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일일이 밑줄 치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시대적 배경인 일제시대 때 만주나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간의 무력충돌이 문득 생각 났다. 솔직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앎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과 맞서 싸우는 태세만 놓고 본다면, 일제시대 때의 독립군과 일본군 간의 대립구도와 얼추 비슷하게 보여진다. 우리나라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이기도 하고 해서 평소에 그닥 관심이 없었는데, 독립군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관련된 내용에 대한 호기심이 문득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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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한 내용 이외에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 간에 오가는 대화 속에서 은은히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에 대한 작가의 묘사와 표현들이 많은 부분에서 공감되었다. 표현이 참 섬세하다는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알려주고, 또 연화가 좋아하는 건 무엇일지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는 말 아닌가. 이게 바로 사랑받는다는 거구나. 연화는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에게 그토록 큰 관심을 보여준 이는 없었기에 연화는 마 사장이 자기 애인이 되어달라고 청하기도 전에 이미 그를 향한 사랑에 빠져버렸다.

혁명가입네 떠들어대는 이 작자들 모두 계급 폐지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다녔지만, 정작 여기 있는 정호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존중심을 보이는 자는 딘 한 사람, 바로 명보였다.

"동지의 필체에서는 아주 강인한 힘이 느껴져요. 꼭 동지의 성격이 드러나 있는 것 같군요." 글자가 지나치게 큼직하고 균형도 맞지않는 데다 꼭 어린아이가 쓴듯 울퉁불퉁한 모양새였지만, 정호는 명보의 말이 자기를 놀리려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칭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정호는 앞으로 명보가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삶을 살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 전까지는 그저 옥희에게 걸맞은 남자가 되기 위한 자기계발을 원했을 뿐이었다. 명보는 정호와 혈연으로도 애정으로도 연결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을 하나의 운명체로 묶어준 것은 다름 아닌 명예였다. 이것을 깨닫자, 정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끝까지 안전하게 지킬 사람들의 목록에 명보를 추가했다.

명보와의 유대가 깊어질수록, 옥희를 향한 정호의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도 조금씩 옅어져 가는 듯했다.

언젠가 옥희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자 현재 해야 하는 모든 일에 온 정신과 육체를 쏟다 보니, 정작 옥희와 함께 보내는 데 쓸 시간이나 활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한동안 정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옥희의 집에 들렀지만, 곧 보름에 한 번, 이어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제일 맘에 들지 않는 건, 전과 달리 정호가 이처럼 거리를 두어도 옥희가 더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인다는 점이었다. 옥희는 언제나 연극 연습과 공연, 미용실 예약, 사진 촬영, 인터뷰, 쇼핑, 영화, 그 외의 다른 수백 가지 할 일들과 오락거리에 몰두해 있었다.

굶주림을 버티느라 구부정한 자세로 있는 것은 인력거를 타려는 손님들을 잡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철은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이 취하는 사무적인 태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떤 발전이라도 이루어내려면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었다. 밤낮없이 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첫째 성공이었고, 한참 다음에 중요시하는 것은 의무였다.

사랑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철은 그게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사랑은 머나먼 곳에 자리한 신비로운 산처럼 느껴졌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경건함과 확신에 찬 태도로 저기 어디쯤 그런 산이 있다고들 하기에 간접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산. 그 자신이 직접 그 산을 보고 싶다는 충동은 전혀 들지 않았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념만큼이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의 현실과 거의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 처음의 끌림은 단지 육체적인 욕망과 호기심이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고 한철은 확신했다.

한철에게 있어 모든 사람은 각자 속한 범주대로 구분되었다. 가족, 학교의 동기들, 친한 친구들, 동료 인력거꾼들, 알고 지내면 이익이 될 것 같은 사람들, 그런 식이었다. 한철은 어떤 편파성도 없이 상대가 속한 범주에 따라 적절한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옥희는 그 모든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모든 범주에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보였고 또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옥희를 그저 옥희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 마침 딱 10전밖에 없는 걸 깜빡했네. 이거 미안하게 됐어, 젊은 친구!" 한철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신사는 10 전짜리 지폐를 얼른 건네고는 냅다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철은 역겨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안의 지폐를 꽉 구겨 쥐었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인간들이란!

"제 사는 얘기 중에 아씨께 흥미로울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소쩍새는 커다랗고 둥근 눈에 갈색 깃털을 가진 올빼미예요."

