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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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명한 작품을 늦게 읽었다. 4년 전 처음 읽었을 때의 인상은 무척이나 생생하고 사실적이라 오히려 불편하다였다. 아프고 불편한 느낌. 객관적 대상으로 힘써 거리두기하며 읽은 듯하다. 재독하면서 비로소 그때보다는 훨씬 요조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 작가의 문장이 레고 쌓기 같아서 작은 브릭을 정교하게 누적할 때 인물은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그렇게 요조의 고민과 간절함, 두려움과 열망은 위치를 잡아간다. 떨면서 맞춰갔으나 잘못되었다고 알아차리는 순간에 돌이키고 싶다고 주춤하지만 주인공은 그 방법을 알 수 없다. 블록을 해체해 어느 열부터 재조립하면 환영받을 수 있을지, 차라리 강건하고 무감각한 보편 타당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지 모두 가능성의 영역 밖이다. 캐릭터가 형체를 드러낼수록 무균실에 있을 영혼이 어떻게 세상을 감당하겠는가 하는 슬픔은 독자의 몫이 된다.

『인간 실격(김춘미 옮김, 민음사, 2004, 1948, 191쪽 분량)』은 다자이 오사무(본명 쓰시마 슈지)의 후기 작품이며 완결된 작품으로는 마지막 소설이다. 자전적 경험과 허구가 공존하는 『인간 실격』은 "작가가 처음으로 '타를 위해서'라는 자세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예술적 자서전을 시도한"(p.184) 작품이다. 가네기 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부끄러움을 느꼈다. 또한 혜택 받은 자로서 못 가진 자에 대한 “죄의식 내지는 부채의식”(p.167)을 떨치지 못했다. 이런 죄의식은 천성적으로 섬세한 감수성과 만나 작가가 남다른 여정을 걷게 만든다. <다자이 오사무론>을 쓴 오쿠노 다케오는 『인간 실격』 서문을 읽고 "이 작가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깊은 고뇌에 찬 인생을 경험한, 통상적인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심각한 정신 생활을 영위한 인간임"(p.185)을 느꼈으며 그 확신으로 평론을 썼다고 밝힌다. 소설은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요조의 삶을 있는 그대로 해부한다.

소설은 ‘나’라는 화자가 전하는 서문과 후기, 주인공인 요조가 쓴 세 편의 수기로 구성된다.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p.9)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유년의 요조, 고등학생에서 대학시절의 모습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어느 시점의 사진에 대한 감상을 전한다. 미남이라는 말도 하지만 세 번 반복되는 “섬뜩하다”는 표현이 눈에 띤다. 섬뜩하고 기묘한 얼굴, 그러나 어쨌든 대단한 미남이라 볼 만한 얼굴이라니 <악령>의 주인공 스타브로긴의 아름답고 가면같은 얼굴이 겹쳐 보인다. 그러나 스타브로긴은 타인을 억압할 만큼 강하게 의지를 관철해갔지만 요조는 매사에 억압당할 만큼 여렸고 타인의 의중을 가늠하느라 진이 빠져갔다. 요조를 찍은 세 장의 사진은 어쩔 줄 모르며 타인을 살피던 영혼을 거쳐 영혼 탈락의 막다름을 담는다. 소설은 그 과정의 기록이다.

요조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의 믿음은 얼마 가지 않아서 깨어진다. 기차와 지하철, 배고픔의 정체가 그의 생각과 달랐을 때, 자신이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다른 사람들의 개념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불안을 가져온다. 참을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을까, 그는 “익살”에서 구원을 찾으며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라고 명명한다. 그의 익살은 필사적이 된다. 그는 비합법, 음지의 사람, 범인 의식(p.51)이 오히려 편하고 어느 날 무언가가 “되어 있”(p.55)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다. 그는 물에 떠내려가듯이, 거침없이 편하게 전진하는 사람들의 파도에 떠내려간다. 넙치가 쓰는 술책에, “이 세상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 차리기”(p.78)에 절망한다. 그냥 이렇게 말해줬다면 됐던 건데 라고 혼자 고통받는다. 호리키의 냉랭하고 교활한 이기주의에 아연실색한다. 그는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p.119)라고 묻는데 이어 “무저항은 죄입니까?”(p.131)라고 신에게 묻는다. 그가 인간의 세계에서 느끼는 단 한가지 진리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뿐이다. 그가 인간세계와 연결되는 가느다란 실에 의지해 다다른 종점이다.

