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번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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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 오전 9시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어젠가? 그저껜가? 어쩌면 더 지났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몇일이지? 분명 몇일이 지났음에도 휴대폰에는 10일이라고 찍혀있다. 10일이라는 특별한 하루만이 계속해서 몇일째 반복되고 있다. 꿈인가? 아니다. 나는 몇번이나 내 볼을 꼬집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지만 감각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느껴져서 그 충격으로 눈 언저리에 멍까지 들어버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어제 아니, 그러니까. 10일이 되기 전에 그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저질렀다. 분명. 분명히. 나는 내 눈에 비쳐졌던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얼마나 고뇌하다가 저질렀던 일인데.. 근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젠지. 언젠지. 어쨌든 내 휴대폰에 10일이 찍혀있던 몇일전에 나는 그 일을 저지르고 나머지 남아있던 돈을 긁어모아 경마장에 갔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속았다. 아니 그녀도 속았다. 그에게.. 근데.. 오늘도 10일이고, 그 전에 일어났던 10일에서의 일이 없어진 오늘의 10일이다. 어떻게 된 걸까? 내가 미쳐버린 걸까? 머리가 어떻게 되어 도저히 이성을 가지고 생각할 수 없어서 지금 이러고 있는걸까? .. 내일은 몇일이지?
명정훈. 33세.
갓난아이때 바닷가 부두의 횟집 앞에 버려짐.
노모 강영순 죽기 전 77세
한번 이혼을 했었고, 슬하에 자식이 없어 홀로 외로움을 타며 살아가고 있을 때 갓난아이 명정훈 발견.
신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애지중지 명정훈을 키움.
그는 아내에게 오늘은 결코 그 곳에 가지 않을꺼라 맹세했다. 그렇게 수도없이 맹세했건만, 그는 또 좀이 쑤셔오는 본능을 참지 못했다. 그곳만 갔다오면 아내와 싸우는 것도 그에게는 매우 껄끄럽고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그곳에 가는 것이 그에게는 삶의 낙이자 행복이었다. 돈을 따면 몸속의 아드레닌이 끓어올라 폭포수같이 터지는 즐거움을 맘껏 느꼈고, 돈을 따지 못하면 넘치는 냄비같이 화가 나 세상의 모든 욕을 해버리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성질을 내며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그렇게 날린 돈이 10억이었다. 10억이면 가족과 더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일면을 즐길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중독이었다. 담배를 피는 사람이 피지 않으면 일어나는 금단현상과 마약을 하다가 끊을때 일어나는 온갖 현상들이 그가 도박을 하러 가지 않으려 할때면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경마장을 알기 전에는 나름 착실하게 카센타도 운영하고 있었고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보기도 했다.
하지만 손대는 사업들마다 쫄딱 망하기 일쑤였고 살아남은 사업이라곤 카센타 하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의 인생중에 가장 평화롭고 무탈없이 살았던 때가 그때이기도 했다. 사업자금은 물론 그의 모친 강영순이 대준 것이었는데, 강영순은 젊을 때부터 이런 일 저런 일 안 해본 일이 없었으며 경험과 노련한 눈썰미로 이재가 밝았는데 그래서 돈도 많이 모아 풍족하게 살았다.
그래서 아들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했었다면, 잘못했을 때는 따끔한 야단과 살콤한 매를 들었어야 했고, 잘했을때만 칭찬으로 우쭐한 기분도 느끼는 맛을 들여줘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명정훈에게 매를 드는 것조차 가슴이 미어와 오냐오냐라는 말로만 키워냈다. 명정훈이 사춘기때는 특히나 심했는데, 매일같이 엄마가 용돈을 넉넉히 줬는데도 불구하고 엄마의 지갑을 통째로 훔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심하면 청소년 금지구역까지 출근하다시피 하며 타락한 중고등학교의 생활을 했다.
그는 항상 돈이 수중에 넘쳐났는데도 불구하고 왕따인 아이나 약한 아이들의 돈을 뜯고 심하게 구타하기까지도 했었다. 그러다 구타당했던 한 아이 중의 한명이 심한 린치로 인해 뇌파열이 되어 숨을 거두었으나 청소년법에 의해 소년원에서 몇년도 아닌 몇달만 지내다가 모친의 보석금과 합의금으로 인해 풀려나와 또다시 타락한 생활을 거듭했다.
그의 모친은 그가 소년원에 들어가 있을때 피해자의 부모님에게 무릎을 꿇고 두 손바닥이 불이 나도록 비비며 용서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처음에는 적의심과 분노로 강영순을 대했던 피해자 부모들도 그녀의 지극정성에 감동해 오히려 미안해지는 아이러니함을 느끼며 이미 그녀의 정성이 안타까워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음에도 바라지도 않았던 합의금을 강영순의 설득과 반복된 권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명. 정. 훈. 그는 누구던가. 그의 모친이 그렇게 사랑을 쏟았음에도 달콤한 사탕을 받아먹기만 하고 어머니를 사랑할 줄 아는 인간애를 몰랐으며,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은 더욱더 알길이 아득하기만 한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