나중에서야 그는 소쩍새가 철새이고, 가을엔 남해를 건너 이동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옥희는 가슴에서 시작되어 몸 전체로 뻗어나가는, 마치 무엇인가에 취한 듯한 신비로운 떨림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사랑은 한 번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단계적으로 번져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첫눈에 한철을 사랑하게 된 옥희는 한 여자가 자신의 연인이 어떤 영혼을 가졌는지 깨닫는 바로 그 계시적인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는 그 남자가 아주 특별하고 부드러운 영혼을 지녔다고 느꼈다. 그리고 남들에겐 들키지 않게 잘 감춰진 여린 모습을 오직 옥희에게만 드러낼수 있으며, 옥희 자신이 한철의 내면에서 그걸 끌어낸 장본인이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옥희는 이 젊은 남자의 처지를 애처롭게 여겼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훌륭한 능력을 갖췄음에도, 한철은 자신의 가족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옥희는 이 남자가 지고 있는때 이른 책임감을 조금 덜어줌으로써 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지고 밝아지는 걸 보고 싶었다.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책이나 셈이나 돈벌이에 관심을 쏟게 되는 사람들이 있듯이, 옥희는 늘 안타깝고 가엾은 이들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기울이곤 했다. 그 마음은 이미 눈앞에있는 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욕구로 달음질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그저 나란히 걸었는데, 그 또한 함께하는 서로의 존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걷는다는 게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진정한 욕망이 없어도 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대화를 많이 나누든 아예 하지 않든, 서로가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밖에 없다.

연화는 마 사장이 보통 사람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몇 달에 걸쳐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확연히 드러냈다.

늘 그래왔듯이, 단이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열정적인 도취와 그런 감상에 빠져들기를 자제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전자는 그의 본성이었고 후자는 그의 원칙이었다. 이는 결코 슬픔과 공허한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법이 없었으니, 가장 예리한 관찰자만이 그의 확고한 침착성에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음을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극장 밖에서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요. 왜냐고요? 그냥, 당신은 당신으로 거기 서 있었고, 나도 거기 함께 서 있었으니까……. 그렇게 단순하고 그렇게 복잡한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그날 이후, 한철을 사랑하고 한철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옥희에게 더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옥희는 연화와의 사이가 멀어진 것이나 공연 무대의 성공 여부에 대한 생각에 거의 시간을 쏟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중요한 것, 매우 순수하고 희귀한 것을 이미 가졌음을 알았다.

변화의 대부분은 내부에서 일어났지만, 종종 지진이 일어나면 지층의 안과 밖이 모두 뒤집히듯이 옥희의 겉모습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제 옥희는 너무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꼈기에 그의 영혼자체가 변화했고, 그의 이목구비 또한 그 변화를 반영하여 새롭게 모양을 잡아가는 것 같았다.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은 사랑을 온전히 주는 것, 혹은 받기만 하는 것으로 양극화하기 마련이다.

사랑을 철저하게 이타적인 보살핌으로 이해하는 여자들과 사랑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든 혜택을 얻지 못하면 이를 견디지 못하는 여자들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존재한다. 옥희에게는 한철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얻어낸다는 생각 자체가 그들의 사랑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동안 옥희가 후원자들과 구애자들에게 받아온 그 어떤 선물이나 쌈짓돈도, 어떻게 하면 한철을 도울 수있을지 생각에 잠겨 있을 때만큼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살다보면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더 나은 상황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어. 그렇게 도움을 받아서 성공하고 나면, 호의에 보답하고 다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같은 자리에서 쳇바퀴만 돌리며 계속 시간을 허비할 순 없잖아! 지금의 진흙탕에서 빠져나갈 수단이 필요한데, 내가 바로 그 수단이 되고 싶다고."

옥희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순수한 눈으로 한철을 바라보았다. 그의 제안은 온전히 이타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 대가로 그가 한철에게서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철은 옥희의 손에 입을 맞춘 뒤 말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가 그토록 감격한 것은 바로 두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 먼저, 나락과 성공의 보루 사이에 걸쳐 있던 자신의 삶이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을 맞아 후자로 돌아섰다는 점. 그리고 둘째로, 결국에는 자신이 이 모든 것을 혼자만의 힘으로 해냈다는 점이었다.

시간은 모든 감정의 진폭을 납작하게 눌러버리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진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지울 수는 없었다.

"옥희야, 너, 아이가 없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를거다." 방에 자리를 잡고 앉자, 연화가 예전처럼 친근하고 솔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내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말고. 그렇지만…...그 이전의 삶이 그립기도 해. 무대, 공연……."