소설은 140페이지 남짓의 길지 않은 분량으로 한 인간의 마음의 행적을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서술과 독백, 대화의 구성이나 줄 바꿈과 여백까지 요조의 감정으로 이끌어간다. 무대를 감상하는 기분도 든다. 한 인물의 무언극에서 그를 탈출시켜주고 싶을 수도 있다.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연결할 때의 밀도는 주인공의 심리를 고스란히 새긴다. 독자는 한 순간 그가 된다. 요조는 과민하다. 그럴 수 있다. 요조는 박동과 박동 사이에도 그칠 줄 모르고 맥이 뛰는 민감한 심장을 가졌다. 누구의 잘못일지 정확히 지목할 수 없지만, 수기를 건네주던 마담처럼 아버지를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몸 둘 바 모르던 마음이었다. 마음이 몸 둘 바를 모르니 맥박 위에 맥박, 호흡 위에 호흡이 포개지거나 불시에 템포를 놓친다. 포즈.

태연할 수가 없어서 침착을 연기하게 되었다. 그러기 쉽다.(안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요조는 가엾다. 그런데 우리를 닮았다. 요조는 우습다. 역시 우리를 닮았다. 요조의 가면, 우리도 몇 개 가지고 있다. 요조, 피해! 그는 듣지 못하고, 요조, 저쪽으로! 그는 반대편으로 달린다. 합격은 경계선이 요동한다. 실격은 범람한다. 정밀한 합격의 바늘귀로 들어갈 만한 빼어나고 슬기로운 이력을 성공적으로 쌓고 있는 사람이라도 요조를 모른 척 할 수 없을 것이다. 호리키는 모른척했지만. 그들은 모두 모른 척 했지만, 지금 다시 책을 펴는 독자는 몇 번이라도 모른 척 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생 합격 고군분투기, 그러나 실패했다. 동시에 소망한다. 세상에 있는 또 다른 요조들이 모쪼록 평안하기를.

책 속에서>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것이 저의 서글픈 버릇의 하나인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무슨 득이라도 보려고 그런 꼬리를 단 적은 없습니다. 그저 흥이 깨지면서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이 질식할 만큼 끔찍해서, 나중에 저한테 불이익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의 ‘필사적인 서비스’, 그것이 비록 잘못되고 시원찮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서비스 정신에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습성 또한 세상의 소위 ‘정직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p.82)

“아니, 이젠 필요 없어.”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애에서 그때 단 한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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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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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정이 90대인 모친과 80대 후반인 부모님을 매일 왕래하며 돌보고 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곁에서 보며 드는 생각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피할 수 없는, 곧 다가올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는지, 최적의 매뉴얼은 있는지, 후회 없이 해낼 수 있을지, 질문은 계속되지만 정답은 없다. “대비”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두려움이 아직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겪으면서 배우기에는 늦다는 걸 안다. “대비”는 정보와 경제력에, 하나를 꼽자면 개인의 경제력에 더 큰 방점이 찍힌다.

송병기의 『각자도사 사회(어크로스, 2023, 264쪽 분량)』는 노화부터 죽음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살펴봄으로 “존엄한 죽음”이 어려운 이유를 묻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저자는 인류학 중에서도 ‘인간의 질병과 돌봄, 의료체계를 각 문화마다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다루는지를 연구하는’(인터뷰 발췌) 의료 인류학자로 생애말기 돌봄을 연구하고 국내외 병원과 요양원 등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했다. 각자도생, 즉 스스로 살 길을 찾듯이 죽음도 개별 과업, 개인의 문제라는 제목, “각자도사 사회”가 외롭고 비정한 울림을 준다.

