스모스야. 원래는 첫서리가 내릴 즈음 죽는 것들인데 올해는 너를 위해 계속 꽃을 피우고 있었구나."
"내가 늘 얘기했지? 월향이에게 어울리는 꽃은 코스모스라고 말이야. 정말 애틋하고, 또 보기보다 훨씬 강하니까."
자신의 스승을 대놓고 모욕하고 무시하는 모습은 정호에게 차마 참아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명보가 그간 귀가 닳도록 강조했던 모든 조언과 경고의 말들이 한순간에 떠나버렸고, 그의 마음속엔 이제 오직 맹목적인 격분 뿐이었다.
정호로서는 가능한 한 빨리 저택에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몸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정신없이 두근거렸다. 경찰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첫번째 큰 임무를 무참하게 망쳐버렸다는 굴욕감과 실망감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희생할만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정호는 생각했고,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 옥희와 명보의 얼굴이 환하게 떠올랐다.
"환하게 뜬 달을 보는 것 같아・・・・・ 월향 언니 이름처럼 말이야." 옥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옥희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가 옥희를 사랑하는 것처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그러한 자각이 그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그에게 진한 행복감을 주었다.
모든 결혼식은 신부와 신랑의 이상적인 행복과 견주어 하객들의 인간관계에 더 깊은 명암을 부여하기 마련이다. 결혼식은 사랑하는 두 사람을 영원토록 함께 이어주는 예식이다. 하지만 그 이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다투고, 절망하고, 결국은 헤어지기를 결심하는가?
하지만 옥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제 이 남자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야, 우리 할 얘기 다했잖아? 모든 건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어. 안녕." 이렇게 인사를 건넨 뒤, 옥희는 검은 하늘이 하얀 땅과 만나는 지평선을 향해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이는 결코 지능이나 열정의 차이로 결정되는 자질이 아니다. 이 두 가지는 몽상가의 타고난 자질과 가장 자주 혼동되는 것들이다.
그에게 실패란 마치 올이 나간 스타킹과 같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걸 남들에게 눈치채이는 건 당사자의 잘못이라는 식이었다.
실패를 감추고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양 폐기하려는 노력은 단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인 동시에 예의의 문제였다. 이는 일종의 멋지고 귀족적인 감성이었으나, 단이의 역할을 다정하고 친밀한 친구보다는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한정 짓는 것이기도 했다.
연화만이 옥희의 곤경을 이해해 줄 터였다. 비록 몇 달 동안이나 서로를 보지 못했지만, 옥희는 자신의 오랜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을 막막하고 위험한 바다, 혹은 어느 살벌한 전쟁터로 여겼다면, 연화는 그 모든 것이 일종의 유희나 한 묶음의 신선한 과일 바구니와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그에게 세상은 상대와 겨루는 놀이이거나, 그저 즐겁고 향기로운 것들을 실컷 음미할 기회였다.
그날 무엇보다 옥희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건, 한쪽 입술만 살짝들린 상태로 지어 보이던 연화의 절망적이고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어린 시절 연화는 어머니와 언니의 경멸을 받으면서도 틈만나면 양쪽 입꼬리를 늘이며 밝게 웃곤 했다. 그런 명랑함이 바로 그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이었다는 걸, 옥희는 다 큰 성인이 된 지금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편은 술과 담배만큼이나 흔하게 남용되는 악습이었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 가장 세련된 여성과 남성, 그리고 가장 존경받는 예술가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모여 꿈의 세계를 방문하는 의식을 치른다는 얘기는 비밀도 아니었다.
"누가 다른 이를 강제로 머물게 하거나 떠나라고 할 수 있나요?"
"아니, 옥희 씨. 그게 바로 진정한 사치죠. 화려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 말입니다."
나는 무너지지 않을 거야. 적어도 여기서는 안 돼. 옥희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생각과 표정을 다잡았다.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런 금이 난 곳으로만 내뿜어져 발산되는 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것 같았다.
"내가 죽어야 할 이유가 많을수록, 그렇게 포기하고 싶어지지가 않더라." 정호가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 누구도 내 빈자리를 그리워하지 않더라도, 그래도 사는 게 죽는 것보다는 여전히 나은 거야."
이번에는 옥희가 멈춰 서서 정호를 빤히 노려볼 차례였다. "네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말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뭐니?"
"너만 신경 써준다면, 나한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와, 그럼 난 절대 죽지 않을지도 몰라!" 정호가 씩 웃어 보였다. 옥희도 그와 함께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주변의 모든 곳에서 삶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계속 나아가는 중이었고, 그들의 삶 역시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하는 세상 안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모든 존재가 공기처럼 가볍게 서로에 가 닿으며 투명하게 반짝이는 지문을 남겼다.
인간들은 늘 거짓말을 하고, 서로를 속이며, 자신의 친구와 가족과 나라를 배신했다. 그렇게 배신을 하며 달라붙은 상대를 또 배신하였으며, 자신의 얄팍한 안위를 위해서는 그 어떤 신의도 없었다.
모든 한국인은 일본식으로 성명을 바꾸라는 창씨개명령이 내렸을 때, 나라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 부모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을 헌신짝처럼 버리기 위해 헐레벌떡 줄을 섰다. 자신이 타고난 이름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신념도 명예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고 정호는 생각했다.
평온한 시기보다 혼란스러운 시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며 잠재력을 표출하고 그동안 뭉툭하게만 느껴졌던 삶의 각도를 더 날카롭고 신선하게 인지하는 몇몇 사람들처럼, 영구 역시 명확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애매한 공간에서 더 활발하게 깨어났다.
정호는 무의식적으로 이 모든 풍경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았다. 과거 자신에게 깊은 굴욕을 안긴 누군가에게 모욕을 대갚음하는 이 행복의 순간을 나중에 실컷 곱씹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의 귀에서 맥박이 터질 듯 고동쳤고, 손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혈관에 한꺼번에 피가 돌며 진동하는 것 같았다. 정호가 지금껏 경험해 본 중 이보다 짜릿하고 감미로운 감각은 없었다.
마치 오만함을 슬픔으로 바꿔주는 해독제라도 되는 양, 옥희의 이름은 한철의 낯빛을 일순간에 확 바꾸었다.
정호는 적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기도취의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만족스레 지켜보았다. 이 남자의 약점이 바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옳은 쪽인 것처럼 보이고 싶은 욕구 말이다.
한철은 자신이 언제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부류의 남자였다. 지금 한철의 얼굴을 가득 뒤덮은 비통과 애수의 표정도 결국은 제 자존심을 보호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걸 정호는 잘 알고 있었다.
한철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다름 아닌 그의 자만심을 뒤흔드는 것이었고, 그건 단순한 주먹질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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