두 동생들과 달리, 월향은 혼자만의 생활에 꽤 만족하는 듯 보였다. 고독은 그를 감싸는 아름다운 외투 같았다.

하지만 이토에게 그 볼품없는 친구는 가짜 골동품을 훑어볼 때만큼의 관심도 기울일 만한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여기 있는 여자들 중 당신과 기꺼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옥희는 친구를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지만, 그들 사이의 장벽이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그 벽이 이제는 전보다 더 단단해져 결코 뚫을 수 없이 굳어진 것만 같았다.

이토가 경멸적인 미소를 지었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사랑 같은 게 있을 것 같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유일하게 중요한 건 서로가 필요로 하는 걸 적절히 교환하느냐야………. 물론, 약간의 미움이 오히려 열정을 더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지, 내 생각에는 말이야."

"당신한테 내가 필요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옥희는 이렇게 말하며 있는 힘껏 그를 밀쳐냈다.

옥희는 정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자신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무슨 짓이든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옥희 네가 보고 싶었어." 정호가 말했다. "난 언제나 네가 보고 싶어."

"그래, 하지만 가끔은 너도 날 찾아주길 바랐어." 정호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너한테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

우리가 어린아이였을때부터 나는 항상 너를 동경했어. 왠지 알아? 넌 아무것도 겁내지 않으니까. 가진게 아무것도 없을 때조차 그 당당하고 두려움 없는 모습이 나는 그저 놀랍고 존경스러웠어.

옥희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정말 미안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그 말을 듣자 정호는 내면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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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에 두번째 밑줄친 부분에서 ‘나‘(소설 속 화자)와 크누텐의 생각이 서로 교차하는 장면이 있는데 얼핏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지적 작가시점인 작가가 ‘나‘와 크누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일상에서는 말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인데, 각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아주 교묘하게 잘 표현해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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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에 첫번째 밑줄친 부분에서는 크누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묘사하다가 갑자기 마지막 부분에서 주어가 갑작스럽게 ‘나‘로 전환되는데, 개인적으로 욘 포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런 갑작스런 주어의 전환이 빈번하게 나오는 것을 봤던지라, 이런 미세한 부분들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을 잘 따라가는 것이 욘 포세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욘 포세의 다른 작품을 처음봤을 때는 이러한 것들을 그냥 무심코 아무 느낌없이 넘겼었는데, 이제 한 4권 째 읽다보니 기존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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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에 밑줄 친 부분은 읽다가 갑자기 번뜩 전율이 느껴졌다. 뒷 부분을 좀 더 읽어봐야 겠지만, 이 세상 사람인줄 알았던 크누텐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간의 대화 속에서 크누텐이 마치 현생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뉘앙스를 느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러한 상상에 이르게 된 것은 욘 포세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본 결과 욘 포세만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느낌을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이거는 이성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직관같은 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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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3 첫 번째 밑줄 친 부분에서 뜬금없이 노란 우비를 입은 크누텐의 아내가 어머니(?) 라고 하면서 내용이 전개된다. 갑자기 이게 뭔가 싶다.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 P8

난 무엇이든 해야 한다. 이 불안감이 그치질 않는다. 아마 내가 글을 쓴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 P8

나는 서른 살을 넘겼고, 내 삶에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이곳에서 어머니와 같이 산다.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여름이었다. - P9

나는 무엇이든 해야 했고, 그 불안은 너무나 거대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아주 갑작스레 떠올랐다. 그것은 그 불안감이 엄습해 온 이후였다.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고, 그 불안을 떨쳐 내야만 했다. 사실 이전까지는 이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전까지는 내가 글을 쓰게 될 가능성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 불안감은 특히 해질 무렵이면 계속해서 엄습해 온다. 하루 중 가장 좋은 때였지만, 이제 해질 무렵은 아주 불안하다. 아주 끔찍하게 불안하다. - P10

어쩔 수 없이 무언가 할 일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글쓰기가 불안을 떨쳐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 떨쳐낼 수 없는 불안은 내가 글을 쓰면 줄어들지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 어쨌든, 글쓰기가 한두 시간이라도 불안감을 떨치게 해주지 않을까 모르겠다. 이 불안감을 견딜 수 없는 까닭에 나는 이 소설을 쓰고 있다. - P10

나는 내 삶에 이룬 것이 별로 없다. 어쩌면 그것이 어머니를 걱정스럽게 만드는지도,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를 걱정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다. 일례로 그녀는 나에게 이제 너도 직장을 알아봐야지, 기타를 퉁기며 다락방에 앉아있을 순 없잖니, 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에 그녀가 엷은 미소를 지으니, 난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 P11