서문에서 저자는 죽음과 삶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님에도 현실에서 죽음은 삶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존엄한 죽음’보다 ‘깔끔한 죽음’을 원했다. 깔끔한 죽음을 존엄한 죽음이라고 여겼다.”(p.9) 저자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찰하고 충실한 전달자 역할을 한다. 그는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p.10)며 관심을 촉구한다. 1부에서는 일곱 개의 주제로 죽음으로 가는 현주소가 어떤지 실상을 보여준다. ‘오디세이아’에 비유할 정도로 생의 말기 돌봄의 흐름은 집을 중심으로 떠났다가 회귀하는 양상이다. 생애 말기 돌봄의 형성 과정이 노동자와 돌봄 수혜자의 삶을 두루 취약하게 만드는 점에서 표면상 드러난 문제 이면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존엄한 돌봄과 임종을 희망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운(가족운, 간병인운 등등)이 좋아야 한다.”(p.25)는 지적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노인 돌봄”에서는 모든 인간은 의존적인데, 마치 노인만 의존적인 존재인 것처럼 딱지를 붙이는 현실을 짚는다. 노년이 불평등한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세계에서 노화와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기에 비용을 지불하고 몸을 관리하고 각자 분투한다. 노인 돌봄 논의는 노인을 자유롭고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콧줄” 편에서는 일상적 의료행위로 자리잡은 비위관 삽입이 환자 상태와 삶의 질 향상 대신 수명만 연장하게 되는 경우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원칙적으로 이를 배제하는 기관이 해답을 제공할까? 하지만 요양보소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식사 시간은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다른 형태의 소외가 자리한다. “말기 의료결정”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환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일로, 즉 죽음은 타이밍의 문제로 바뀐다.

2부에서는 죽음의 여러 얼굴을 살피고 존엄한 죽음에 대해 다시 묻는다. “제사”에서는 세 권의 소설로 상흔과 의식, 관습(p.153)으로 자리매김했던 명암과 시대 흐름에 따른 변화, 새로운 기대까지 여지를 남긴다. 웰빙에서 이제는 “웰다잉”이다. 우리는 웰다잉하기 위해서 젊을때의 시간을 활용하고 정보를 모으고 당연히 재정을 확보하고 건강도, 정신도 관리하는 등 노오력을 요구받는다. 이에 저자는 좋은 죽음은 좋은 사회에 대한 고민과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만큼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되묻는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영화관”을 영화를 보는 공공장소라는 일반적 개념을 넘어 “죽은 존재가 스크린 위에서 탄생하는 곳, 관객이 그 ‘죽음과 탄생’을 마주하는 곳”(p.238) 등으로 새롭게 명명한다.

책은 사회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제정된 법, 이를 근거로 시행되는 제도들이 어떻게 달라져왔고 여전히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걸림돌이 잠재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다양한 사례를 제공하고 참조하므로 독자는 각각의 처지가 생생하게 와 닿는다. 어렴풋이 흩어지던 정보나 매체에서 접하던 갈등의 이면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건 저자의 사명감에 가까운 수고 덕분이다. 생의 끝에 이르러 아름다운 인사를 남기고 싶은 인간적 소망이 다양한 입장에 포위당한 채 방치되거나 외면당하거나 여러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하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일은 다른 미래를 위한 필요조건이자 기본값이다. 저자의 목소리를 따르면 다른 해결점에 도달하게 될지, 그렇다면 그때는 언제일지, 너무 늦어버리는 건 아닌지 여전히 불안하고 조심스럽다. 저자는 질문 끝에 제안하고 촉구하며 건의하고 추가한다. 적극적 상상을 요청한다.

