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미성년(열린책들/이상룡 옮김)』은 5대 소설 중에서 악령을 쓴 지 5년 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쓰기 5년 전, 작가적 역량이 거의 정점에 있을 때 완성한 작품이다.(987p) 러시아 문학가의 양대 산맥 중 한 축이자,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보여주었던 지적인 경지는 미성년또한 특별한 기대로 책장을 넘기게끔 이끈다. 그러나 읽을수록 탄력을 받으며 몰입하기 보다는 내가 뭘 잘못 읽고 있는 걸까스스로를 의심하며 석연치 않은 심정으로 무한 기다림의 챗바퀴를 돌리는 기분이 든다. 후반에 실린 작품 평론에서 역자도 단일한 의미를 담아낼 한 문단 안에서 조차 흐름이 각각인 지향점이 있다, 서술이 통일적이지 않다, 묘사가 명료하지 않다등 지적하며 이 작품은 다른 4대 장편들에 비해서 작가의 고유한 주제 의식이 제대로 형상화 되지 않았다는 문학적 평가를 받아왔다(993p)”고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매끄럽지 않아 보이는 모든 구성요소가 그 자체로 꼭 필요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 작품의 목표, 존재 의의임을 이해하게 한다.

 

첫 문장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내용의 글을 꼭 써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더 이상 가슴에 담아 두고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내가 처음으로 인생이라는 무대에 들어설 무렵에 관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상권, 11p)” 이것이 작품의 중심이다. 물론 덧붙임은 계속된다. ‘이제 100살이 되더라도 더 안쓸 것이다, 상세히 내면을 기록하려고 썼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수식없이 쓰겠다, 작가가 될 생각은 없다, 이런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 계속 한다는 것! 무려 1000페이지를 채운다는 것,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미성년 주인공 아르까지 마까르비치 돌고루끼가 1인칭 서술자로 자신이 경험한 시간을 기록하는 성장 일지, 성장 수기다. 작품의 첫 문장 만큼 313장 결말 중 3, 마지막 네 페이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의 목소리임을 누구라도 알아챌 만하게 해설 격의 총정리를 해준다. 톨스토이의 자전적 3부작과의 비교는 물론 작품의 의의와 예상가능한 미래의 쓰임에 대해서까지 마무리를 한다. 시작과 끝은 정연하고도 분명하다. 문제는 그 사이다. 이 사이는 굵은 거미줄과 같으니 그 중에서 자신에게 더 의미있는 가닥을 선택해 줄을 따라가며 숙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제법 간단해질지도 모른다.

 

아르까지 마까르비치 돌고루끼는 지주이자 귀족 미망인인 베르실로프(안드레이 뻬뜨로비치)의 서자로 태어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베르실로프는 전처의 자녀와의 관계 이외에 실질적 가정을 아르까지와 리자의 어머니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꾸린 상태이지만 여행과 방랑의 이유로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아내를 빼앗긴 또는 인류애적 차원에서 내어준 마까르 이바노비치 돌고루끼는 베르실로프의 하인이지만 아르까지 4인 가족의 마음의 지주이자 영적 순례자로 자리매김하고 임종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유산을 물려준다. 본인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독특한 처지로 세상에 던져진아르까지는 자의식이 생긴 이후 자기만의 사고와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부모 특히 친부인 베르실로프를 향한 분노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민감한 영혼인 아르까지는 베르실로프를 점차 동경하고 양가감정의 혼란 속에 조금씩 마음을 연다.

 

 

성년이 아닌 나이, 민법상 만 19세 미만미성년의 사전적 정의다. 부당함에 처한 소년의 성장기로 읽히다 어느 순간 베르실로프와의 대화중 솔직한 고백에 이르면 초첨은 아버지에게로 이동한다. 성인인 베르실로프 또한 불안정한 미성년임이 전면에 드러나기 때문인데 미성년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네 싶어진다. 정말로 마치 내가 둘로 갈라지는 듯해요.(881p)” 베르실로프의 미성숙함은 점진적이고 구체적으로 확대되어 다급하게 쫓기던 분신의 골랴드낀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속 섬망에 시달리며 악마와 대화를 이어가던 이반을 연상케한다. 미성년이라는 호칭은 더 이상 신체적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분열과 부조화, 방랑과 불안, 통제불능의 의지를 상징하며, 반면 통합과 조화, 내적 안정으로의 회귀와 신뢰, 배려는 닿고자 목표하는 극단에 존재한다.

