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밖에 데크까지 깔았는데 왜 어닝을 안 치시나 했죠."
이번에도 역시나 특유의 떨림과 긴장감이 날 찾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컸다. 이 묘한 감각에 천천히 중독되는 듯하다. 무엇이든 간에 도전을 해본 사람만이 아는 그런 맛이다.
역시나 홍보가 중요하다. 자그마한 칠판 형태의 입간판을 세워 놨다.
뭘 믿고? 제대로 된 곳에서도 뒤통수 치고 벗겨먹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런데 협회에서는 정확히 어떤 일을......?" "아, 많지요. 추출가공식품제조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조사와 연구를 하고, 영업시설의 현대화, 품질 향상, 경영 및 가공기술 향상을 위한 제반지원사업, 영업에 관한 분규의 조사 및 조정, 불량식품 제조 및가공, 유통을 방지하는 등 뭐일일이 다 말하려면 입이 아프지."
누구든 무엇이든 적을 늘려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터지려는 것을 뚜껑으로 짓눌러 막으며 참는 중이었다. 순수한 노인네 속여서 가입비 뜯어내고, 회비 뜯어내고 그랬던 거 아닌가.
"어디서 약을 팔아......?" 제대로 꼽을 줬으니 또 와서 귀찮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설사 협회가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곳일지라도 가입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모든 일에 대한 결정은 내가 내린다. 그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진다. 그 누구도 그걸 덜어주지 않는다.
동종업계 사람들과 친목을 다지는 게 마냥 나쁘지는 않을수도 있긴 하다. 같은 고찰을 하며 외로움을 덜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런 걸 필요로 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다. 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 작은아빠, 고모로부터 많은 답들을 받았으니까. 그래, 외로울 틈도 없다.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야 됩니까? 괜찮다는데 왜 그러십니까? 지금 권유가 아니라 강요를 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흔들림은 없었다. 만약 단순히 돈만 바라보면서 이 일을 했다면 조금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돈 욕심도 있다. 많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단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되새기며 나아갈 뿐이다. 절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것이다. 자꾸만 욕심이 난다. 욕심도 건강할 수 있다. 더 나아지려는 욕심, 그에 걸맞는 노력과 근성이 있었기에 지금 세상도 있는 법이다.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괜찮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여기서 만족되지는 않았다. 보다 공격적인 마케팅에 들어갈 때였다. 사업은 천천히 불려 나가는 거라지만, 초장부터 대박이 나지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사과즙이랑 주스는 무슨차이에요?" "농도의 차이입니다. 사과즙이 아무래도 좀 더 고농축이죠. 하지만 둘 다 품질 좋은 사과로 다른 첨가물 없이 추출하는 건 같습니다."
적어도 웃는 얼굴로 칭찬 한마디라도 해주면 기운이 솟았다.
나는 블루베리즙을 컵에 담으며 대답했다. "예, 항산화 능력이 아주 우수합니다. 세계 10대 슈퍼푸드에도 선정됐고, 눈이랑 혈관에도 좋아요. 당뇨 예방에 항암 효과도 있고, 다양합니다. 한 번 드셔보세요."
"아, 요만한 컵 한잔씩이 뭐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쩨쩨하게 굴어? 그런 식으로 장사하면 안 돼. 장사라는 게 그렇게 치사스럽게 하면 안 된다고."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가세요."
"뭐, 뭐어?" 나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들으셨잖습니까. 가시라고요."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이런걸로 이렇게 치사하게 굴면 누가 와? 자네 지금 실수하는 거야? 손님 잃는 거라고."
"알겠습니다. 제 장사는 제가 알아서 하니까 걱정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만 가세요." "아니, 뭐 이런....!"
"빨리 보내버려야지. 이거 가지고 그 개진상을 떠는 놈이면 보통 놈이 아니거든. 저런건 확실하게 잘라야 돼. 조금 받아주는 것 같으면 계속 개기거든."