나는 크누텐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게 내가 두려워해 왔던 거지,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옛 친구를 마주치는 건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난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난 예전과 다름없는 것처럼 보여,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무슨 말을 꺼낼까를 생각하는데, 우리가 많은 걸 함께했던 건 아주 오래전 일이야. 무슨 말을 꺼낼까 우린 더 이상 공통점이 없을 텐데, 그렇지만 뭐든 말을 꺼내야 해, 이야기를 나누는 거 그게 바로 내가 두려워해 왔던 일이야,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 P11

무슨 말을 꺼낼까, 뭐든 말을 꺼내야 하는데, 이 순간을 두려워해 왔지,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 P14

나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은 일이 어렵진 않을거라고 느낀다. 잘 풀릴 거야, 아이들이 잘 풀리게 만들어 줄테지, - P15

그녀는 크누텐이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며, 내 이름이 보드가 아니냐고 말한다. - P15

그 보트하우스가 저쪽에 있어, 내가 말한다.
그래, 저기서 우린 많은 시간을 보냈지, 크루텐이 말한다. - P16

그나저나 레이테에 살던 스베이넨이 죽었다며, 크누텐이 말한다.
몇 년 되었지, 내가 말한다.
스베이넨도 참 별난 사람이었어, 크루텐이 말한다. - P16

그리고 크누텐은 물론, 늘 그런 식이지, 아내는 그 친구를 그런 식으로 바라봐야 했겠지. 그 친구를 다시 보는 눈빛이 이상했단 말이야, 하고 생각한다, - P18

그 친구를 다시 만나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걸 두려워해 왔지,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하지만 우린 긴 여름휴가에 어딘가 가야 했으니, 쓸 돈은 얼마 없는데,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있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니까, 부득이하게 옛 친구들을 다시 마주쳐야만 했지, 그걸 두려워해 왔어, 아내는, 왜 그 친구를 그렇게, 그런 식으로 쳐다보아야 했을까,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몸을 돌려 크누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 P19

그리고 나는 그가 날 만나서 반가워하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고, 반가웠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 P19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것은 우리 둘 다 원한 바였다. - P20

끌낚시 : 배로 낚싯줄을 수평으로 끌면서 수면 가까이의 고기를 낚는 일 - P21

나는 끌낚시를 하며 크누텐과 내가 어릴적에 함께 놀곤 했던, 페인트칠이 되지 않은 낡은 보트하우스를 지나친다. 그러자 크누텐이 살던 언덕 위의 하얀 집이 눈에 들어온다. - P21

그 작은 섬 외곽에서 낚시한다면 내륙에선 누구도 목격할 수 없어서, 그것이 내가 그 작은 섬에서 낚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인 듯싶다, 난 사람들이 날 보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코 그랬던 적이 없다, - P22

지깅`을 하는데 입질이 없다. 아마 오늘 저녁엔 물고기를 낚지 못하지 싶다. 그렇지만 멋진 저녁이다. 나는 불안한 기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무언가가 날 덮쳐 오는데, 이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불안한 기미가 느껴진다. 멋진 저녁이다. 부드럽고, 따스하다. 불안감이 느껴진다. 불안이 날 엄습해 오고 있다.

`지깅(jigging) : 낚싯줄이나 미끼를 문 바늘을 낚아채고 가라앉히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 - P23

저기 멀리 두 대의 배가 있고, 둘은 서로 몇 미터 떨어져 있다. 그 보트들은 가만히 떠 있다. 나는 지깅을 한다. 배들 중 하나가 내 쪽으로 향한다.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한다.
배들 중 하나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지깅을 하고, 다른 쪽을 쳐다본다. 불안감이 강력해지고 있다. 나는 돌아보고 싶지 않다. 선외 모터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들린다. 나는 돌아보아야 한다. - P23

내가 몸을 돌리자, 그녀가 내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크누텐의 아내가 내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크누텐의 아내가 플라스틱 배의 선미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 P23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한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뭔가 평범한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 P24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순 없다, - P26

이건 역겨워 보여요, 그녀가 말한다 저는 익숙합니다, 내가 말한다 - P31

당신은 말이 별로 없군요. 그녀가 말한다.
그래요.
여기 출신 사람들은 다 그런가보네요. 그녀가 말한다.
뭐, 일종의 규칙인 모양이죠.
난 여름 내내 여기 머물 것 같아요, 그녀가 말한다.
당신은 여기 이제 막 온 겁니까?