 

그 외 각 인물이 간직한 서사도 다양해서 앞서 말했듯이 거미줄 한 가닥씩을 따로 살펴봄직 하다. 작품 전체에서 인물과 관계를 안정적으로 통찰하고 있는 따찌아나 빠블로브나 여지주는 바보, 이 멍청이야, 광대 같은 녀석······’ 등 아르까지를 향한 답답함을 거친 말로 내뱉으며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때가 되지 않으면 모르는 법,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겠다. 옆에서 숨어 엿듣게 되는 연극적 장면들, 작가의 경험이 묻어난 듯 한 도박 장면, 예언과도 같은 꿈, 옷 안쪽으로 실로 꿰멘 편지와 집착하는 무리들, 카라마조프 부자가 글루셴카를 동시에 사랑하듯 까쩨리나 니꼴라예브나를 향한 베르실로프와 아르까지의 사랑, 아르까지의 어머니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돌고루까야의 삶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뛰어드는 문장들과 에피소드와 인용 작품들 등 살필 것은 무궁무진하다.

 

 

도스토옙스키적 문장이 어떠하리라 짐작했음에도 쉼없는 장광설은 마음을 다잡게 한다. 사건을 전개시키다 직전 또는 직후의 예기치 못한 상황이 기존의 진행 궤도를 바꾸는데 그 사이에 들어갈 퍼즐은 매번 새로운 우연, 새로운 사실이다. 이는 도로의 차선에 서둘러 합류하듯이 겹쳐 들어오곤 한다. 혼돈 상태에서 방향을 잃고 천방지축 사방으로 달리는 인물 아르까지와 함께 달리느라 숨이 찬 시간이었다. 동시에 천방지축도 때가 있다, 늙어서까지,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후에까지 미성년으로 고착되어버린 많은 사람들, 자신의 미숙함은 모른 채 타인을 지적하고 교정하겠다 발벗는 많은 사람들도 떠올라 씁쓸하다. (애쓰는 모두가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정신없음 가운데 내내 불평하며 읽어나가는 독자를 묵묵히 내버려두는 작가의 의도도 조금은 이해된다. 아마 그래서 5대 소설일 것이다. 괄호로 묶는 조건으로,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 밝았다.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계기를 기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패배하지 않아 - 2020 칼데콧 대상 수상작 I LOVE 그림책
콰미 알렉산더 지음, 카디르 넬슨 그림, 조고은 옮김 / 보물창고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콰미 알렉산더의 우리는 패배하지 않아(보물창고/카디르 넬슨그림)는 유명하거나 이름모를 많은 흑인들을 노래하는 시 그림책입니다. 올해 칼데콧 대상과 뉴베리 아너상 수상작이라는 인정과 영향력을 확보한 작품이기도 하고 현재 진행형인 흑인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인이자 작가인 콰미 알렉산더는 작가의 말에서 미국 역사의 너무나 큰 부분이 잊히고 교과서에서 누락되고 있으며라고 작품의 동기이자 기대하는 역할, 의의를 밝힙니다. 말하고 드러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늘 흘러가는 대로 쉬운 쪽을 선택하고, 불편하거나 의식해야 하는 지점을 외면하곤 합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때로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패배하지 않아의 두 작가는 기꺼이 자신들의 할 일을 함으로써 기억하고 기념하는 장을 마련합니다.