"아무튼 잘했다. 진상은 무조건 걸러야 돼. 경험상 진상떠는 놈들한테는 잘해줘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뒷말도 꼭 진상들한테서 나오고, 클레임도 걸고 난리치니까. 오히려 친절한 손님들이 결국 좋은 말 해주고, 다시 찾아주고 그래. 파레토의 법칙이라고 아냐?" "파레토? 그게 뭐예요?" "80대20 혹은 8대2의 법칙.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난다는 소리야. 네 매출도 진상 여덟명보다는 좋은 손님 둘한테서 나올 거라는 말이지."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리고 이 말하고 간다는 걸 깜빡했다." "뭐요?" "지금도 진상 들렀다 가서 알겠지만, 장사라는 게 스트레스 관리야. 모든 일이 그렇지. 정신줄 똑바로 잡아.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지만, 장사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몰라. 내가 말했지? 버텨야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
"장사 안돼봐라. 가게 나와있는 것도 곤욕이지. 가만히 있어도 임대료다 공과금이다 뭐다 돈을 줄줄 새는데. 재고쌓여 있는 거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고. 넌 지금 임시지만 여기서 살고 있지? 24시간이 스트레스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요." "이게 문제가 그렇게 되면 친절하게도 못해. 하루에 한두명 올까 말까하는데 누가 계속 친절할 수 있겠냐? 그럼 자연스레 장사도 더 안 되고. 악순환의 반복이거든. 그러니까 진상이다 싶으면 미련 없이 커트하고, 잘 버티라고. 일단 첫 번째가 길게 가는 거야. 그 다음을 바라보려고 해도 일단 버텨야 뭐가 될 거 아니냐." "그렇죠. 명심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우리 과이신 거 같아요. 딱 할때 제대로 해버리고 싹 해치우는 스타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또 뭔가 반짝 떠오르면 바로 해야 되잖아요. 안 그래요?"
남자는 쩝 하고 입맛을 한번 다시고 말했다. "아니, 일거리 좀 드릴까 했죠." "일거리요?" "요즘 여름이라고 몸들이 허하다고 해서 약들을 많이 지어가는데, 감당이 안 될 정도거든요. 자꾸 미뤄지니까 환자들은 환자들대로 불만이고, 우리는 우리대로 힘들고. 근데 가까운 데 건강원이 생겼다고 하니까 왔죠." "그러셨군요."
하지만 당장 눈앞의 몇 푼에만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자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주도적으로 일해야지, 하청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조금 극단적일지라도 내 마음이 그랬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도 한의원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고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상황이 재미있었다. 거부할 수 있는 권리라는게 생겼다. 내 삶에도 선택권이라는 게 있었다. 전에는 주어진 상황에 나를 맞추며 살지 않았었나. 지금은 내가 주도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의 이런 속마음을 안다면 우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랬고, 이제 바뀌었다. 이 소소하지만 분명한 성취감 덕분에 더 바뀌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염치라는게 있어서 진단을 받고 나면 꼭 즙을 한 박스씩 구입했다. 가끔 슬러시 하나를 사먹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품을 늘리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십만원씩 하는 성분검사도 받아야하고, 포장지 디자인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다 돈이다.
하지만 옛날부터 건강원의 수입원 중 하나가 바로 재료를 가져오면 공임비를 받고 대신 즙을 내주고 약을 달여주는 것이었다. 노동력에 기계 대여비, 전기세 등을 생각하면 저렴한 편이었다. 만약 포장을 원하면 그건 또 개수대로 돈을 따로 받는다.
사람은 노화가 진행되면서 자연히 각종 질환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그리고 약해지는 몸만큼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도 필요하고. 동네 작은 병원들은 적어도 노인들에게는 두 가지 역할을 한 번에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나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를 의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접근성 좋고,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치료사라 생각한다.