열 세 꼭지의 암울한 정거장을 지나 마지막 역 “영화관”에 이르면 팍팍함은 뭉근해지고 암전은 공간 밖 빛을 불러들이려 한다. “영화관은 죽음을 통해서 희망을 비추는 장소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현실 읽기, 눈 부릅뜨고 제대로 보기, 깨어서 성찰하기로부터 희망과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다소 추상적인 결말이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현실을 뛰어넘는 가능성의 영역을 낙관한다. 태어난 이상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리는 노화, 질병, 죽음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또 하나의 주사위가 존엄한 죽음을 허용하기를 운을 비롯한 가능한 자원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적절하기를 바란다. 인생이라는 달리는 기차에 오른 모두에게 필요하고 유익할 책이다.

책 속에서>

한국에서 ‘복지’라는 단어는 대개 ‘취약계층’을 염두에 둔다. 그 ‘상식’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건 복지 정책이 겨냥하는 취약계층이란 무엇인가? 반대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보건복지 정책이란 무엇인가? 취약한 사람들의 계층 이동을 돕는다는 것인가? 혹은 ‘보통’ 사람들이 취약계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 정책인가? 혹시 계층 간의 분리를 고착시키는 정책은 아닌가?(p.59)

오늘날 웰다잉의 유행은 그만큼 사람들이 잘 죽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자, 죽음이 개인의 노력으로 대비해야 하는 일이 됐다는 방증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불행을 막는 주술이 등장한 것 같다. 우리는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정도로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잘 죽는거라도 고민하는 것일까? 웰다잉은 우리에게 죽음에 관한 두툼한 언어와 상상력을 촉구한다.(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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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조주관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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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조주관의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아르테, 2022, 336쪽 분량)』은 도스토옙스키 애독자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아니, 소장 욕구를. 저자는 책의 또 다른 제목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미술관>을 꼽으며 미술품을 모아 전시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과 예술 비평의 관점을 가리키는 이중적 의미를 부여한다. 조주관 교수는 반세기가량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에 경도되어 살아온 국내 러시아문학 권위자로 논문 및 강연뿐 아니라 번역과 집필로 독자를 러시아 문학으로 이끌어왔다.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은 세 가지 형태의 기록을 종합하고 있는데 <작가 일기>와 아내의 <회고록>, 소설과 미술평론이다.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디일까. 도스토옙스키는 “미술관”이라고 여겼다. 그의 미술관 여행은 편안한 취미 활동보다는 절실한 필요에 이끌리는 행보였다. 그는 어떤 그림을 스치듯 통과하지 않았고 흡수하듯 영혼에 새겼으며 투영한 결과물을 일기와 소설, 비평에 녹여냈다.

도스토옙스키 장편 소설을 읽다 잠시 정지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멈추어도 될까 자문한다. 각주가 제공하는 정보가 오히려 질문은 만들어 멈추고 두리번거려 본 독자들은 안다. 그렇게 모은다고 모은 자료 역시 영 흡족하지 못함을. 이 아쉬움을 해소해줄 책이라는 걸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이라는 제목만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는 『백치』에서 정지버튼을 눌러야 했던 한스 홀바인의 <관 속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명해 줄까. 그림을, 작가를, 소설 속 인물들을, 그 순간 미쉬낀 공작과 로고진 사이에 흐르던 공기를 말이다. 저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냈던 치열한 정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 영혼에 새겼던 그림,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시간을 3부 20장의 전시실에 선보인다.

1부는 <성과 속>이다.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는 마지막 작품인 <돌아온 탕자>에서 가장 완전한 용서의 순간을 담아낸다. 여기서 고통을 통한 구원과 러시아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아버지와 아들” 문제를 부각하게 된다. 이 주제를 <미성년>에서 아르카디의 성장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죄 없이 벌을 수용하는 장남 드미트리의 선택으로 연결 짓는다.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은 “고난을 통한 구원”(p.58)에 도달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했던 티치아노의 <공전>은 마가복음의 유명한 장면을 그린다. 주제가 돈이니 읽다보면 3천 루블이 시종일관 귓전에 맴도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불러내게 된다. “그의 소설에서 돈은 힘이며 자유이고 시간이자 언어”(p.79)였고 나에게 3천 루블은 무엇인가로 수렴하게 만들었던 미완의 최고작이다.

