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내용들이 나오는데 특별히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데 정신없는 나머지 역사를 비롯한 옛 것에 그다지 관심없는 한 인물(은하수)과 역사와 옛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뿌리를 탐구하고 연구하는 한 인물(형연)간에 주고 받는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물론 이 소설의 제목이 풍수전쟁이다보니 역사에 조예가 깊은 인물의 말에 의해 이야기가 흘러가기는 하나 어느 한 쪽만의 삶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양 쪽의 삶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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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들의 대화 중에 인문학과 관련하여 형연이 은하수에게 하는 얘기들이 있는데 인문학의 본질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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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간에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고 이후에 이들에게 암호처럼 던져진 ‘회신령집만축고선‘ 이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이 쭉 펼쳐지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류의 소설은 처음이라 좀 낯설긴 하지만 암호같은 메시지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색다른 긴장감과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총독부가 이 주문을 실행했고 아직 아무도 다이이치의 여덟 글자를 풀지 못했으니 주문이 아직 살아있다 볼 수밖에 없어. 우리가 모르는새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을 거야"

"내 눈에는 풍수니 주문이니 하는 게 허황되기 짝이 없지만 너는 죽도록 이 숙제 아닌 숙제에 도전하겠지. 돈 한 푼안 나오는 케케묵은 갑골문까지 연구하는 참이니."

"갑골문 연구는 아주 중요한 거야."

"하이가 아니라면·혹시 헬로우라고 했나?"
"그건 아냐."
"하하, 좀 받아 주지 민망하네. 그럼?"
"바다."
"바다를 뭐라 했냐니까?"
"해를 바다라 발음했어. 은나라 때는."

늘 허황된 것만 같은 형연의 말은 항상 따라가다 보면 튼튼한 근거와 논리가 이어져 있었다.

"글쎄. 나는 언젠가 어느 순간부터 우리 한국인은 작아져야 마음이 편하게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과거의 빼앗긴 역사를 알고 나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 상태가 중국이나 일본 같은 강대국들이니 피하고 싶은 잠재의식도 있겠지."

은하수는 형연이 긴 이야기로 우회하여 자신을 꾸짖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너는 우리의 역사에 관심이 없냐고.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들처럼 이기적인 삶만을 추구하냐고. 

"나는 이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그런 거 생각하는 자체가 싫어. 너는 왜 그런 데 관심을 가지는 거야? 그냥 경제나 잘 꾸리고 일상에 충실하면 행복하지 않을까?"

"마주하는 않는 역사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형성하고 있어. 그러나 올바른 역사를 밝히는 건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거야."

"역사를 모르면 나 자신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 멀리 이민 가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존재란 시간이 쌓여 형성되는 거야, 종적 개념이지. 여기저기 횡적으로 좋은 것만 짜깁기해서는 정체성이 없어."

"스스로를 깊숙이 돌아보면 반드시 역사를 마주치게 돼. 그러나 마주칠때마다 보이는 건 중국과 일본에 의해 형편없이 구부러지고 축소된 모습이지. 싫을 수밖에 없어. 외면하고 싶은 게 당연해."

"나는 작아져야 마음이 편한가 봐. 역사가 싫어서 외면하고 물질적인 가치만 따져서 짜깁기한 작은 사람. 너한테 한참 혼나니까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네."

"너를 비난하려고 했던 건 아냐. 너의 길에도 충분히 큰 의미가 있어. 단지 나는 누구에게든 역사의 중요성을 말할 수밖에 없어."

"네가 꼭 내게 동의하거나 공감할 이유는 없어. 나는 나의 길이 있고 너는 너의 길이 있으니까."

"알았다니까! 왜 자꾸 쓸데없는 말을 하는데?"
한껏 짜증을 낸 뒤 전화를 끊어버린 은하수는 형연과 조금 가까워지나 싶다가도 또 옛날처럼 어긋나기만 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도 형연은 항상 은하수의 깊은 곳을 아프게 찔러왔다.

"자기는 법학이 철학의 좀 더 엄중한 단계라 생각했대. 철학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법학은 옳지 못하다는 판단이 서면 처벌까지 다루니 철학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법학을 택했대."

"그런데 도대체 그런 이상한 친구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뭐 있어? 그 친구가 하는 건 애국이 아니야, 사회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패배자의 몸짓일뿐이야. 사람들에게 제발 좀 봐달라는 거지. 그런 것에 넘어가면 안 돼. 그 친구는 잘 알아. 본인 스스로 본인을 기만하고 있다는 걸."

생각을 이어 간 끝에 은하수는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이 형연이든 누구든 남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으며 그 실체는 헛돌고 있다는 무력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문제의 핵심은 형연과 마주친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어떤 일을 하건, 그것이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건 없건 자신이 이토록 처지는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본질?‘
형연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차이였다. 허황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나라에 걸린 주문을 풀겠다고 외치는 형연과 달리 자신은 떠맡은 일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보내진 주문을 푼 일, 그것이 인구감소의 비극을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을 알아낸 일, 그 주범을 잡는 경찰들을 독려하는 일 등, 그 모두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싶었다. 껍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청량리에서 KTX로 불과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 제천까지 가는 길은 기찻길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과 치악산의 절경이 끊임없이 이어진 기분 좋은 여행이었다.

"사회는 구조적으로 경쟁을 붙이게 되어 있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경쟁하고 또 경쟁하지. 끝날 수 없는 굴레야."

"오해하지 마. 나도 경쟁 사회가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건 아니야. 세상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가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이 시대에 어떻게 경쟁이 없을 수 있겠냐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능력있는 사람이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잖아."

