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필사 100일 - 손으로 쓰며 만나는 명문장
윤서진 엮음 / 달먹는토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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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이 책은 그 습관을 다시 처음부터 돌아보게 만들었어요.

책 뒤표지에 적힌 한 줄이 먼저 마음을 잡아끌었습니다.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하루에 한 문장을 써도 좋고, 며칠에 한 페이지를 넘겨도 괜찮다고. 중간에 멈추어도, 다시 돌아와도 괜찮다고. 이상하게 그 말이 위로가 됐어요. 뭔가를 꾸준히 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그냥 문장 앞에 오래 앉아있어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졌거든요.

제인 오스틴, 헤르만 헤세, 톨스토이, 다자이 오사무, 알베르 카뮈. 이름은 익숙한데 정작 그 문장 앞에 오래 머물러본 적이 없었던 작가들의 글을 손으로 천천히 옮기다 보면, 빠르게 읽을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문장은 한 글자씩 쓰다 보면 갑자기 내 감정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데, 그 순간이 필사의 가장 큰 선물인 것 같아요.

얼마나 썼느냐보다 그 문장 앞에 얼마나 진득하게 머물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마음에 남았습니다. 빠른 것이 미덕인 시대에 한 문장 앞에 천천히 앉아보고 싶은 분들께 권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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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프랑켄슈타인
코코 멜러스 지음, 심연희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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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으로 먼저 받아 읽었는데, 정식 출간 전에 이 책을 만난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클레오파트라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어요. 스물네 살 영국인 화가 클레오와 마흔 살 뉴욕 광고 대표 프랭크가 파티에서 만나 여섯 달 만에 결혼한다는 설정인데, 어떤 심리학자도 고개를 저을 만한 이 무모한 시작을 작가는 전혀 판단하지 않아요. 그냥 조용히, 집요하게 들여다봅니다.

거창한 사건이 없어요. 말 한마디, 스치듯 지나간 순간, 누군가의 작은 선택 하나가 관계를 조금씩 바꿔놓는 방식을 촘촘하게 따라가는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게 클레오와 프랭크 이야기인지 내가 아는 누군가의 이야기인지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살리 루니와 자주 비교되는 작가인데, 루니보다 조금 더 혼란스럽고 조금 더 솔직한 느낌이었어요.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보여주는 방식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랑의 시작과 균열과 소멸을 이렇게 조용하고 섬세하게 담아낸 소설이 오랜만이었어요. 정식 출간되면 분명히 많은 이야기가 오갈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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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이도 살아가는 네가 되기를 너 없이는 못 사는 내가 바란다 - 스레드를 웃고 울린 파선강 에세이
파선강 지음 / 달먹는토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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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서 이렇게 내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책을 만난 건 처음이었어요.

제목부터 멈칫했습니다. 나 없이도 살아가는 네가 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너 없이는 못 사는 내가 된다는 것.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이 두 문장 사이 어딘가에 자기 마음이 있다는 걸 바로 알 거예요. 독립적인 아이로 키우고 싶은데, 정작 아이 없는 내 삶은 상상조차 안 되는 그 모순이 너무 정확하게 담겨있어서 첫 장부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등굣길에 보도블록 틈 사이 꽃을 발견하고 한참을 쪼그려 앉아있던 아이가, 빨리 가자는 저자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틈이 있는 것도 괜찮지 않아요, 이렇게 꽃도 피어나고요. 그 장면에서 한 번 멈췄어요. 빈틈 없이 살아야 한다고 아이에게 가르쳤는데, 정작 빈틈에서 꽃이 핀다는 걸 아이가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게요.

아이를 기른다는 건 결국 내 세상을 넓혀가는 일이었다는 저자의 말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분들께, 그리고 언젠가 부모가 될 분들께 모두 권하고 싶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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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과 함께한 사람들
강현규 지음 / 메이트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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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이름들을 그냥 시험 문제 답으로만 외웠던 사람으로서, 이 책은 꽤 다른 경험이었어요.

엄홍도, 박팽년, 정순왕후. 단종 곁을 지킨 사람들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넘어갔던 이름들인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이름들이 완전히 달리 느껴졌습니다. 500년 전 이야기인데 읽는 내내 지금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계속 나왔어요.

박팽년이 목숨과 맞바꾼 글자 한 획 이야기가 특히 오래 남았어요. 적당히 타협하는 게 세상 사는 요령이 된 지금, 그 한 획이 정면으로 부끄럽게 만들더라고요. 이개의 이야기에서는 내가 가진 재능을 어디에 빌려주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따라왔는데, 내 실력이 부당한 일에 쓰이고 있다면 그건 성과가 아니라 부역이라는 말이 읽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정직하게 살라고 하면서 정작 나는 눈치 보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기도 했어요. 역사서인데 이렇게 지금 내 삶을 들여다보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걸 읽으면서 계속 느꼈어요.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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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가장 위대한 통찰 ㅣ 세기의 책들 20선, 천년의 지혜 시리즈 13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안진환 감수, 서진 기획 / 스노우폭스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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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불편했어요. 그런데 그 불편함이 싫지 않았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떤 종교도, 이념도, 스승의 가르침도 따르지 않은 사람이에요. 어떤 깃발도 들지 않았고 어떤 신의 구원도 전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이렇게 읽히는 이유가 책을 펼치자마자 느껴졌습니다. 그는 그냥 진실을 말하거든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정확한 말을.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무지를 예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읽으면서 깨달았어요. 내가 쌓아온 지식, 경험, 믿음들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관계에 대한 부분이 가장 뜨끔했어요. 나는 상대방을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이미지를 보고 있다는 말이, 읽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문장은 쉬운데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에요. 계속 나를 불편한 곳으로 데려가거든요. 그런데 그 불편함을 통과하고 나면 뭔가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오래 붙들고 있던 것을 잠시 내려놓은 것처럼요.

지금 뭔가에 막혀있는 느낌이 드는 분들께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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