2부 <미와 추>에서 저자는 “어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p.117)라는 질문을 <백치>의 화두로 본다. 도스토옙스키는 <시스티나의 마돈나>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생각하는데 그림과 관련해 아내가 기록한 에피소드는 인상깊다. 반면 톨스토이나 체르니솁스키가 보였던 부정적 시선도 고르게 조명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아름다움을 성과 속, 두 가지 기준으로 구분했고 이는 그가 창조해낸 인물의 특징으로 스민다. 도스토옙스키가 바젤 미술관에 찾아가 보게 된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은 “미세한 상처의 찌르기”(p.174)와 같은 격렬한 인상을 남기고 <백치>에 그대로 담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함이라는 목적과 극단에 있는듯한 처절한 죽음은 반어적 표현으로 임무를 완수한다. 또한 사진의 중요성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실물보다 사진으로 먼저 나스타샤를 보았던 미시킨 공작의 반응을 따라가면서 시각에서 비롯한 통찰의 문제를 재확인한다. 3부 <생과 사>에서는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잊지 못했던 과거 사형집행의 순간과 집행 직전의 번복부터 소환한다.

“그가 언급하는 화가들은 모두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눈의 소유자이다. 그러한 화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은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스토옙스키에게 창작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p.331) 이는 저자가 에필로그의 소제목에 덧붙인 설명이다. 책은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 51점과 직접 그린 드로잉 4점을 통해 작가의 삶과 작품을 재조명한다. 19세기 러시아 문화계의 기류, 왕성하던 이동파 화가들의 활동과 한계, 이에 대한 제언도 엿볼 수 있다. 미술 평론에 있어서는 슬라브주의자였던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인들이 러시아 미술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바라는 기대도 동력으로 작용했다. 아내 안나의 <회고록>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생생한 스케치를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애독자라면 작품 속 불멸하는 인물들과 조우하는 기쁨이 가장 클 것이다. 읽지 못한 작품이라면 완독 후 본문의 분석을 다시 확인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다지게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초상화도 익히 보아왔던 페로프의 것과 새로운 발견 트루톱스키의 그림, 여기에 로운 이순영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까지 더해 모두 소중하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저자의 헌사와도 같은 이 책은 독자에게도 다시 펴보고 오래 아낄 선물이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도스토옙스키에게 미술작품은 순수한 미적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을 사로잡는 ‘푼크툼’적 예술품이다. 그의 소설은 미술작품에서 받은 감동을 전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그는 미술작품을 ‘읽었’는데, 이는 작품을 보며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끝없는 질문과 답변의 놀이를 통해 새로운 독해를 시도한다. 그의 미술 텍스트 독해는 그저 남이 이미 읽은 궤적으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었다.(p.168)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을 보는 심미안을 강조한 작가다. 그는 타자의 내면을 읽고 진실과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백치』에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주제는 부분적으로 ‘미술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라는 말로도 재구성될 수 있다. 이 재구성은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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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의 일기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마크 트웨인 지음, 프란시스코 멜렌데스 그림,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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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소설은 아담과 이브, 남성과 여성의 입장에서 사랑의 시원부터 종결까지의 전 과정을 그려 보인다. 예측 가능했던 매듭에 이르렀을 때 독자는 영원, 어쩌면 미지의 불멸로 시선을 던질지도 모른다. 소실 이후에도 무(無)화되지 않을, 않아야만 한다는 믿음은 소망을 넘어선다. 『아담과 이브의 일기(프란시스코 멜렌데스 그림, 김송현정 옮김, 문학동네, 2021』는 「아담의 일기 발췌」(1904)와 「이브의 일기」(1906)를 함께 수록하고 있지만 마크 트웨인 자신은 두 소설이 함께 실린 판본을 확인하지 못했다. 전자가 쓰여진 시기가 사치와 투자실패라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중 쓰였다면 후자인 「이브의 일기」는 작가에게 실질적인 편집자이자 검열가였던 아내 올리비아 랭던을 잃은 후 집필되었다.

