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보 목사의 항소이유서
손현보.정승윤 지음 / 미래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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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끝까지 읽었어요.

법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법이 사람을 설명하기보다 통제하는 도구로 쓰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손현보 목사님과 정승윤 변호사님이 함께 기록한 이 책은 단순한 법정 이야기가 아니에요. 한 사람이 겪은 일을 그대로 남기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 기준이 무너졌는지를 차분하지만 단단하게 짚어냅니다.

만약 내가 구속된다면 그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 나라의 상태를 보여주는 일이라는 문장이 오래 머릿속에 남았어요. 신앙을 이유로 말이 범죄가 되고, 양심이 피고석에 서는 현실. 낯설지 않다는 게 더 무서웠습니다.

역사를 보면 권력이 법을 도구로 삼을 때 가장 먼저 표적이 된 건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그 침묵에 동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역사는 결국 바로잡혔습니다. 이 책은 그 계보 안에 놓인다고 생각해요.

침묵은 동조입니다. 불편하더라도 읽어야 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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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책
안나 마촐라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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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으로 먼저 받아 읽었는데, 정식 출간 전에 이 책을 만난 게 진짜 행운이었어요.

1659년 로마, 페스트가 지나간 도시에 이번엔 다른 공포가 퍼집니다. 죽어서도 부패하지 않는 기이한 시체들, 그리고 소리 없이 떠도는 소문 하나. 무색무취하고 치명적인 독, 아쿠아. 이 설정만으로도 이미 손을 놓기가 어려웠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게 읽는 내내 더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학대받는 아내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유통된 독약 사건, 6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으며 귀족층까지 연루됐던 그 실제 사건이 소설 속에서 되살아나는데, 단순한 범죄물이 아니라는 걸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법도 제도도 그 어떤 것도 그녀들을 보호하지 않았던 시대에, 그 독이 정말 악인가 아니면 그 선택으로 몰아간 세상이 악인가라는 질문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따라왔거든요.

고딕 스릴러의 긴장감, 역사소설의 밀도, 그리고 묵직한 주제의식까지 한 권 안에 다 담겨있어요. 2025년 영국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가을밤에 읽기 딱 좋은 책이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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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필사 100일 - 손으로 쓰며 만나는 명문장
윤서진 엮음 / 달먹는토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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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이 책은 그 습관을 다시 처음부터 돌아보게 만들었어요.

책 뒤표지에 적힌 한 줄이 먼저 마음을 잡아끌었습니다.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하루에 한 문장을 써도 좋고, 며칠에 한 페이지를 넘겨도 괜찮다고. 중간에 멈추어도, 다시 돌아와도 괜찮다고. 이상하게 그 말이 위로가 됐어요. 뭔가를 꾸준히 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그냥 문장 앞에 오래 앉아있어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졌거든요.

제인 오스틴, 헤르만 헤세, 톨스토이, 다자이 오사무, 알베르 카뮈. 이름은 익숙한데 정작 그 문장 앞에 오래 머물러본 적이 없었던 작가들의 글을 손으로 천천히 옮기다 보면, 빠르게 읽을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문장은 한 글자씩 쓰다 보면 갑자기 내 감정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데, 그 순간이 필사의 가장 큰 선물인 것 같아요.

얼마나 썼느냐보다 그 문장 앞에 얼마나 진득하게 머물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마음에 남았습니다. 빠른 것이 미덕인 시대에 한 문장 앞에 천천히 앉아보고 싶은 분들께 권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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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프랑켄슈타인
코코 멜러스 지음, 심연희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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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으로 먼저 받아 읽었는데, 정식 출간 전에 이 책을 만난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클레오파트라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어요. 스물네 살 영국인 화가 클레오와 마흔 살 뉴욕 광고 대표 프랭크가 파티에서 만나 여섯 달 만에 결혼한다는 설정인데, 어떤 심리학자도 고개를 저을 만한 이 무모한 시작을 작가는 전혀 판단하지 않아요. 그냥 조용히, 집요하게 들여다봅니다.

거창한 사건이 없어요. 말 한마디, 스치듯 지나간 순간, 누군가의 작은 선택 하나가 관계를 조금씩 바꿔놓는 방식을 촘촘하게 따라가는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게 클레오와 프랭크 이야기인지 내가 아는 누군가의 이야기인지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살리 루니와 자주 비교되는 작가인데, 루니보다 조금 더 혼란스럽고 조금 더 솔직한 느낌이었어요.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보여주는 방식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랑의 시작과 균열과 소멸을 이렇게 조용하고 섬세하게 담아낸 소설이 오랜만이었어요. 정식 출간되면 분명히 많은 이야기가 오갈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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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이도 살아가는 네가 되기를 너 없이는 못 사는 내가 바란다 - 스레드를 웃고 울린 파선강 에세이
파선강 지음 / 달먹는토끼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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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서 이렇게 내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책을 만난 건 처음이었어요.

제목부터 멈칫했습니다. 나 없이도 살아가는 네가 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너 없이는 못 사는 내가 된다는 것.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이 두 문장 사이 어딘가에 자기 마음이 있다는 걸 바로 알 거예요. 독립적인 아이로 키우고 싶은데, 정작 아이 없는 내 삶은 상상조차 안 되는 그 모순이 너무 정확하게 담겨있어서 첫 장부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등굣길에 보도블록 틈 사이 꽃을 발견하고 한참을 쪼그려 앉아있던 아이가, 빨리 가자는 저자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틈이 있는 것도 괜찮지 않아요, 이렇게 꽃도 피어나고요. 그 장면에서 한 번 멈췄어요. 빈틈 없이 살아야 한다고 아이에게 가르쳤는데, 정작 빈틈에서 꽃이 핀다는 걸 아이가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게요.

아이를 기른다는 건 결국 내 세상을 넓혀가는 일이었다는 저자의 말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분들께, 그리고 언젠가 부모가 될 분들께 모두 권하고 싶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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