 

표지에 실린 흑인들의 표정이 밝지는 않을지언정 눈빛은 많은 것을 말하는 듯 합니다. 절로 눈을 맞추고 귀 기울이게 하는 단단한 시선이 독자를 멈춰 세웁니다. 속표지의 비상하는 새의 연속 장면에 이어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마치 그 새처럼 날아오를 듯 하네요. 노래 같기도 한 시와 홀로 또는 여럿이 함께 있는 흑인의 그림이 책의 양 면에 함께 담깁니다. 그림을 보면서 이 사람들인가? 이 사람이 날쌔고 다정한 사람, 살아남은 사람들, 동요하지 않은 사람, 멈추지 않은 사람들인가 궁금하고 질문하게 되네요. 찾아볼 수 있는, 기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넘어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시를 바친다.”가 세 장에 걸쳐 세 번 반복될 때 이르면 심장은 두근거리고 함께 기리게 됩니다.

 

그리고 익명의 그들은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윌마 루돌프들/무하마드 알리들/알시아 깁슨들······ ”이어지면서 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호칭이 없지 않은 사람들이 됩니다. 또한 우리는 패배하지 않아는 더 힘차게 나아갑니다. 작품의 진정한 주인은 구별된 그들이 아니라 이 시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 또 당신.”지목하며 현재를 살고 있는, 앞으로 살아갈 모두를 부르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뭉클하게 일깨우며 뜨거운 격려를 전합니다. 어두웠던 표정들은 해처럼 밝게 빛납니다. 책에는 역사적 인물 및 사건을 담아 교과서의 잃어버린 부분을 채우고 있습니다.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살펴보아야 할 그림책이며, 그때마다 새롭게 발견할 보물을 간직한 책이며, 자꾸 말을 걸고 더 나은 내가 되어야 겠다 다잡게 하는 책입니다. 모두가 읽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주인공인 세계사 - 빙하기부터 다가올 미래까지 30명의 아이들과 떠나는 시간 여행
필립 윌킨슨 지음, 스티브 눈 그림, 강창훈 옮김 / 책과함께어린이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필립 윌킨슨의 우리가 주인공인 세계사(스티브 눈 그림/책과함께어린이)는 책으로 시간 여행, 또는 세계 여행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제목의 우리는 익명의 어린이 모두를 대변한다. 그 때, 그곳에서 살아냈던 아이들을 가리킨다. 세계사를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초대하는 특별한 책으로 초등 역사 베스트 셀러인 한국사 편지시리즈의 출판사 책과함께어린이에서 펴냈기에 신뢰를 더한다. 마지막 빙하기에 사는 소녀 타야의 일상에서 시작해 미래 어린이들의 삶까지 조망하고 예측하는데 좌우 양면으로 하나의 주제를 알차게 담고 있다.

 

시공간 여행을 떠나다 잠시 정착하는 하루 동안은 주인공 어린이의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기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친구가 많아지는 듯 충만해진다. 장소와 시간이 진행하면서 하단의 연표가 기준 역할을 해주므로 폭넓은 안목도 기를 수 있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지도는 물론 아름다운 그림과 사진이 가득하고 친절한 대화체의 설명이 곁들여있어 머무르는 친구와의 하루가 하나하나 의미있게 쌓인다.

 