마크 트웨인은 『톰 소여의 모험』(1876), 『미시시피강의 생활』(1883),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까지 미시시피 3부작으로 유명하다. 미국식 구어체를 구사한 최초의 작가이면서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특유의 비판의식과 유머로 그렸던 마크 트웨인을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문학의 아버지’라 불렀다, 또한 헤밍웨이는 미국의 모든 현대문학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극찬한다. 마크 트웨인은 다양한 여행기 뿐 아니라 역사와 공상과학적인 상상력이 결합된 많은 소설, 에세이식 작품을 통해 창작은 물론 비판의 목소리 내었으며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역할에 적극적이었다.

『아담과 이브의 일기』는 <아담의 일기 발췌>와 <이브의 일기>를 차례로 묶었다. <아담의 일기>는 “이 긴 머리의 새로운 피조물이 아주 거치적댄다.”(p.11)라는 문장으로 문을 열고 “이 모든 세월이 지나고 보니,”(p.38)로 시작하는, 시를 방불케 하는 진심으로 이야기를 닫는다. 나의 본성과도 취향과도 부딪히는 타자의 돌연한 출현은 반가울 수가 없다. 그가 부르는 명칭은 이브의 교정으로 ‘그녀’가 되기 전까지 내내 ‘그것’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그녀는 뱀과도 친해진다. 금단의 열매와 그로 인한 후속 결과는 작가가 차용한 에덴동산 이야기를 변주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담의 시선은 달라진다.

<이브의 일기>는 “나는 이제, 태어난 지 만 하루쯤 됐다.”(p.41)는 소개로 기록을 시작한다. 아담의 기록이 타자인 이브로 시작되었다면 이브는 자기 자신을 탐색한다. 그녀는 기록하고 실험하며 면밀히 관찰하고 궁금해한다. 꼼꼼하게 단계를 밟아 추론한다. “~듯하며, 했는데, 테고, 테니, 더 나을 것이다.”(p.45) 그녀가 아담을 부르는 호칭은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파충류일 수도 건축물일 수도 있다고 가늠하면서 특징을 열거한다. 그녀의 명명하기는 논리적이다.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별을 노래하는 천문학자의 모습도 이브에게서 만날 수 있다. 이브의 호기심은 두려움보다 깨우치는 기쁨으로 기운다. 쓸모와 아름다움 사이에서 헤아린다. 그녀는 에덴동산 추방 이후의 서술에서도 감상에 매몰되지 않는 명징한 인과를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의 일기』는 단편 소설이면서 우화이고 상징적이면서 자전적이다. 헌정을 담은 사사로운 기록이면서 인간의 보편적 감정의 행로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독자는 아담과 이브의 자리를 자신의 이름으로 치환해 또 하나의 이야기로 간직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아담과 이브의 일기』는 상호 교류하는 감정의 물결과 깊이 침잠하며 귀 기울일 때의 내면 풍경과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모든 첫 발견의 흔적들이 촘촘하다. 독자는 인류 최초의 시선을 공유하게 되고 낱말과 문장, 행간과 페이지를 따라 낯선 여행에 동참한다. 그 여행은 모든 예상과 기대를 물리치기에 걸음걸음이 발견이고 성장이고 역사가 된다. 이 역사를 생생하게 밝히는 또 한가지가 프란시스코 멜렌데스의 삽화다. 독특하고 세밀한 그림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작은 분량의 작품이다. 하지만 몇 번쯤 재독하면 충분하다 여기게 될지는 알 수 없고 특히 마지막 페이지는 더욱 그렇다. 웃음소리가 들리고 눈물이 퍼지며 삶을 돌아보게 할, 작가의 마지막 작품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이 모든 세월이 지나고 보니, 내가 초반에 이브를 잘못 판단했음을 알겠으며, 그녀 없이 동산 안에서 사느니 그녀와 함께 동산 밖에서 사는 편이 더 낫다. 처음에 나는 그녀가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목소리가 침묵에 잠겨 내 삶에서 사라져버린다면 안타까울 것이다. 우리를 가까이 하나로 맺어주고 나를 깨우쳐 그녀의 선량한 마음과 그녀의 다정한 영혼을 알게 한 그 밤에 축복 있으라!(p.38)