"다른 힘이 있어. 인문학이지. 세상의 모든 학문은 사회가 잘 돌아가게 하고 일이 잘 풀리도록 하는 게 그 본연의 역할이지만 인문학은 그 반대야. 잘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줄곧 시비를 걸어대는 거지. 왜 그렇게 잘 돌아가는 거요? 그렇게 잘 돌아가는 데는 필시 문제가 있을 거요, 하는 거야."

"인문학이 추구하는 힘은 실용적, 실질적 학문과는 갈래가 아예 달라. 과거에 네가 했던 공부는 직업을 구하고 평생의 벌이가 되는 공부지만 인문학 공부는 사회의 쓸모와 그다지 연결이 잘 되지는 않아."

"대신 인문학 공부는 돈이나 지위같은 같은 다른 힘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힘을 가져다 줘. 바로 내면의 힘이지.
눈에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가지면 가질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감이 차오르며 삶이 떳떳하고 행복해져."

"나는 돈을 많이 안벌겠다, 조금 벌고 그 대신 검소하게 살겠다, 그리고 남는 시간과 열정을 더 의미 있는 일에 쏟겠다고 생각하는 거지."

"불안하지. 하지만 인문학이 깊어지면 불안이 인간의 존재 조건임을 알게 돼. 인간이란 어차피 불안에 시달리며 살게 되어있다는 말이야. 그래서 당황하거나 극단적으로 반응하지 않아. 오히려 실패와 푸대접을 즐기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소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자아의 품위를 간직하며 어려움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상대를 위해 베풀기도 해. 일을 할 때도 과정의 진실에 천착하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에 덜 좌우돼."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겠어. 또 네가 무슨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려고 하는지도 알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의 말에 공감할 수 없어. 그게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을것 같아."
"그럼 너는 왜 지금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거야?"
"......"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모두가 싫어하겠지. 어째서 안정을 깨느냐고, 조용히 살아갈 수는 없겠냐고.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해. 누군가는 계속 돌을 던져야만 해."

회신령집만축고선淮新嶺摯萬縮高鮮.
"자, 먼저 주문의 뜻을 확실하게 하자. 회신령집만축고선. 회신령에 사람 만 명, 혹은 나무든 돌이든 뭔가를 만 개를 잡아 가두면 고려와 조선이 찌부러진다는 거지?"
"그래."

글자를 파고들수록 은하수는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살아왔던 정답과 오답의 세상에서는 이런 모호한 문제 풀이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여덟 글자를 계속해서 외웠다. 회신령집만축고선 회신령집만축고선.

"어? 잠시만. 뒤에 네 글자를 붙일수도 있지 않을까?"

"맞아. 회신령집만, 축고선이 아니라 회신령집, 만축고선 이렇게 말이야."

은하수의 말대로 네 글자를 붙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한문학에 정통한 입장에서 접근하다보니 동사인 모을집과 줄일 축이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함정이었다. 저주나 주문의 음율이라 생각하면 그 편이 더 자연스러운데도. 한자에 익숙하지 못한 은하수이기에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었을까.

"네 말대로 한다면 만을 숫자가 아니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 아주 오랜 시간. 혹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시간으로. 만세, 만년 이런 단어들처럼."

"그래. 그렇게 보면 만축고선이 앞의 네 글자 회신령집과 대구가 되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집의 목적어를 만으로 보지 않고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회신령집, 회신령에 잡아가두어."
그녀의 해석에 형연이 덧붙였다.
"만축고선, 영원히 고려와 조선을 축소시킨다."

칭찬할 수밖에 없는 가장 빛나는 인재. 그런 그녀가 더욱 대단한 점은 가장 뛰어난 두뇌로 가장 열심히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너는 수석인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해?"
"열심히 하니까 수석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은하수. 네가 준 노트는 꼼꼼히 읽었어. 하지만 나는 지는 변론을 하고 싶어.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을 겪고 싶어. 이겨서 승리를 만끽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야. 그렇지만 나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필사적으로 대처해도 무지하거나 혹은 법리에 닿지 못해서 질 수 밖에 없는 약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생각해 보고 싶어."

"의미는 확실해졌어. 회신령에 잡아 가두어 고려와 조선을 축소시킨다. 네 해석 덕분에 만을 목적어로 둔것이 아니라 목적어가 생략되었다는걸 알았으니까. 이제 남은 일은 회신령이 어디인가 찾아내는 것뿐이야."

"그런데 생략된 목적어가 뭘까? 무엇을 회신령에 잡아 가둔다는 거지?"
"어떤 해석을 하든 회신령을 찾아야만 해, 목적어가 생략되었기에 회신령의 위치를 찾는게 더 절실해졌어."

"아까도 얘기했지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 나는 끝을 봐야겠어."

"먼저 서울에 올라가면 무라야마가 쓴 《조선의 풍수》 원본을 구해 거기 나오는 모든 고개 이름을 한 번 찾아봐. 한국어 판본으로는 안 돼. 최근의 개발 등으로 지명이 많이 바뀌었을테니."

"그리고 과거 조선총독부에서 이케다라는 사람을 좀 찾아볼래? 후손까지 그 편액을 죽어라 지키고 있으니 뭔가 자취를 남겼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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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12-05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라탄이즐라탄탄님 2023년 서재의 달인. 북플 마니아 선정되심 축하드립니다 🎉
한 해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의 시간도 행복한 글읽기와 글쓰기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05 21:33   좋아요 1 | URL
나와같다면님 친히 댓글까지 달아주시고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글 보니 북플 마니아 6년만에 선정되시고 서재의 달인까지 겸해서 달성하셔서 겹경사인듯 합니다. 앞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독서생활 계속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저까지 이렇게 축하해주시니까 더더욱 기분이 좋아지는 듯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