주제별로 깊이 있게 정리하는 코너도 특별하다. 놀이의 역사를 살피는 역사 속 장난감들부터 입는 것, 먹는 것, 교육의 역사, 탈것의 역사까지 아우를 수 있다. ‘진짜 삶이라는 글이 박힌 별은 실존 인물을 가리키는 표다. 에드워드 6, 모차르트, 안네 프랑크 등 역사 속 중요한 인물을 만나볼 수 있어 관심을 가지고 더 알아가고자 할 동기를 만들어준다. 용어풀이와 찾아보기까지 지식 정보 도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가 주인공인 세계사는 커다란 판형으로 비주얼 백과사전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속에 빠지게 한다. 주인공 어린이의 복장 뿐 아니라 의식주 전체를 요약하며 세밀한 그림이 알찬 정보를 전한다. 때론 분위기까지 전달되는데 흑사병 시대 어린이 테레사의 암울한 환경이나 메리가 일하는 면직 공장의 열악한 노동 현장 등 한참을 머물러 보게 한다. 볼수록 더 많이 보이는 유익한 책으로, 연속물로 다음 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 슬립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문학동네/김진준 옮김)1939, 그의 나이 51세때 발표한 데뷔작이다. 이전에 대중잡지인 펄프 메거진에 꾸준히 단편을 발표했던 경험이그에게는 학교 역할을 했고 빅 슬립이후 탐정 필립 말로의 세계는 공고해진다. 하드보일드(hard-boiled)의 사전적 정의대로 현실의 냉혹하고 비정한 일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는 수법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스타일리쉬한 과거의 시공간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페이지마다 영상이 지나가는데, 때로는 빗소리, 차 소리, 총소리나 번쩍이는 섬광까지 더해지며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사설 탐정 말로가 스턴우드 저택을 방문해 병중인 노장군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는다. 후끈한 온실에서 주고 받는 대화는 의뢰자의 상황은 물론 두 인물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많은 것을 이뤘지만 병들고 노쇠한 아버지가 딸들에 대해 둘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따로따로 파멸의 길을 걷는 듯싶소. 비비언은 버릇없고 모질고 똑똑하고 인정머리라곤 없는 편이지. 카멘은 파리 날개를 뜯어내기 좋아하는 어린애고. 둘 다 도덕관념 따위는 고양이만큼도 없고. 나도 마찬가지지만 스턴우드 집안은 다 그렇지.(중략) 둘 다 일반적인 비행은 다 저질렀을 테고 아마 지금도 그러겠지.(19p)”라고 평하는 장면은 지금와서 어쩌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절망과 두려움을 냉소와 체념으로 담아낸다. 협박자 가이거 관련 문제 해결과 사라진 큰 사위 러스티 리건에 심적 의존에 가까운 순수한 애정을 보이며 찾아줄 것을 요청한다.

 

협박자의 명함을 가지고 뒤를 밟아가나 곧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두 자매와도 엇갈리며 조우하게 된다. 제도권 밖에서 움직이는 말로는 추적하는 범인에게, 다른 차원이지만 크론재거와 같은 공권력에게 이중의 견제를 받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태연히 자신의 일을 소화해 나간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핵심을 간파하는 직설적인 문장들과 표현, 우아한 비유들이다. 일촉 즉발의 순간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유머까지 더해 자신의 태도를 유지하는 말로는 스스로도 하늘이 내려주신 보잘것없는 배짱과 지능, 이래저래 들볶이면서도 의뢰인을 보호하겠다는 마음가짐(138p)”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긴다. 영화에 나오는 건달처럼 애써 느긋한 체하는 목소리였다. 영화가 사람들을 저렇게 망쳐놓는다.(96p)”, “총은 남아도는데 머리가 못 따라가니 우리 동네도 참 큰일이야. 총만 잡으면 온 세상을 틀어쥐었다고 착각하는 인간을 몇 시간 사이에 둘이나 만나다니. , 멍청한 짓 하지 말고 총 내려놔.(97p)” 현장감이 넘친다.

 

아빠가 당신 핏줄을 경멸하면서 돌아가시게 하긴 싫어요. 원래 자유분방한 핏줄이지만 늘 타락한 핏줄은 아니었거든요.(179p)”, “아빠가 돌아가실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무슨 생각을 하실까 걱정하는 거죠.(277p)” 때론 폭풍전야의 상황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애를 쓸 때 옳고 그름을 떠나 감정이입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침착하게 독이 든 술을 받아 마시는 사람과 그 사실을 후에 알게 된 말로는 안타깝다. 그렇다고 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닫집침대 위에서 핏기 없는 손을 이불 위에 포갠 체 조용히 누워 있도록 내버려두자.(279p)” 말로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지녔다. 그는 지키고 보호하려는 자가 맞다.