관찰을 통해서 나는 별들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가장 멋진 별 몇 개가 하늘에서 녹아내리는 것을 보았다. 하나가 녹는다면 전부가 녹을 수 있고, 전부가 녹는다면 모두 같은 날 밤에 녹을 수 있다. 그런 슬픈 일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매일 밤 잠들지 않고 되도록 오래 깨어서 별들을 쳐다볼 생각이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들판을 내 기억에 새겨서, 머지않아 별들을 빼앗기게 되면 내 상상력으로 그 사랑스러운 억만 개의 별들을 검은 하늘에 되돌려놓아 다시 반짝이게 할 작정이다. 그러면 내 눈물에 흐려져 별들은 두 배가 되겠지.(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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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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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박영근 옮김, 민음사, 1999, 1835, 420쪽 분량)』은 1819년 파리의 삶을 그리지만 시간과 공간을 어느 방향으로 이동시켜도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만나게 한다. 고급 하숙집과 사교계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일상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와 추구하는 가치를 드러낸다. 이에 필요한 수단을 노력보다 탈취와 희생에서 취하기 시작하면 도덕적 해이와 양심의 무감각은 이미 전제된다. 작가가 초판 서문에 썼다는 “모든 것이 사실이다.”(p.9)라는 말에 반대할 수 없다. 그가 확언했듯이 어느 누구의 집에서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도 한없이 되풀이되지만 제어할 마땅한 방법을 찾기 어려운 오래된 슬픔을 고리오와 그의 딸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스무 살 때 문학의 길로 들어설 결심 후, 약 십 년간 독서와 습작, 경제적 독립에 전념했다. 그러나 시작하는 사업마다 실패하고, 소설을 써서 빚을 갚아 나가는 등 평생 곤란을 겪었다. 발자크는 서른 살 때 스콧과 쿠퍼의 영향을 받은 역사 소설 『올빼미당원』을 발표하고, 1848년에 이르기까지 약 이십 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갖가지 인간 삶을 그린 소설들을 서로 엮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구성되도록 한 작품집 『인간 희극』을 평생에 걸쳐 집필했다. 프랑스 문학사에 하나의 큰 덩어리로 남아있는 『인간 희극』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소설을 통해 완벽하게 그려내려는 큰 뜻”(p.398)대로 <풍속 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라는 세 계열에 91편의 소설로 구성된다.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에서 “인물 재등장 기법”을 처음 시도한 후 주인공들을 여러 소설에 등장시켜 경제적 효과를 얻는다. “인물 경제학의 대가”가 『인간 희극』에 선보이는 인물은 거의 2000여 명이다. 이는 559명이 등장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1869)』를 상기시킨다. “완전한 단편의 형식을 갖추는 각각의 장은 완벽히 연결되어 거대한 장편소설을 완성했”(전쟁과 평화 4권 583p, 문학동네)던 톨스토이 이전에 근대적 소설의 탑을 정밀하게 구축하고 있다. 이런 발자크를 “인간 사회에 대한 진정하고 완벽한 모습을 제시하는 진짜 사회학자”(p.408)라고 알랭은 평한다.