그녀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당신들‘이 아닌
‘당신‘이라고 말하고 그녀는 ‘우리‘가 아닌 ‘난‘이라고 말한 것을 알아차린다, 나는 그녀에게 크누텐이 저기 해안가에 서 있은 지 오래되었다고, 어쩌면 그가 우리에게 합류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고, 잘은 모르겠지만, 말해야 할 것만 같다. - P36

대구는 떼를 지어 다니지 않으니까, 내가 말한다.
자녀와 대구 둘 다 그렇지, 크루텐이 말한다.
당신 짓궂어, 크누텐의 아내가 말하고는 웃음을 터뜨린다. - P40

그녀의 눈이, 그녀의 눈이 이제는 어디에나 있다, 하늘 위에, 피오르 너머에, 이 불안감, 예전에 나는 이와 같은 것을 결코 느껴본 적이 없다. 그녀의 눈. - P41

크누텐과 나는 늘 함께였다. 매일 그랬다. 크누텐은 떠났고, 내가 그를 쫓아가며 불렀지만 그는 떠나 버렸다. 나는 크누텐의 아내와 마주쳤다. 그것은 내가 크누텐과 다시 마주한 바로 그날이었다. - P42

청재킷에 노란 우비를 입은, 크누텐의 아내. 어머니가 아래층을 서성거리고 있다.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장을 본다. 어머니. 그녀는 장을 본다. 전에 장을 보던 것은 나였는데, 이제 나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 P43

대체 무슨 일이니, 라고 어머니는 말한다. 그렇게 틀어박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잖니, 라고 그녀가 말한다. - P43

기타. 내 기타가 보인다. 내가 장만한 첫번째 기타가 떠오른다. - P43

그렇지만 우선은 우리가 ‘우리 보트하우스‘라고 이르던 곳에서 연습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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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100자평] 스키마와라시

이 책은 읽을 당시에 일본 특유의 향(?)이 느껴지는 묘한 느낌의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든다는 얘기를 보니 얼마전 읽었던 욘 포세의 작품 <아침 그리고 저녁> 과 <3부작> 이 생각났다. 스키마와라시와 욘 포세의 작품들은 전반적인 분위기에 있어서 약간은 결(?)이 다른 느낌이지만, 현재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과 저 세상으로 이미 가 있는 영혼이 만나서 대화를 하는 듯한 모습만큼은 이 책과 욘 포세 작품의 유사한 점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이러한 방식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이든 유럽이든 국적을 불문하고 작가들이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설정을 할 때 종종 사용하는 방식 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는 듯 하다. 이로 인해 이야기의 시공간적 확장성을 훨씬 더 키워서 작품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설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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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건강 상식이다. 혈압이 높으면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뇌졸중, 심근경색 등이 일어날 확률이 치솟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혈압인 사람은 식습관을 건강하게 바꾸고 운동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혈압을 관리한다. 이때 눈 속의 압력, 즉 안압도 함께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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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100자평]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리커버 에디션)

1년 전 오늘 간단한 기록으로 남겨놓았던 책에 대한 평이었다. 북플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라 밑줄도 안 긋고 그냥 읽었더니 지금은 딱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한 번 찾아 읽어보든가 아니면 다른 분들의 리뷰 같은 것들을 찾아보며 책 내용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보고 취할 것들이 있다면 다시금 머리와 마음에 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책을 읽고 핵심 메시지나 중요 내용들을 기억하고 회상하기 위한 도구으로서 다시금 밑줄 긋기의 중요성을 몸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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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30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렇게 지나간 책이 부지기수라 오래 전에 다시 보고 정리하는 거 포기했어요~~ㅎㅎ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0-30 17:46   좋아요 1 | URL
어떤 책이든 밑줄 안 긋고 그냥 쫙쫙 읽어나갈 때는 진도가 빨리 나가서 좋았는데, 다 읽고나서 시간이 좀 지나면 기록해놓은 것 이외에는 책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내가 뭘 했나 싶은 자괴감이 들 때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끄적여 놓는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간단하게나마 적어봤습니다. 저는 독서 걸음마 수준이라 yamoo 님을 비롯하여 여기 북플에 계신 다독가 님들의 내공에는 한참 미치지는 못합니다만 북플하면서 이것저것 많이 보고 배우는 듯 합니다. 근데 정말로 얇은 책이 아니고서는 재독하려면 시간도 따로 내야하고 그래서인지 은근 스트레스 받는 거 같아서 그냥 재독은 내려놓고 다른 분들이 쓰신 서평들 참조하는 정도가 현실적인 대안이긴 할 듯 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