직업과 꿈을 동일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장래희망과 꿈은 분리돼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무조건떼어놓고 보란 법도 없다. 지금 내가 그랬다. 이게 꿈이 됐다. 직업이란것에는 단순히 돈 말고도 더 무거운 무언가가 있었다. 그걸 느꼈다. 우선 하나 분명히 알겠는건 보람이었다.
사람들을 치료할 때 많이 느꼈다. 직접적으로 돈을 벌 수는 없으니 직업은 아니지만, 사업과 연결돼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일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었다. 몸이 호전되면서 나오는 그 기쁨과 감탄이 뒤섞인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새로이 가지게 된 꿈 하나는 이뤄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같이 품게 된 다른 꿈들도 반드시 이뤄내고 싶었다. 예전에는 몰랐다. 꿈이라는게 여러 개일 수도 있고, 하나를 이룬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 시작할 때 이미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여기에 인생을 걸어보겠다고. 노 빠꾸! 풀 악셀!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봐야지.
우선 자신만의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꼭 특허 하나라도 있든지, 적어도 자신들이 원조라고 부르짖을 것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건강이었다. 성공하고 나서 하는 말이라 진심일지는 모르나, 이윤창출보다는 고객들의 건강을 우선시했다고.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한다. 돈을 따라오게 해야 한다고. 진짜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면, 당연히 더 찾아올게 아닌가, 그럼 자연스레 돈은 더 벌리는 거고.
한참 동안 푸념 섞인 이야기를 들어주고, 건강을 위한 음식이나 행동을 알려주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즐거웠다.
"저는 불법 의료행위를 한적이 없습니다. 무슨 침을 놓는다거나, 뼈를 맞추거나, 째거나 꿰매지도 않았고, 약을 준 적도 없습니다. 그냥 민간요법을 알려준 거밖에 없습니다. 그 대가로 돈을 받은 적도 없고요. 진짜 억울합니다!" 나도 모르게 울분이 섞인 목소리를 높였다.
"그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죄 없는 사람을 왜 잡아 갑니까?" 가게에 자주 오는 노인들이 화가 난 얼굴로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제가 처음부터 여기 있었는데,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체포가 아니라 동행이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그 말인즉슨 임의동행 요청이라는 건데, 여기 사장님께 거부할 권리가 있거든요? 그리고 지금처럼 억지로 잡아끄는 건 불법일 텐데요?" 양옆의 두 사람은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그 순간 쌍꺼풀이 짙은 형사가 작게 중얼거리는 걸 분명히 들었다. "하아...... 미치겠네." 그의 탄식이 내게는 승리의 속삭임과도 같았다.
그때 똘똘한 고등학생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공무집행방해죄는 공무원의 직무집행이 적법한 경우에 한하여 성립되는 겁니다. 지금처럼 적법성이 결여된 직무행위를 하는 경우는 해당되지 않아요. 오히려 사장님이 거부하면서 경미한 상해를 입힌다고해도 아무 죄가 없습니다." "너, 너는 대체 뭐야?" "미래의 변호사요." "나 참......." 형사들은 이내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나는 당당했다. 그러니 증인도 많을수록 좋다고 여겼다.
뭔가 퍼즐이 맞춰져 갔다. 내가 일을 거절했던 한의원 간호사가 굳이 이곳에 와서 상담을 받고 돈을 건네려고 했다? 그 직후에 바로 신고가 들어갔고? 냄새가 났다. 처음에 제법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제안이라 생각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꼴을 보니까 보지 않으면 모르는 구린내를 품고 있던 듯했다. 나는 두 형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형사님들,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조사하셔야 될 것같은데요?"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에게도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일이 풀린 것은 전부 손님들 덕분이니까.
내게 이런 능력이 주어진 것도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할 줄 알고, 더 착하게 살라고 주어진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조금은 더 넓은 마음을 가졌다. 불을 꺼주지는 못해도 더 기름을 부을 것까지는 없겠지.
옛말에 틀린 말 하나도 없다고, 위기가 곧 기회가 됐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 계속 나아가면 뭐가 돼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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