작가는 고급 하숙집이라고 명시한 보케르 집을 촘촘하게 이동하는 카메라 렌즈와 같이 시각적으로 먼저 형상화한다. 이어 ‘냄새’를 보태 독자의 감각이 민감해지면 고급은 가난을 의미하는 또 다른 낱말이 된다. 하숙집에 묵고 있는 일곱 사람은 1820년대 파리에서 자신들의 열악한 처지를 견디며 혹시 나아지지 않을까 꿈을 꾼다. 3장 ‘불사신’에 중점적으로 등장하며 보트랭으로 불린 자크 골랭은 라스티냐크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도모하고자 계획하나 실패한다. 보트랭은 자신을 비난하는 보케르 부인에게 “당신은 우리 같은 놈들보다 더 훌륭합니까? 타락한 사회에서 무기력한 부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치욕이 우리 어깨에는 덜 있어요.”(p.276)라고 외친다. 여전히 묻고 있다.

“젊고, 사교계를 부러워하며, 여성을 갈망하는 이 청년이 자기를 위해 두 집안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다니!”(p.48) 으젠 라스티냐크는 성공적인 사교계 입성을 위해 학업보다는 유력한 관계에 의지하고자 결심한다. 보트랭이 보여주는 라스티냐크의 암울한 미래를 부정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자네가 서둘러 출세하기를 원한다면 벌써 부자가 되어 있거나 겉으로라도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말일세.”(p.149) 유혹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젊은 영혼을 흔드는데 거침이 없다. 그러던 중 라스티냐크는 제면업자였으며 아버지 중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리오 영감과 “자기 아버지를 모른다고 하다니!”(p.104)라고 한탄케 한 그의 두 딸의 사정도 알게 된다.

고리오 영감은 딸들에게 헌신했으나 그 대가로 버려졌다. 나의 엄마는 내게 늘 말씀하셨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라고. 너는 그러지 말라고. 그런데도 왜 그녀는 헌신했을까. 사랑의 역동은 수백 년 전 파리나 현재의 지구촌이나 놀라우리만치 닮아서 작가가 어느 골방에서 실시간 써내고 있는 글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든다. 어리석은 고리오 영감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결심하지만 그 자리가 한 순간 독자의 발밑과 흡사해 고리오의 고통과 호소는 오늘의 독자를 울린다. 그의 실수를 번복하지 말자는 부모의 각오는 무르고 빛바래 돌이킬 여분의 시간을 남기지 않는다. 작가는 인간 비극을 활자로 새기고 행여 흐트러질세라 고정액을 뿌려둔다. 그럼에도,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복되겠지만 말이다. 야망도 자신도 넘쳤던 라스티냐크의 도전은 눈물에 젖어 스러져가는 노인 곁에서 잠시 멈춘다. 노인에게는 연민을 담은 타인의 손만이 허락될 뿐, 그가 간절히 원했던 딸들의 목소리, 시선은 다른 공간에서 다른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러시아 여류작가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가 『시간은 밤(문학동네)』에서 그린 모성의 지독한 아이러니가 고리오 영감이 보여주는 부성의 비극과 겹친다. “어머니, 아, 이 얼마나 성스러운 단어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은 아이에게, 아이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면 아이들이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을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은 버려질 것이다. 아아아.”(p.225, 시간은 밤) 미칠 노릇이다. 임종을 앞둔 고리오 영감이 내는 절규는 작가의 섬세한 문장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딸들과 나누는 대화 역시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이다. 또한 익숙해서 슬프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p.396) 소설의 마지막, 라스티냐크의 유명한 외침은 고리오가 걸었던 눈물과 비참의 골짜기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동행했던 청년의 치열한 도전장이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무저갱으로부터 이제는 비상만이 남았다. 라스티냐크는 어떤 길로 내달리게 될까.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의 구원이었던, 다른 이름을 가진 소냐일까? 무엇을 통해 어디에 이르게 될지 다음 장면이 필요하다. 작가는 결말을 절정으로 치환한다. 소설은 숨죽이며 꺼져가는 안타까운 부성과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통한 라스티냐크의 성장기를 고루 담는다. 질문하면 정보를 취합해 실시간으로 답을 알려주는 똑똑한 시대다. 우리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힘닿는 만큼 발자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겠다. 핑크빛 전망은 없겠지만 예리한 펜은 충분히 깊게 통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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