 

우연처럼 자연스러운 사건들이 꼬리를 물 때에도 완벽히 이해하면서 따라가기가 힘에 붙이곤 했다. 그럴때면 사건의 전말을 말로 스스로 정리하는 장면이 한 두 번 반복될 때 도움받으며 넘어갔다. 하지만 사건 전개의 증거나 범죄의 내막, 진범이 누구인가보다는 죽음의 여러 형태를 객관적이고 인간적인 말로의 시선으로 살피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죽음을 살핀다는 것은 결국 삶을 포함해서 이루어진다. “빅 슬립죽음의 속어라는데 챈들러는 독자에게 죽음의 여러 모양을 보여준다. 어리석은 죽음, 안타까운 죽음, 죽이는 자와 죽음을 이용하고 다루는 자, 공허한 눈으로 임박한 죽음을 앞둔 자와 살아있지만 죽음과 다를게 없는 삶을 살며 죽도록 삶을 해치고 낭비하고 파괴하는 자들을 볼 수 있다. 무기력을 넘어 희망을 바랄 수 있을까? 책을 덮고 나니 로스엔젤레스의 네온사인은 흐릿해지고 스턴우드 대저택의 반짝이던 아우라는 스산함을 남긴다. 마치 서늘하고 쓸쓸한 흑백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것만 같다.

 

  책 속에서>

- “스턴우드 집안은 돈이 많아요. 그 돈으로 사들이는 건 실망뿐이지만.(73p)”

 

-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욕을 하든, 남들이 무슨 욕을 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이 방은 내가 살아가는 곳이다. 내가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여기뿐이다. 내 소유물은 모두 이곳에 있다. 나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물건들, 내 과거와 얽힌 물건들, 내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물건들이다.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책 몇 권, 사진 몇 장, 라디오, 체스 말, 오래된 편지, 그런 것들이 전부다. 보잘것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모두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다. 그런 방에 그녀가 들어왔다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욕지거리는 그 사실을 상기시킬 뿐이었다.(19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당해라, 몰리 루 멜론 I LOVE 그림책
패티 로벨 외 지음,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패티 로벨의 당당해라, 몰리 루 멜론/보물창고/데이비드 캐트로 그림은 보물창고 “I LOVE 그림책시리즈의 새로운 책입니다.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개성만점 작품들 덕분에 읽고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지요. “당당해라, 몰리 루 멜론”, 제목을 읽자 마자 자세를 곧추세우게 됩니다. 마치 나를 향한 말처럼 들리거든요. 화사한 표지 속에는 귀여운 꼬마가 보입니다. 나비나 곤충, 개구리가 꼬마를 향하고 있어 어쩌면 요정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 요정은 아닙니다. “1학년 중 제일 작은 여자애로 강아지보다 조금 크다니 상상만으로도 신기하네요.

 

그런데 몰리 루 멜론은 키만 작은 것이 아니었어요. 튀어나온 뻐드렁니, 괴상한 목소리, 손을 놓쳐 떨어뜨리는 실수도 반복되고 이쯤 되면 결점 투성이었죠. 사소한 약점 한 가지만 있어도 의기소침해지고 감추고 싶어질텐데 몰리 루 멜론의 표정은 전혀 다릅니다. 거리낌없는 당당함이 넘치는데 비결은 따로 있었습니다. 몰리 루 멜론을 완전히 지지하는 한 사람’, 바로 할머니의 존재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확신에 찬 말씀은 어떤 비난이나 부정적인 목소리도 거뜬히 물리치게 합니다. 초긍정 마인드는 고스란히 몰리 루 멜론에게서 꽃처럼 피어납니다.

 

그것은 환경이 바뀌어 물리적 거리라는 장해물이 가로막아도 지속됩니다. 공격하고 놀려대도 몰리 루 멜론의 마음은 상처받지 않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미 견고한 사랑과 믿음, 스스로를 아끼는 자신감이 가득하기 때문이겠죠. 결국 로널드 더킨도 몰리 루 멜론에게 웃음을 건넵니다. 부정은 긍정을,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하고 좋은 쪽으로 흡수되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화려하고 사랑스런 색채로, 생생한 인물들의 표정으로, 아기자기한 묘사로 독자의 마음을 설레이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는 감탄을 불러일으킵니다. 할머니의 말씀이 그토록 확신에 차고 강력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분명, 반복해서 볼수록 더 좋아질 힘있는 그림책입니다.

 

책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걸으렴. 그럼 세상이 널 우러러볼거야

활짝 웃으렴. 그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거야

또렷하고 힘차게 노래하렴. 그럼 세상은 기쁨의 눈물을 흘릴 거야

너 자신을 믿으렴. 그럼 세상도 널 믿게 된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