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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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정이 90대인 모친과 80대 후반인 부모님을 매일 왕래하며 돌보고 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곁에서 보며 드는 생각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피할 수 없는, 곧 다가올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는지, 최적의 매뉴얼은 있는지, 후회 없이 해낼 수 있을지, 질문은 계속되지만 정답은 없다. “대비”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두려움이 아직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겪으면서 배우기에는 늦다는 걸 안다. “대비”는 정보와 경제력에, 하나를 꼽자면 개인의 경제력에 더 큰 방점이 찍힌다.

송병기의 『각자도사 사회(어크로스, 2023, 264쪽 분량)』는 노화부터 죽음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살펴봄으로 “존엄한 죽음”이 어려운 이유를 묻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저자는 인류학 중에서도 ‘인간의 질병과 돌봄, 의료체계를 각 문화마다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다루는지를 연구하는’(인터뷰 발췌) 의료 인류학자로 생애말기 돌봄을 연구하고 국내외 병원과 요양원 등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했다. 각자도생, 즉 스스로 살 길을 찾듯이 죽음도 개별 과업, 개인의 문제라는 제목, “각자도사 사회”가 외롭고 비정한 울림을 준다.

서문에서 저자는 죽음과 삶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님에도 현실에서 죽음은 삶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존엄한 죽음’보다 ‘깔끔한 죽음’을 원했다. 깔끔한 죽음을 존엄한 죽음이라고 여겼다.”(p.9) 저자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찰하고 충실한 전달자 역할을 한다. 그는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p.10)며 관심을 촉구한다. 1부에서는 일곱 개의 주제로 죽음으로 가는 현주소가 어떤지 실상을 보여준다. ‘오디세이아’에 비유할 정도로 생의 말기 돌봄의 흐름은 집을 중심으로 떠났다가 회귀하는 양상이다. 생애 말기 돌봄의 형성 과정이 노동자와 돌봄 수혜자의 삶을 두루 취약하게 만드는 점에서 표면상 드러난 문제 이면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존엄한 돌봄과 임종을 희망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운(가족운, 간병인운 등등)이 좋아야 한다.”(p.25)는 지적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노인 돌봄”에서는 모든 인간은 의존적인데, 마치 노인만 의존적인 존재인 것처럼 딱지를 붙이는 현실을 짚는다. 노년이 불평등한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세계에서 노화와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기에 비용을 지불하고 몸을 관리하고 각자 분투한다. 노인 돌봄 논의는 노인을 자유롭고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콧줄” 편에서는 일상적 의료행위로 자리잡은 비위관 삽입이 환자 상태와 삶의 질 향상 대신 수명만 연장하게 되는 경우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원칙적으로 이를 배제하는 기관이 해답을 제공할까? 하지만 요양보소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식사 시간은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다른 형태의 소외가 자리한다. “말기 의료결정”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환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일로, 즉 죽음은 타이밍의 문제로 바뀐다.

2부에서는 죽음의 여러 얼굴을 살피고 존엄한 죽음에 대해 다시 묻는다. “제사”에서는 세 권의 소설로 상흔과 의식, 관습(p.153)으로 자리매김했던 명암과 시대 흐름에 따른 변화, 새로운 기대까지 여지를 남긴다. 웰빙에서 이제는 “웰다잉”이다. 우리는 웰다잉하기 위해서 젊을때의 시간을 활용하고 정보를 모으고 당연히 재정을 확보하고 건강도, 정신도 관리하는 등 노오력을 요구받는다. 이에 저자는 좋은 죽음은 좋은 사회에 대한 고민과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만큼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되묻는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영화관”을 영화를 보는 공공장소라는 일반적 개념을 넘어 “죽은 존재가 스크린 위에서 탄생하는 곳, 관객이 그 ‘죽음과 탄생’을 마주하는 곳”(p.238) 등으로 새롭게 명명한다.

책은 사회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제정된 법, 이를 근거로 시행되는 제도들이 어떻게 달라져왔고 여전히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걸림돌이 잠재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다양한 사례를 제공하고 참조하므로 독자는 각각의 처지가 생생하게 와 닿는다. 어렴풋이 흩어지던 정보나 매체에서 접하던 갈등의 이면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건 저자의 사명감에 가까운 수고 덕분이다. 생의 끝에 이르러 아름다운 인사를 남기고 싶은 인간적 소망이 다양한 입장에 포위당한 채 방치되거나 외면당하거나 여러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하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일은 다른 미래를 위한 필요조건이자 기본값이다. 저자의 목소리를 따르면 다른 해결점에 도달하게 될지, 그렇다면 그때는 언제일지, 너무 늦어버리는 건 아닌지 여전히 불안하고 조심스럽다. 저자는 질문 끝에 제안하고 촉구하며 건의하고 추가한다. 적극적 상상을 요청한다.

열 세 꼭지의 암울한 정거장을 지나 마지막 역 “영화관”에 이르면 팍팍함은 뭉근해지고 암전은 공간 밖 빛을 불러들이려 한다. “영화관은 죽음을 통해서 희망을 비추는 장소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현실 읽기, 눈 부릅뜨고 제대로 보기, 깨어서 성찰하기로부터 희망과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다소 추상적인 결말이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현실을 뛰어넘는 가능성의 영역을 낙관한다. 태어난 이상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리는 노화, 질병, 죽음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또 하나의 주사위가 존엄한 죽음을 허용하기를 운을 비롯한 가능한 자원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적절하기를 바란다. 인생이라는 달리는 기차에 오른 모두에게 필요하고 유익할 책이다.

책 속에서>

한국에서 ‘복지’라는 단어는 대개 ‘취약계층’을 염두에 둔다. 그 ‘상식’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건 복지 정책이 겨냥하는 취약계층이란 무엇인가? 반대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보건복지 정책이란 무엇인가? 취약한 사람들의 계층 이동을 돕는다는 것인가? 혹은 ‘보통’ 사람들이 취약계층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 정책인가? 혹시 계층 간의 분리를 고착시키는 정책은 아닌가?(p.59)

오늘날 웰다잉의 유행은 그만큼 사람들이 잘 죽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자, 죽음이 개인의 노력으로 대비해야 하는 일이 됐다는 방증이다. 마치 죽음이라는 불행을 막는 주술이 등장한 것 같다. 우리는 잘 죽는 것만 고민하면 될 정도로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게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잘 죽는거라도 고민하는 것일까? 웰다잉은 우리에게 죽음에 관한 두툼한 언어와 상상력을 촉구한다.(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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